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세 등급으로 나뉜다.
청정 지역이자,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화이트.
합법과 불법, 그 경계에 서 있는 평범한 그레이.
범죄가 끊이질 않는, 가진 것 하나 없는 하층민으로 이루어진 블랙.
등급에 따라 그에 맞는 규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어겼을 경우, 등급이 하락하지만 제일 아래인 블랙은 유지된다. 화이트는 인간의 7대 주선을, 블랙은 인간의 7대 죄악을, 그레이는 그 둘의 혼합을 옳은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등급에 상관없이 중범죄에 해당하는 것들은 모두 블랙으로 추방되며 경범죄는 각 등급별로 다른 처벌 기준이 적용된다.
등급은 자연스레 부모에 의해 결정되며, 서로 다른 등급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둘 중 낮은 등급을 따른다. 등급 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화이트와 블랙 사이의 사랑, 혼인은 인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화이트와 그레이, 그레이와 블랙 또는 같은 등급만이 인정된다. 하지만 화이트가 자신의 등급을 포기한다면 가능하다.
제1구역인 화이트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상층부답게 재력가, 고위 공직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죄율이 0에 수렴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합법적이고 청렴한 것들만 취급한다. 중간 지점인 제2구역, 그레이는 평범한 인간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합법과 불법이 공존하지만 대부분 합법적인 것을 추구한다. 마지막 제3구역인 블랙은 범죄율이 무려 90%에 달하며 구역의 중심가는 거리에 비린내가 끊이질 않는다고 해서 레드 존이라 불린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그곳으로.
[ Back to black ]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풀어내며 손목을 털어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차가웠다. 미동조차 없는 몸뚱어리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쯧. 무거운 정적 속에 혀를 차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끈적이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시멘트 위로 무언가가 강하게 부딪힐 때마다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회장님."
줄곧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윤 실장이 다가왔다.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를 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밑에 고인 붉은 웅덩이 위로 퍼석한 얼굴이 비쳤다.
-
"오랜만이군."
물끄러미 내민 손을 쳐다보고만 있자, 무안해졌는지 이내 손을 거두며 자리로 안내했다. 기다란 복도로 들어서자 하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저번 일은 미안하게 됐네."
"그게 답니까?"
"... 뭐?"
"그렇게 가만히 계시라고 했는데... 결국은 제가 직접 나섰지 않습니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벌써 두 번째였다. 아무리 개차반 신세인 블랙이라지만, 이 곳에도 보이지 않는 선은 존재했다. 더군다나 이 일이 밝혀지면 제일 두려워할 인물은 장 회장이었다. 까딱하다 잘못되면 곤란하실 테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게를 실어 찻잔을 내려놓았다. 겉으로는 청정이니, 범죄 없는 안전한 도시니 떠들어대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주 은밀하게 블랙과의 교류가 이어졌다. 대부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을 맡겼다. 매우 교묘하게 법의 굴레를 피해갔으며, 발각이 된다 한들 이미 속부터 곪아버린 세계에서는 무조건 돈이면 됐다. 알고서도 쉬쉬하는 건 다반사고, 오히려 거래를 원하는 이들이 집단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서로 간의 입막음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래 꽉 잡고 있던 줄을 살짝 느슨하게 풀었던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화이트와 블랙 사이의 거래에는 단 한 가지 규칙만이 존재했다. 블랙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든, 화이트는 그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 간섭은 일절 금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나마 수직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제약이었다.
"제가 장 회장님을 뵌 지가 벌써 이십 년짼데,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네요."
그의 말은 섭섭함이 묻어나면서도 위협을 담고 있었다. 더는 자신의 심기를 건들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였다.
"우리 회장님이 어디서 뭘 하시는지, 무슨 판을 벌리시는지. 제가 간섭할 바는 아닙니다만..."
"..."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나마 멀쩡한 다리 하나는 지키셔야죠."
"너 지금..."
"그리고, 이번 일의 대가는 조만간 받겠습니다."
"대가라니, 그게 무슨...!"
강한 힘에 의해 테이블 위가 거칠게 요동쳤다. 이마에 불거진 핏줄이 그가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복도와 접견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이 활짝 열리고 다급하게 장 회장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부하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이 빠르게 거둬지고 마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바짝 긴장을 한 모습에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를 풀어내며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레드 존."
"그곳엔 무슨 일로..."
줄곧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백미러로 향했다.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내려다보던 장 회장이 지팡이를 짚으며 복도를 걸었다. 그 놈, 아직 살아있지? 그 말에 머뭇거리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 좀 시켜야겠어."
.
.
.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쏟아지는 비를 피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 씨, 오늘 같은 날에 지랄 맞게 비가 오냐. 천막 아래에 황급히 몸을 피한 남자가 물기를 털어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회장님이 9시까지는 전달하라고 하셨는데."
"젖지는 않았지? 그거 망가지면 우리 셋 다 뒤진 목숨이야."
"근데 이 안에 든 게 뭔 지, 형님은 압니까?"
"몰라, 새꺄.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돼."
"더 늦기 전에 출발하시죠."
"여기는 언제 와도 참 좆같단 말이야."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마저 스산하게 느껴졌다. 도시의 중심으로 갈수록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골목 하나를 빠져나왔을 뿐인데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레드 존에 들어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지나쳤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는 순간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분주한 발걸음은 다 쓰러져가는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 여기 맞아?"
"메모에 적힌 주소와 같은 곳입니다."
셋 중 그나마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고리를 붙잡고 섰다. 끼익 거리는 마찰음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곧 무너질 것만 같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벽에 난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작은 빛에 의존해 벽을 더듬거리던 손이 스위치로 보이는 것을 눌렀다.
"9시 10분."
"... 예?"
"내다 버린 10분은 누가 책임질 예정이지?"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가 그들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저, 저 사람은... 서류 봉투를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직접 온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어, 어떡합니까?"
"... 씨발. 우린 죽었어, 이제..."
눈을 질끈 감은 남자가 멀뚱히 서 있는 일원에게서 물건을 뺏어들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내밀었다. 회장님께 전달해드리라고 하신 물건입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 틈새로 종이봉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자 눈치를 보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는 봉투 안에 든 것들을 미련 없이 바닥에 쏟아냈다. 만년필과 함께 종이 세 장이 펄럭이며 떨어졌다.
"... 이게 뭡니까?"
"그쪽 구역에서는 못 들어봤을 겁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든 윤 실장이 깍듯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곧 여럿이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세 사람의 인적사항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거래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거래를 파기하거나 처리에 실패했을 경우, 그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대부분 금품이나 값비싼 것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3구역의 인구가 무분별한 범죄로 인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 부릴 사람들이 줄어들자, 화이트는 그 대가를 사람으로 치렀다. 사람과 함께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 사인을 하기 위한 도구가 담긴 봉투가 거래의 전부였다. 늦은 시간, 거래 대상자만 직접 그 구역으로 보낸다 하여 속히 밤산책이라 불렀다.
"장 회장이 뭐라고 하면서 보냈지?"
"저희는 아무것도..."
"귀가 달렸으면 들은 게 있을 텐데."
"정, 정말입니다...! 아무것도 들은 것이... 아악!"
아직 불이 붙어있는 담배의 끝이 허벅지 위로 짓눌리며 비벼졌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방 안을 메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몸을 조직원 하나가 꼼짝 못 하도록 붙잡았다. 빚진 10분은 이것으로 때운 걸로 하지.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덤덤하게 형체가 일그러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담뱃재가 퀴퀴한 공기 속에 흩날렸다. 나머지 둘은 비교적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하나는 달랐다. 뒤집어쓴 후드를 벗겨내자 성한 곳 하나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앳되어 보이는 것이 많아도 스물 셋, 넷 그쯤으로 보였다. 버석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형원이 느릿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름."
"..."
"한 번 더 묻지. 이름."
"... 입니다."
"다시."
"손현우입니다."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까만 눈동자 속에는 독기가 가득한 것이 꼭 어릴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뒤 종이와 함께 만년필을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내용이 무엇인지 읽어볼 새도 없이 강압적인 힘에 의해 아무렇게나 사인했다. 하단부에 휘갈겨 쓴 이름을 확인한 윤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둘은 알아서 처리하고, 집무실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회장님...! 채 회장님!"
팔을 뿌리치며 기어 온 남자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 다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들로 얼룩진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코웃음을 쳤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양새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쉽지만, 난 봐주는 취미는 없거든."
"예...? 한 번만 기회를...! 크윽!"
날카로운 것이 살갗을 파고드는 생경한 소리에 몸을 떨었다. 행여나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마룻바닥 위로 추욱 늘어진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텁텁하게 마르는 입안을 축이며 그들의 따라 차에 올라탔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속에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와 삐걱대는 판자 소리만 들려왔다. 신입, 앞으로는 여기서 지낸다. 침대와 책상이 전부인 작은 방은 둘러볼 것도 없었다. 수북하게 쌓인 먼지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곳임을 알려주었다. 검지 위에 묻어난 먼지를 후 불어냈다.
"가기 전에 간단한 것들만 먼저 물어볼 테니 대답, 착실하게 해."
"... 네."
"인적사항이 좀 특이하던데. 어떻게 화이트로 올라간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본래 그레이였다. 화이트인 어머니와 그레이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연스레 아버지의 등급을 따랐으나 5살이 되던 해, 화이트가 되었다. 등급이 상승한 자들은 정해진 법에 따라 무조건 기록이 남았다. 자신이 왜 화이트가 되었는지, 어떤 방법으로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따로 이유를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화이트가 더 좋은 것이니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경우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질문을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 회장 밑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된 거지? 화이트라면 더욱 붙잡힐 이유가 없을 텐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저를 붙잡으며 울부짖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팔려 온 것이었다. 화이트 내에서는 불법적인 거래는 금지였으나 그것도 표면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은 장 회장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 하지만 일이 꼬여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자 장 회장은 다른 것도 아닌 저를 대가로 받길 원했고 결국 그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쉽게 말해, 그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꼬이게 되면 그는 제가 있는 방으로 와 일방적인 구타를 가했다. 얼굴 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행여나 뼈라도 부러지면 다시 이어 붙여서라도 폭행을 일삼는 그였다. 그것이 몇 달 동안 지속되니, 자물쇠가 덜컹거리며 나는 금속 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질문은 이 정도로 하고, 따라와."
이곳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거대했다. 하나의 조직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했다. 저를 향한 따가운 시선들을 맞으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꽤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탓인지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자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을 쉬기가 조금 버거웠다. 끝 층에 멈춰 서자,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리자마자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가볍게 노크를 한 남자가 먼저 들어서고 아무렇지 않게 그 뒤를 따랐다. 의자에 앉아 서류철을 넘겨보던 그의 시선이 제게 향했다.
"회장님, 데려왔습니다."
"그 애는 놔두고, 다 나가봐."
"예."
한동안 뻘쭘하게 서 있다 눈치를 보며 소파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30분이 넘도록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채형원.' 명패에 써진 이름을 훑어보다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해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에 기댄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가 어느새 제 앞에 멈춰 서더니 턱을 붙잡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마치 물건을 살피는 것처럼 성의 없는 손길에 머리가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딱지가 앉은 입술 위를 쓸자 눈썹이 움찔거렸다. 거친 피부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그가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자, 손등부터 기다랗게 이어진 검푸른 문신이 드러났다. 어디선가 봤던 것이었다. 화이트는 블랙과 접촉할 일도, 마주칠 상황도 없었지만 그곳에 끌려간 뒤로는 몇 번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팔을 덮고도 남는 문신이 있었다. 마치 하나의 표식처럼 같은 무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출처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잔뜩 긴장을 한 것과는 다르게 별다른 일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벽 끄트머리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힘겹게 열자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지옥 같던 삶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조금씩 긴장을 놓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장회장이 왜 자신을 풀어줬는지는 의문이었다. 마치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순순히 내보내 준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몰려오는 졸음 앞에서는 고민도 잠시일 뿐이었다.
.
.
.
"부르셨습니까."
"맡긴 일은?"
"지하에 가둬 놓았습니다."
"지금 내려가지."
신입, 나와.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겨울임에도 따뜻한 물이라고는 나오지 않는 샤워실에서 추위에 떨며 몸을 씻어냈다. 어제 입었던 옷을 탁탁 털어 머리를 끼워 넣었다. 벌써부터 얼기 시작하는 머리를 털어내며 저를 불러낸 조직원 뒤를 따랐다. 3구역은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하게 기분이 나쁜 구석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건물 지하에 위치한 '블루'라고 불리는 이 곳은 정말 불쾌하기까지 했다.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가 유일한 빛이었다. 빛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면 까마득한 어둠으로 인해 공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벌써부터 답답해져 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바닥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에는 형원이 서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했다.
"커억."
가까이 다가갈수록,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라 가쁘게 숨만 몰아 내쉬고 있었다. 피로 얼룩져 있는 안과 대비되는 파란 조명이 비추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처참한 몰골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으며 등을 돌렸다. 이봐. 어깨를 붙잡는 손을 강하게 뿌리치며 물러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제대로 내쉴 수가 없어 무너져 내렸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듯한 익숙한 압박감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나이프를 손수건에 문지르며 다가왔다.
"그나마 쓸 만해 보여서 데려왔더니."
"허억, 흐..."
"이렇게 약해빠져서야."
서늘한 날 끝이 턱을 치켜들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바싹 마른 퍽퍽한 공기가 빨려 들어왔다. 내쉬지 못하고 들이쉬기만 하는 것을 보던 그가 맥없이 늘어진 손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곱게 자랐을 테니, 이런 건 본 적 없을 거고."
"하아..."
"당연히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겠지."
손에 무언가가 쥐어지는 느낌에 힘겹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올려진 나이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이내 멀리 내팽개쳤다. 딱딱한 바닥 위로 쇠붙이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몸을 이렇게나 덜덜 떨어 대면서도 제멋대로 구는 것이 퍽 우스웠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까딱 손짓을 하자, 윤 실장이 도로 가져왔다. 나이프를 받아 들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볼 위로 축축한 뭔가가 흘러내렸다. 순간 형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가죽 장갑을 벗어 볼에 묻은 것을 닦아냈다. 처음엔 겁만 줄 생각이었으나 속에서 무언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목덜미를 붙잡아 의자 앞까지 질질 끌고 와서는 강제로 나이프를 쥐게 만들었다.
"죽여."
"못해, 나는..."
"안 하면 내가 해."
"싫어, 싫어...!"
"잘 보고 똑똑히 기억해 둬."
그는 망설임 없이 겹쳐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질끈 감은 두 눈이 젖어 들어갔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벽에 부딪혀 윙윙거렸다. 축 늘어진 몸을 내려다보던 형원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힘없이 미끄러지며 바닥 위로 쓰러졌다.
"깨워."
철벅이는 물소리와 함께 얼굴 위로 찬물이 뿌려졌다. 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떴다. 흐린 시야가 선명해졌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비틀었으나 곧 자신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음장 같은 추위가 고스란히 느껴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안경을 고쳐 쓴 윤 실장이 종이 한 장을 전등에 비추었다.
"이름 손현우. 나이 24세. 등급 화이트. 대가성 지급으로 몇 달 전 장 회장 밑으로 들어간 사실이 있습니다."
"재밌네. 장 회장이 사람을 샀다."
"근데 조사해보니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무슨?"
"그게... 몇 달 동안 한 곳에 가둬 놓고 정말 개 패듯이 패기만 했답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문을 떠올렸다. 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던 양반이 무슨 수로 사람을. 그것보다 왜? 고개를 푹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젖은 상의를 들추어 올리자, 군데군데 크고 작은 흉터들이 눈에 띄었다. 플래시를 비추어 보니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려주듯 흉터들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제야 독기 가득하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후으... 남의 인생 들여다보니 재밌어?"
"재잘 대는 거 보니 멀쩡하네."
"... 멀쩡하긴. 반병신이나 다름없지. 그쪽도 방금 들었으니 알 거 아냐."
"안 그래도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인데. 너, 맞기만 한 게 아니지?"
그 말에 눈에 띄게 굳어진 표정이 그것이 사실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의 눈은 독기가 아닌, 살기를 품고 있었다. 짓이기듯 문 입술이 찢어져 피가 새어 나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턱 끝으로 모였다. 발밑에 고여 있는 웅덩이에 비친 얼굴이 일렁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과거를 생각해서 일까, 아니면 벗어났다고 생각한 저 자신이 비참해서 일까. 급격히 떨어진 체온으로 인해 퍼렇게 변한 입술은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어금니에서 아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먹을 꽉 쥐자 노끈이 살을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이를 깨물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저를 향했다. 악에 받쳐 저를 노려보는 눈을 마주하며 그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절망으로 가득한 그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볼을 그러쥐었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형원은 그 원망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말의 희망조차 품지 않도록 끝없는 어둠 속으로 발목을 붙잡아 끌어내리고 싶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린 형원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윤 실장."
"네."
"내 방으로 올려보내."
.
.
.
무언가 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 그를 노려보았다. 생채기가 난 피부 위로 조금씩 핏방울이 맺혔다. 따끔거리는 목덜미를 쓸어내린 형원이 옅게 웃었다.
"이거 놔!"
"좀 더 치밀했어야지."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목을 뿌리치려 몸부림을 쳤으나 그는 오히려 붙잡은 손목을 당겨오더니 다짜고짜 입술을 부딪혀왔다. 그대로 얼어붙어 입을 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벌려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잔뜩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밀어내자 뒤로 물러났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힘껏 문질러 닦았다.
"미친 놈."
"여긴 미칠수록 더 뛰어난 법이거든."
당장이라도 웃는 낯짝을 일그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저 목을 그어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민첩하지 못한 몸뚱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
"대가성 지급의 계약은 만료가 없어."
"무슨 말이야."
"... 똑똑하지는 않네. 내가 널 놓아줄 때까지 못 벗어난다는 얘기지."
그러니 헛된 희망 품지 마. 현우의 얼굴이 서서히 구겨졌다. 상스러운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신은 지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불구덩이 한 가운데로 떨어진 것이었다. 장 회장은 영영 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주먹을 말아 쥐어 벽을 강하게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피부가 까지고 터진 부위가 짓눌러져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던 형원이 그를 멈춰 세웠다.
"나는 봐줄 생각 없어. 그러니 눈치껏 행동해."
"..."
"지금처럼 날뛰는 것도 오늘까지야. 이제 어떻게 할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붙잡아 올린 형원이 혀를 찼다. 있는 거라곤 몸뚱어리 하나뿐인데, 함부로 하면 쓰나. 하지만 그는 뱉은 말과 다르게 찢어진 피부 위를 힘을 실어 눌렀다.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상처를 파고들었다. 이미 불리한 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꾸역꾸역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을 내팽개쳤다.
"오늘 계약, 네가 나갈 거니까 준비해."
"... 뭔데."
"가보면 알아."
매끄럽게 구르는 차 안에서 애꿎은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당장이라도 차 문을 박차고 뛰어내리고 싶었으나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부하들이 양옆을 차지했다. 까만 밤거리를 내달리는 와중에 저 멀리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 게이트?"
각 구역의 경계에는 게이트가 세워져 있었다. 불법 통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절차와 규정을 준수한 통행증이 필요했다. 왜 지나쳐야만 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다른 구역으로 가는지. 통행원은 새까맣게 선팅 되어있는 창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와 동시에 담요로 제 몸을 가린 조직원이 머리를 눌러 바짝 엎드리도록 만들었다. 간단한 말들을 주고받는 것을 들으며 숨을 죽였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면 저들이 나를 구해줄까,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둘까.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사이에 차는 다시 출발했다. 천천히 그들을 따라 차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온 익숙한 풍경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 쳐...?"
이 곳은 장 회장의 별장이었다.
.
.
.
"헉... 헉..."
손톱이 다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옴에도 아랑곳 않고 바닥 위를 기어갔다. 발목을 끌어당기는 손을 매정하게 차내기를 몇 번,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뉘며 마른 숨을 토해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다. 멍한 시선으로 올려다본 천장은 새빨갛기 그지없었다. 방 안을 가득 메웠던 소음도, 저를 옭아매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으나 어째서인지 몸은 더욱 몽롱하게 가라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가 지나간 자리가 얼룩진 손바닥 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옷을 추스르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성하지 않은 곳이 없는 옷을 살피더니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 돌아가요."
"..."
"당장!"
나이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여기저기 튀었다. 위태로운 몸을 이끌고 겨우 차에 올라탔다. 빠져나올 때 챙겨온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냈다. 핏자국을 닦아내며 화면을 넘기던 손이 한 폴더에 멈춰 섰다. 'Black - CHW.' 머뭇거리다 이내 폴더를 누르자, 숨겨져 있던 파일 하나가 드러났다. 그의 신상정보가 담긴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다는 것과 어릴 때부터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어 고아라는 사실 또한 알아냈다. '부 - White. 모 - Black.'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는 정보로 보아 아마도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되는 사생아였을 것이었다.
"하..."
피로 얼룩진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인혈을 뒤집어쓴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따끔거림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쳐다보고 있자니, 그 모양새가 마치 피칠갑을 한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끝 층에 다다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윤 실장은 자리를 비운 듯했다. 문고리를 밀어젖히자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통화를 하던 형원이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제 손에 들린 나이프로 향했다. 그는 곧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짧은 말과 함께 통화를 끝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반응도 없었다. 진흙 속으로 푹푹 빠지는 것만 같은 무게를 견뎌내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날붙이가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었다.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바라보던 형원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나쁜 새끼. 버석하게 마른입 안에서 원망을 담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 왜 보냈어."
"..."
"이럴 줄 알고?"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더는 건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장 회장이 그를 만나게 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밤산책을 보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발목을 붙잡는 미련한 짓을 하는 것마저 그 다웠다. 문득 장 회장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장 회장은 자선 사업에 발을 들여 3구역에 하층민을 돕기 위한 시설을 세웠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기억은 아직도 또렷했다. 시설의 아이들은 만 14세가 되면 그곳을 떠나 자립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잘 곳도 없는 아이들이 블랙의 신분으로 홀로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시설의 이야기가 좋지 않게 퍼져나가면 타격이 생길 거라는 사실을 안 장 회장은 한 가지 방안으로 성년이 될 때까지만 그들을 맡아줄 위탁 가정에 보냈다. 그러나 3구역엔, 행복 같은 건 사치에 불과했다.
"다 죽었나?"
"그런 것 같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매달 위탁 가정에 확인차 방문했던 조직원 중 하나가 다급하게 장 회장을 불렀다. 온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아이를 보낸 지 겨우 일 년이 된 시점에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어지럽게 널브러진 물건들을 피해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아이가 모로 누워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침대와 대비되는 빨간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검푸른 멍들이 팔과 다리 곳곳에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아이가 입고 있는 티셔츠가 본래 빨간색이 아님을 깨달았다. 미동 없는 몸을 내려다보다 다시 거실로 향하던 장 회장이 순간 멈칫하더니 빠르게 돌아와 아이의 옷을 들추었다.
"... 찔린 흔적이 없어."
"예? 그게 무슨..."
"몸에 상처가 없는데 이만한 피를 흘릴 수가 있나?"
"... 거의 불가능합니다."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니 작은 숨결이 느껴졌다.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운 장 회장이 실소를 터트리자, 아이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떠졌다. 아이는 분노에 차 있었으나 침착했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두 발로 섰다. 그것이 장 회장이 처음으로 마주한 형원의 모습이었다.
온전히 제힘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장 회장의 밑에서 악착같이 버텨온 시간이 떠올랐다. 위탁 가정에 보내졌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자, 하나둘씩 장 회장의 밑으로 들어왔다. 자신은 그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었다. 장 회장은 악랄했다. 애초에 그들을 구제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단순한 소모품처럼 쓰고 버려도 후환이 남지 않는 이들을 쉽게 데려오기 위해 세운 시설을 자선 사업이라 떠들고 다녔다. 모진 학대와 차별을 받으며 화이트가 하지 못하는 궂은일들을 도맡았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낙인처럼 새긴 팔의 문신 때문에 기회를 엿보고 도망쳤던 아이들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도로 붙잡혀왔다. 그 역시 장 회장을 경멸했지만, 조금 달랐다. 장 회장은 반항도, 거부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형원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형원은 어린 나이에 살아남을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서인지 이상하리만큼 그와 닮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축축하고 끈적한 뒤통수를 감쌌다. 채형원.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형원의 눈썹이 까닥였다. 실소를 터트리자 초점 없는 눈이 저를 향했다.
"나 좀 죽여줘."
처연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피를 뒤집어쓴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으며 죽여 달라고 빌었다. 나이프를 주워들기 위해 몸을 굽힌 현우가 옷깃을 끌어 올리는 손에 주욱 딸려 올라왔다. 곧 거칠한 입술이 닿았다. 천천히 입을 벌리자 틈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쓸어 올렸다. 뱉지 못한 숨이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눅눅한 숨이 얼굴 위로 옅게 퍼졌다. 훅 끼쳐오는 찬 공기에 감은 눈을 뜨자, 그는 주머니에서 행커치프를 꺼내 성의 없는 손길로 던졌다. 쓰고 버려. 아마도 엉망인 얼굴을 닦아내라는 의미에서 던져준 것이겠지만, 현우는 옷자락을 당겨 피범벅이 된 그의 손을 닦아냈다. 그를 바라보는 형원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어디 가지 말고, 당분간 내 옆에 있어."
형원은 자꾸만 겹쳐 보이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발악할수록 더욱 놓아주기 싫었다. 피부 위로 새겨진 수많은 흉터로 인해 거칠지 않은 곳이 없던 몸을 떠올렸다. 손을 뻗어 뜯어진 입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는 잠자코 올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미야?"
"뭐가."
"나 사람 죽였어. 그쪽하고 아주 관련 깊은."
"그래서."
"당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거 알고 있잖아."
무슨 이유로 자비 아닌 자비를 베푸는 것인지 궁금했다. 독단적으로 행동한 저 하나 때문에 세상이 뒤집혀버릴지도 몰랐는데 그는 여전히 태평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장 회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라면 문제였다. 왜 나를 살려두려고 하지? 문득 그의 감정이 알고 싶어졌다. 제게 동정, 연민이라도 느낀 걸까.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너야 말로, 왜 그랬어?"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그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그는 아마도 나이프를 버린 이유에 대해 묻는 듯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막상 눈앞에 죽음이 다가오니, 비참하게도 살고 싶어졌는지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은 안정을 원했다. 이미 3구역으로 내려온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다시 올라갈 수도 없을 뿐더러 채형원이 죽어버리면 영영 이곳에 묶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항 없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새하얗던 머릿속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형원은 벌써 딱지가 앉아 까슬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어때, 연습했던 게 도움은 됐고? 마치 상황을 재연하듯 허공에 칼질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분을 참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이프를 빙빙 돌리자 불투명한 혈흔 사이로 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잡고는 그의 목덜미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선택권을 주지. 하나는 바라는 대로 내가 널 죽여 버리는 거."
"..."
"다른 하나는 조용히 닥치고 내 밑에서 일하는 것."
"허..."
"도피는 내 계획에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니 선택해."
뭐, 얌전하게 굴면 돌려보내줄 수도 있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느냐, 악착같이 버텨서 돌아가느냐. 자신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킬 때마다 날 끝이 살을 파고드는 듯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우였다.
"... 할게, 일. 대신 보내준다고 약속해."
"아쉽네. 난 네가 죽여 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나더니 나이프를 선반 위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깊게 박힌 칼은 약속의 증표이자 그가 주는 경고였다. 다시 뽑아내는 날이 내 운명이 다하는 날이라고.
.
.
.
찰칵이는 셔터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빠르게 점멸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는 하얀 비닐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건물 밖에 주차된 탑차에 커다란 봉투를 실었다. 주위로 수풀이 우거져 있어 새벽녘이 떠오름에도 이 곳은 여전히 깜깜했다.
"조회해본 결과, 대부분 사설로 고용된 용역이거나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 그럴 리가 없어."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갈 곳 잃은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한 기분에 몇 번이고 명치께를 두드렸다.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 형원을 향했다.
"내가 분명... 분명 내 손으로..."
"네가 살려준 건 아니고?"
"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될 이유는 없지. 시체가 없으니."
있어야 할 장 회장이 사라졌다. 어젯밤의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를 썼다. 날카로운 칼끝이 정확히 오금을 파고들었다. 멀쩡하던 다리마저 못 쓰게 되자, 이미 두부에 큰 손상을 입은 장 회장은 힘을 짜내어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강이뼈가 뒤틀렸다. 입에 물고 있던 나이프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아주 희박한 운으로 살아난다한들, 두 다리를 못 쓰게 되면 자신을 더는 못 찾을 것 같았다. 그런 일차원적인 생각으로 다리를 부러뜨렸다.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살아도 산 게 아닐 테지."
형원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면서도 불안한 것은 여전했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어지러웠다. 손을 쥐었다 펴자, 식은땀이 한가득 배어 나왔다. 현우가 나가고 난 뒤, 윤 실장의 보고를 듣던 형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이 없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그쪽도 손 쓸 수 없을 겁니다."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태인가?"
"예.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합니다."
"희박하다는 거지, 없는 게 아냐. 긴장 놓지 말고."
"예. 소식이 오는 대로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밤안개가 스산하게 깔린 도시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얼굴에 튄 핏방울들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주변을 빠르게 훑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삶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서서히 몸에 익어갔다. 처음엔 진절머리가 나던 일들도 어느새 몸에 익어, 이제는 밥 먹듯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봐온 3구역에는 제정신이 아니거나 무기력한 사람들만 존재했다. 모든 것이 경쟁이었고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또한 이 곳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미쳐버리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이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도 무색해졌다. 또 한 가지의 변화라면, 몇 달간 자신을 괴롭혔던 폐쇄된 공간이 주는 두려움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 구역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알게 된 변화였다.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에 물을 들이붓고는 빠르게 레드존에서 빠져나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에게서는 탄내가 났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그것이 일상인 양 개의치 않아 했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들어와 조금 지친 몸을 소파에 뉘며 긴 한숨을 뱉었다.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이 상판 위로 깊숙하게 박힌 나이프로 향했다. 장 회장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1구역이 너무 조용한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삼엄한 보안을 뚫기 어려워 찾을 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저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건지, 물을 때마다 형원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두루뭉술하게만 말할 뿐 확실한 대답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점차 이 일에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귀찮은 듯하면서도 제게 확답을 주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보내준다는 약속, 꼭 지켜."
"... 그래."
사실은 모든 게 환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장 회장을 없애려 한 게 맞는가? 그 사람이 장 회장이었던 것은 확실한가? 이제는 가물가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매일 밤 제 손이 그의 피로 물드는 악몽을 꾸는 것은 여전했지만, 반복되는 기억은 점점 무뎌져 갈 뿐이었다.
"..."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형원이 현우를 발견하곤 외투를 벗다말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기다리다 잠에 든 건지 소파에 기대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끝이 볼을 훑었다. 어딘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현우가 감은 눈을 떴다. 방금 온 건지 찬 공기가 맞닿아왔다. 빠르게 손을 거둔 형원이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걸어갔다.
"사람 불러놓고 기다리게 만들어."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형원을 쏘아보았다. 상대를 너무 싫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눈만 맞았다 하면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전했으나 아무리 서로를 증오해도 한곳에 오래 있다 보면 없던 정이라도 생기는지, 이제는 애증의 관계에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고는 채형원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 거지같았지만 어느 순간 그와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가끔 갑작스럽게 입술을 붙여왔는데 혹 피해버리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것 외에 별다른 접촉은 하지 않았다. 그는 외투를 걸다 말고 별안간 다가와서는 허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더운 숨이 맞닿았다. 손목을 끌어당겨 허벅지 위로 앉혔다. 조금 당황스러운 시선이 저를 향했다.
"뭐 하는, 아..."
뜬금없는 행동에 의미를 묻기도 전에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옷 안으로 밀려들어 온 손이 허리께를 쓸어내렸다. 닿아오는 손길이 차가워 몸을 잘게 떨었다. 고개 밑으로 한껏 치켜 올라간 옷을 끌어내릴 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느릿하게 허벅지를 쓸어내리다 둔부를 움켜쥐었다. 조금 달뜬 얼굴을 마주하자 놀란 듯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쓸어내리자 어깨를 움츠렸다. 곧 바지 버클을 붙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얼른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한겨울임에도 더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 뭐가?"
"뒤처리, 그만해도 된다고."
"... 설마. 찾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형원은 이미 손해 본 것이 많으니, 장 회장을 찾을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은 직접 처리하라며 블랙 구역에 심어놓은 장 회장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겼다. 싹을 잘라내다 못해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잔인한 방식이 그 다웠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한동안은 그냥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할수록 결국 불리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허공을 가르는 손짓에는 더이상 머뭇거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갈게."
"그건 안 돼."
"언제는 내가 책임지라며. 그래서 결자해지 하겠다잖아."
"저번처럼 네가 감정적으로 나서서 일을 망치게 되면."
"... 뭐?"
"두 번은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목숨을 살려주는 멍청한 짓은 한 번으로 족해. 형원은 칼같이 거절했다. 서툴렀던 처음에 비해, 나이프를 쥐는 일에 익숙해진 그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건 형원도 알고 있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를 보내준다던 약속을 지키기가 싫었다. 사실 손현우를 1구역으로 올려보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다. 책임이라는 이유로 그의 발을 묶어놓았지만 장 회장에 대해 캐물어오는 것을 더는 피할 수가 없을 뿐더러 때마침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자신이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봐온 정을 생각해 부하를 보내기보단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지.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현우가 멍하니 제 입술을 매만졌다. 아까의 입맞춤은 그간의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쓸데없는 착각이었다.
병실 문을 열자,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장 회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시들어버린 꽃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고는 하얀 국화 한 다발을 꽃병에 꽂아두었다. 의자를 끌어와 침대 맡에 앉았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 맞는지 그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뵈니 반갑네요, 회장님."
"... 으으!"
"별로 달갑지 않으신가 보네."
원장에게는 일찍이 부하를 보내 아쉽지 않을 정도의 돈다발이 든 가방을 건네주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도 종이 쪼가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사람의 목숨은 끈질기기도 하지만, 쉽게 부서지는 낙엽처럼 허무하기도 하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평생 남들에게 과시하는 삶을 살던 그가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쇠약한 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게 왜 믿으셨어요."
"..."
"별로 믿을만한 놈 못 되는 거 아셨으면서."
이불을 걷어내자, 비쩍 말라 오그라들고 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작살이 나버린 다리는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자 가죽이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서늘하게 들려왔다.
"제가 더 빨리 보내드렸어야 했는데, 조금 길어졌네요."
"으윽, 으...!"
삐, 삐 -. 규칙적인 경고음이 점점 빨라졌다. 힘이 전혀 실리지 않는 손으로 호흡기를 다시 쓰려 안간힘을 쓰는 몸을 무덤덤하게 내려 보았다. 살기 위해 발악하던 것도 머지않아, 움직임이 멎어들었다.
'감정적으로 나서서 일을 망치게 되면. 두 번은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
그 말은 손현우가 아닌, 저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아, 맞다."
불룩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든 현우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빠져나오기 전에 드럼통에 던져버렸어야 했는데. 오늘 처리한 놈에게서 빼앗았던 것이었다. 증거를 남기는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한번 발을 들인 장소에 다시 가는 것은 위험했으나 하는 수 없이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빗속을 뚫으며 빠르게 레드존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메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들어 새까맣게 재만 남은 통 안을 뒤적거렸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화면이 밝아지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증거는 잘 가지고 있겠지.'
증거...?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런 잠금이 걸려있지 않는 휴대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사진첩이나 문자 내역을 뒤져봤으나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내일 레드존에서 있을 거래에서 새로운 신분 담보로 가진 물건을 교환한다는 메모를 제외하고는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화면을 끌려고 했으나, 또 다시 같은 번호로 문자가 날아왔다.
'녹음 파일 말이야.'
녹음 파일.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폴더를 찾아 뒤졌다. 별다른 이름 없이 녹음이 된 날짜만 적혀있는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비교적 최근에 녹음이 된 것이었다. 망설임 없이 파일을 눌러 소리를 키웠다. 치직 거리는 잡음만 들리기를 몇 분, 소리가 맑아지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리 됐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 명이 아닌 듯 난잡하게 들리던 발소리가 서서히 멎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음과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다시 조용한 정적 속에 짤랑이는 금속 소리가 들리자마자 빠르게 재생 바를 당겼다. 철컥이는 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자물쇠 소리였다. 현우는 곧 녹음된 장소가 자신이 갇혀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가지 않아 바닥 위로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환각 때문에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환각? 무엇을 기억하지 못 한다는 거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였다.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며 숨을 죽였다.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우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손현우를 기다릴 일만 남았군.'
채형원이었다. 현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위를 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지고 선명하게 드러난 퍼즐 조각이 빠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점차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실성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자신은 철저하게 그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풀어내며 손목을 털어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차가웠다. 미동조차 없는 몸뚱이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쯧. 무거운 정적 속에 혀를 차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끈적이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시멘트 위로 무언가가 강하게 부딪힐 때마다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회장님."
줄곧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윤 실장이 다가왔다.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를 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밑에 고인 붉은 웅덩이 위로 퍼석한 얼굴이 비쳤다. 그의 시선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현우에게 머물렀다.
"... 손현우를 기다릴 일만 남았군."
자신이 들고 있던 나이프를 그의 손을 벌려내 손잡이를 쥐게 만들었다.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믿지 않았던 장 회장이었지만 조급함이 컸는지 믿지 말아야 할 순간에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형원은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불시에 기습했다. 살을 푹푹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단시간에 스쳐 지나갔다. 우악스럽게 비틀린 다리를 아무런 감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밀려오는 카타르시스에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
.
.
다음날, 예상했던 대로 장 회장의 사망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사망 당시 그의 상태나 여러 가지 요소들로 보아 당연히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화이트와 그레이, 블랙간의 질서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1구역에서 장 회장의 영향이 그 누구보다 컸던 만큼 모든 화살은 3구역으로 향했다. 또한 그를 죽인 범인이 형원의 부하라는 사실이 소문처럼 퍼져갔다. 대부분은 장 회장을 통해 불법적인 거래를 지속해왔던 화이트의 반발이었다. 죽지 않을 것만 같던 장 회장이 사망함으로써 자신들도 위태로워진 것에 위기를 느낀 것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면서도 어느 정도 적대 관계였던 형원이 지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그날 게이트를 지난 사실 때문에 그들의 의심을 피해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화이트는 당장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목소리에도 형원의 신경은 오로지 한 곳에만 있었다.
"못 찾았나?"
"네, 근데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실망스러운 얘기는 아니었으면 하는데."
"... 거래 장부가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손현우가, 윽!"
갑자기 날아든 전화기에 머리를 맞은 윤 실장이 주춤거리다 이내 몸을 바르게 세웠다. 맞은 부위가 뜨끈한 것이 아무래도 찢어진 모양이었다. 멍청한 새끼.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린 형원이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박혀있던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감시가 심해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는 윤 실장의 말에도 꿋꿋하게 차에 올라탔다. 잠잠하나 싶었더니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그가 제게서 도망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곧 부하 중 하나가 레드존에서 비슷한 차림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왔다.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간 세단이 빠르게 도로 위를 질주했다.
-
주위를 살피며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품 안에 든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레드존을 떠돌다 약속한 장소 안으로 들어섰다. 오랫동안 환기가 되지 않아 텁텁한 곰팡내를 들이마시며 계단을 내려갔다. 전등에 달린 줄을 잡아당겨 불을 밝혔다. 피가 검게 굳어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문자 하나를 보냈다.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를 확인하며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끝이 시멘트 위에 반복적으로 부딪혀 잘게 부서져 나온 파편들이 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부하를 거느린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늦었잖아."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이지."
행색을 보아, 이곳의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화이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거래 대상자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녹음 파일이 담긴 usb와 장부를 미련 없이 넘겼다.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부하들이 앞을 막아섰다. 애초에 물건만을 챙길 생각이었는지 그는 유유히 계단을 올라갔다. 욕을 지껄이며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눈치를 보다 동시에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막아내려 했으나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크윽."
비틀거리는 틈을 타 순식간에 날 끝이 뱃가죽을 가르고 들어왔다. 울컥 새어 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막아내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입술을 짓이겨 물며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핏발이 선 눈을 치켜 뜨며 악에 받친 목소리가 건물 안에 울렸다.
-
"아악!"
복부를 걷어차인 남자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내려갈수록 습한 공기와 함께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바닥에 고여 있는 새빨간 웅덩이와 함께 두 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답지 않게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지하에 다다르자,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손현우가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망설임 없이 멱살을 붙잡아 올렸다. 강하게 어깨를 밀쳐내자 형원은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냈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던 현우가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내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 역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쥐고 있었다. 대치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쳐버린 현우가 그를 당해낼 방법은 없었다. 바닥 위로 쓰러진 그 위로 올라탄 형원이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은 현우가 바들바들 떨어내며 그를 막았다.
"왜 버텨. 막상 죽으려니까 살고 싶어?"
"으윽."
"뭘 망설여. 언제는 죽여 달라며."
분에 찬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간 제 손에 죽어 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칼을 겨눠야 할 대상은 그들도, 장 회장도 아닌 형원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무엇을 기대했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머물러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볼을 쓸어내리던 손길도, 입술을 겹쳐왔던 것도 모두 뭐였을까. 그저 자신을 묶어두기 위한 계획에 불과했던 건가. 잠시나마 그에게 의지했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피가 끓었다. 공허한 눈에 서서히 물기가 맺혔다.
"맞아, 나 죽고 싶었어. 근데...!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너..."
"나한테 입은 왜 맞췄어?"
"..."
"나는 그래도, 네가 조금은 다를 줄 알았거든. 그 새끼랑."
말을 할 때마다 출혈을 막지 못해 벌어진 상처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고통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었다.
"네 말대로... 헛된 희망은 품는 게 아닌데."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어내자, 서서히 날 끝이 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이를 꽉 깨물며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점점 밀어붙일수록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가 그의 손을 적셨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점차 격해졌다. 그의 팔을 붙잡은 손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벌게진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형원이 다급하게 나이프를 집어 던지며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현우, 죽지 마."
.
.
.
"..."
버석하게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몸을 털어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동안 자르지 못해 길어버린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내고는 짧아진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모든 구역의 게이트는 차단되었다. 각 등급 간의 교류와 이동은 금지 되었다. 이제는 정말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목덜미 위로 길게 난 흉터를 쓸어내리다 목도리를 둘러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으며 아무도 없는 빈 집에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바라던 삶으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물속에 섞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었다. 빈손을 쥐었다 펴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이제는 나이프를 쥐는 것보다 볼펜을 쥐는 삶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우중충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득 그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그의 생각이 났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죽지 말라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오늘따라 사람이 북적였다. 상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는 멍하니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허억..."
"저기요, 괜찮아요?"
가슴께를 움켜쥔 현우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공간이 수축하며 드는 압박감에 숨을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공포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찾아왔다. 안정감이 주는 삶은 오히려 숨통을 더욱 조여 왔다.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달려 나갔다. 거센 빗줄기에 금세 옷이 젖어 들어갔으나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내쉴 수 없을 때쯤에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현관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길 몇 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하얀 천 위에 짙게 물들어버린 흑색을 지워내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
.
.
게이트가 차단된 이후로 3구역에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질서가 생겨났다. 커다란 조직들이 단합하여 룰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들은 거래 내역이 담긴 장부를 한 곳에 모아놓고 태워버렸다. 다른 구역과 거래할 일도 이제는 없을 테니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일종의 서약이었다. 깊게 홈이 팬 책장 위를 천천히 훑었다. 금고에 넣어두었던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같은 곳에 박아 넣었다.
"회장님, 아무래도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신진 조직들이 나타나면서 또 다시 힘겹게 세운 질서가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많아지다 보니 잠에 들지 못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온 형원이 외투를 벗다말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 뭐야?"
분명 있어야 할 나이프가 없었다. 착각이었나 싶어 빠른 걸음으로 책장 뒤 금고를 열어봤으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급하게 집무실 문을 밀어젖힌 윤 실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손현우가..."
"... 설마."
윤 실장이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간 형원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거센 비바람만 몰아칠 뿐 사람의 형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소파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 내쉬었다. 턱을 타고 흐른 빗물이 발밑에 고였다. 어떻게 보안을 뚫고 3구역까지 내려올 수 있었는지. 무엇보다도 그가 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닮은 사람이거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나이프만 사라진 것이 이상했다.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형원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없는 삶은 어때. 살만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린 형원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그 곳엔 손현우가 서 있었다.
"너... 어떻게..."
"뭐... 잘살고 있는 것 같진 않네."
퍼석하게 마른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쓰게 웃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이 곳에선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하이에나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자신에게는 더욱 쓸모없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그에게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형원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두는 게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 곳에서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현우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예 막혀버린 게이트를 뚫기란 쉽지 않았다. 첫 번째 게이트에서 석 달, 두 번째 게이트에서 석 달. 총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3구역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 곳은 여전히 어두침침했고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몰래 들어와 훑어만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나이프를 보자마자 두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젖어버린 셔츠 아래로 손목에서 부터 어깨너머로, 뱀의 형상을 띈 문신이 길게 드러났다. 손끝이 느릿하게 팔을 타고 올라가다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허공에 붕 떠 있던 손이 등 위를 배회하다 이내 천천히 감싸 안았다. 가라앉은 시선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맞닿았다.
"..."
아무렇게나 붙여진 밴드를 떼어내자, 짙게 남은 흉터가 드러났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렸지만 형원은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제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훑어 내리는 손길 때문인지,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 때문인지 괜히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피는 계획에 없다는 말. 아직도 유효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당연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를 제외하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가 알고 있던 평소의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의 선택이 훗날 고통 속에 머물게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숨통을 죄어오던 압박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나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로 길게 난 그림자는 어느새 하얗게 변했고, 자신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더 이상 이어진 길이 없어 길을 잃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우는 몸을 돌려 세웠다. 다시 끝없이 펼쳐진 길을 되돌아 갈 일만 남았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그곳으로.
[ Back to bla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