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Walk


이제는 나를 떠나보내려는 청춘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아를레지엔느 씀

 

 

 우리들의 침실에는 더 이상 열대어가 헤엄치지 않는다. 우리의 이름을 붙여 키우던 코리도라스 두 마리는 죽은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방치되다 결국 하수구 구멍에 버려졌고, 그 덕에 쓸모가 없어져 버린 어항은 베란다 구석의 창고에 처박혀 잊혀진지 오래이며, 원래 어항이 놓여 있었던 자리에는 지난 고지서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 있다.

 

 열대어가 죽기 한참 전에 사랑은 죽었다. 사랑, 이제는 입에 담기에는 우스워져 버린 단어.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사랑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시간에게 먹혀 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그저 삐걱대는 무대 위에서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느릿느릿 제자리걸음을 걷는 시늉을 한다. 이 짓도 이제 한 달이 지나면 벌써 일 년이나 된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 지지부진한 질문에 오늘은 또 다른 답을 찾아본다.

 

 핸드폰을 열자 따가운 빛이 쏟아진다. 액정을 채우고 있는 그 지겨운 숫자들을 확인하고 소파 위로 핸드폰을 던지듯 놓는다. 자정을 넘긴 귀가 시간도 이제 놀랍지 않다.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통 없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오늘은 몇 시에 들어오는지 보자. 괜한 오기에 나는 불 꺼진 거실을 지키고 앉아 채형원을 기다린다. 내 하루 중 시곗바늘이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새벽은 마음을 삼키고 파장을 뱉는다. 그래서 모든 소리들이 밀물처럼 천천히 밀려와 텅 빈 마음속에 겹겹이 쌓인다. 먼 곳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 바람이 창을 긁어대는 소리.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누군가의 발소리 같은 것들. 버릇처럼 나는 또 시간을 확인한다. 48이었던 숫자가 49로 바뀐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채형원의 발소리가 울린다. 소리만 듣고도 아는 내 자신이 싫다.

 

 우리는 아직도 도어락이 아닌 열쇠를 사용한다. 질질 끌던 발소리가 현관문 밖에서 멈춘 후 열쇠 꽂는 소리가 들렸을 때 쇼파에서 일어났다. 끼익, 낡은 현관문이 열린다. 나는 현관이 바로 보이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다.

 

 

 “…일찍 왔네.”

 

 “…….”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비꼬는 나를 채형원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때마침 현관 센서 등도 고장 나서 온통 어두컴컴하지만 그건 보인다. 왔어? 늦었죠. 미안. 형 먼저 자라니까. 너 없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자. 이런 낯간지러운 인사들은 이제 당연히 오가지 않는다. 언제 이런 적이 있었나 싶다.

 

 채형원은 신발장 위에 열쇠를 던져놓고 신발을 벗는다. 그 굽은 등을 나는 가만히 본다. 채형원에게는 겨울 냄새가 난다. 나는 갑작스레 한기를 느낀다. 창문도 하나 열지 않은 실내에서 돌연 바람이 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추워. 몸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춥다.

 

 

 “…….”

 

 “…….”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서로 다른 언어로 악다구니만 치고 있는 것 마냥 우리는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소통이랄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졌다.

 

 

 “핸드폰은 왜 들고 다녀?”

 

 “…….”

 

 

 오늘도 내 입 밖으로 나가는 말들은 다 이따위 것들뿐이다. 채형원은 내 쪽을 힐끗 보는 것 같더니 말없이 나를 지나친다. 미미한 술 냄새. 이제는 체취처럼 녹아든 술 냄새도 익숙하다. 채형원은 검은 코트를 벗어 거실 바닥에 던져 놓고서 바로 침실로 들어간다. 나는 이렇게 아무 데나 옷을 벗어놓는 걸 싫어한다. 채형원도 물론 그것을 안다. 하지만 이제 이 버릇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나도 이런 일로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침실로 따라 들어갔더니 채형원은 씻지도 않고 침대 한 가운데에 드러누워 있다. 한쪽 손등을 눈가에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 많이 지쳐 보인다. 무슨 일 있었어? 저녁은 먹었어? 예전이었다면 옆에 누워서 이것저것 물어봤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야, 채형원.”

 

 

 어두운 방에 채형원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린다.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가슴팍을 보다가 셔츠를 쥐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건 알고 있니, 어차피 우리와 상관도 없겠지만.

 

 

 “옷 벗고 자, 불편하잖아.”

 

 “…….”

 

 “옷이라도 벗고 자라니까?”

 

 

 기어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채형원은 대꾸도 귀찮은지 벽을 보고 돌아눕는다. 손 안에 잡혔던 셔츠 자락이 미련도 없이 빠져나간다. 벽처럼 솟은 채형원의 등을 황망히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목 안에서 울컥 울컥 뭔가가 차오른다. 맞닿기도 전에 어긋나버리는 시선과 벽으로 가로막힌 대화.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려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관계. 그래, 이런 거 이딴 거 진저리 날 정도로 익숙해. 그런데 이렇게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돼. 이럴 때는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제발 대답 좀 해줘.

 

 그새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채형원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천천히 침대로 올라가 채형원 옆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는다. 우리는 또 이렇게 하루만큼 바닥으로 침전한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건 연극이다. 우리는 지금 재미없는 연극을 하고 있다. 관객도 없는 무대 위에 서서 앵무새처럼 늘 같은 대사만을 읊어대는 공연을 한다. 채형원은 벙어리 A의 역을, 나는 신경질적인 사람 B 역을 맡았다. 연극의 제목은 ‘누가 먼저 떨어져 나갈까?’ 정도가 되려나.

 

 이게 사랑일까, 형원아. 우리가 지금 하는 이것도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그 사랑이라는 걸까. 벙어리 역을 맡은 채형원은 또 대답이 없다.

 

 

 

 

 

 팔을 뻗으면 휑한 빈자리만 잡힌다. 그리고 알면서도 괜히 한번 쓸어본다. 손바닥 아래에서 시트가 천천히 식어간다.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들이쉬면 채형원의 냄새가 난다. 그 얄팍한 흔적이라도 더 맡아보려고 이불에 얼굴을 묻는다. 따뜻하고도 그리운 냄새.

 

 협탁에 놓인 액자는 오늘도 엎어져 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불을 껴안은 채 손만 뻗어 액자를 다시 바로 세워 놓는다. 액자 속에는 몇 년 전의 채형원과 내가 그 안에서 웃고 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찬란하던 때가 있었는데. 눈만 마주치면 웃고 껴안고 뽀뽀를 해대던 그런 날들이.

 

 바닥에는 채형원이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허물 같은 옷가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모두 주워다 잘 개어 놓았다. 집 안이 너무 조용하다. 채형원이 현관문을 나서고 나면 우리의 집은 어두운 심해가 된다. 빛도 소리도 가라앉은 이곳에서 나 혼자면 물과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정처 없이 부유하고 만다. 더 이상 우리가 될 수 없는 우리들의 집. 커튼 사이로 아침볕이 들어온다. 비스듬히 잘린 빛이 허공에 빗금을 만든다. 작은 먼지들이 그 속을 천천히 헤엄쳐 다니고 있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물고기 떼처럼 순식간에 흩어진다.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일을 끝내지 못했고 장도 봐야 한다. 빨래도 잔뜩 밀렸으니 나가기 전에 세탁기를 돌려놓고 가야겠다. 사랑 따위야 죽든 말든 생활은 이렇게 아무런 감흥 없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침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다. 아침 기온이 갈수록 낮아진다. 겨울도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 작년 이맘때 즈음에 채형원과 나는 겨울 바다에 갈 계획을 세웠었다. 둘 다 정신없이 일에만 치여 살다가 간만에 가게 된 여행이어서, 잔뜩 들 떠 있었다. 잡아둔 날짜는 1월 초였는데 아침에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고, 근처의 스키장으로 옮겨 삼박 사일을 묵는 것으로 계획을 짜놓고는 몇 주 전부터 기차표와 숙소를 예약해놓고 짐도 다 꾸리고 했는데, 결국에는 가지 못했었다.

 

 작은 평수의 아파트라 침실에서 몇 걸음만 더 보태면 바로 부엌이다. 보리차를 꺼내 마시러 냉장고 쪽으로 가려다 문득 식탁 앞에서 멈춰 섰다.

 

 

 “…….”

 

 

 시간은 사랑도 모자라 면역력까지 먹어 치웠다. 그래서 이렇게 매번 동요한다. 기약 없는 기대를 또 해버리고 만다. 네가 아직 나를 사랑씩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또, 지겹게도. 식탁에는 내 몫의 아침밥이 차려져 있다. 내 자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릇들. 일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마른 웃음이 샌다. 사실은 울기 싫어서 웃는 거다.

 

 

 

 

 

 담당자에게 확인 전화가 올 때가 되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일에 몰두했다. 이번 해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출판사로 취직을 하긴 했지만, 경력만 쌓고 때려치웠다. 당시 새끼번역가였던 나한테는 주로 만화나 라이트노벨 종류가 자주 들어왔는데 속도가 생명인 작업이라 나랑은 영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게임 번역과 논문 번역을 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거의 반 백수나 다름없어서 생활비 대부분을 채형원이 부담했었다. 채형원은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기울어진 관계 같은 건 죽어도 싫어서 한동안 식당에서 알바를 했었다. 채형원도 내 성격을 알아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다. 그래도 지금은 자리가 꽤 잡혀서 밥값은 하고 있다. 

 

 채형원은 그때 누구라도 부러워할 회사의 대리였는데, 올 초에 돌연 때려치웠다.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던 일이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다는 말이 더 맞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것도 아마도 그 즈음 부터이다.

 

 

 

 

 

 옷장을 열었더니 네모난 종이 같은 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중 하나를 주워들었다. 꽤 오래된 사진과 편지들이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모두 모아 차곡차곡 정리했다. 언제 찍었는지 언제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진을 하나씩 하나씩 넘겨보다 어느 한 장에서 멈췄다. 내 고등학교 졸업 사진.

 

 권태기 라는 게 우리에겐 없을 줄 알았다.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채형원과 함께 만들어온 시간들이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를 거라고. 어쩌면 그래서 더 인정하기가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관계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관망하고 있으면서도 아니라고, 아닐 거리고 바보같이 모르는 척만 하고 있는지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두 얼굴이 많이도 앳되다. 밀가루를 뒤집어쓰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둘 다 함빡 웃고 있다. 이때는 그냥 같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다. 사귀게 된 건 채형원이 대학을 들어오고 나서 부터이다. 학년은 달랐어도 나름대로 징글징글하게 붙어 다니던 우리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 하면서 잠깐 헤어졌었지만, 채형원이 1년 후에 나를 따라 같은 대학을 진학함으로서 다시 연을 맺게 됐다. 우리는 그때 각자 따로따로 자취를 했었는데, 특히 채형원이 내 자취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밤새 비가 내렸던 날로 기억한다. 채형원은 당시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내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쫄딱 젖어 덜덜 떨면서 채형원은 고백이라 치기엔 낭만도 없고 다소 이상하기까지 한 말을 뱉었다.

 

 

 ‘여자를 만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거든. 미친 거 알아. 아는데, 그냥… 계속 미쳐 있으려고요……. 형도 나랑, 같이 미칠래요?’

 

 

 우리는 그날 내 좁은 반지하 자취방에서 미친 듯이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몸을 만지며 한참을 뒹굴다가 지칠 대로 지친 후에야 뒤엉켜 잠이 들었다. 비가 세차게 내려서 천장이 다 울리는 것 같았던, 아직도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해 여름밤. 그때는 채형원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다. 그 어떤 일도 모두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정말로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웃고 있는 두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손등으로 눈가를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았다. 사진과 편지 뭉치를 다시 옷장 구석에 넣어두려 흐트러진 옷가지들을 치웠다. 그리고 그걸 봤다. 채형원이 언제나 옷장 깊숙이 숨겨놓는 하얗고 둥근 플라스틱 약통.

 

 

 “…….”

 

 

 손이 굳는다. 사진 뭉치와 약통을 대충 구석에 쑤셔 박아놓고 옷장을 닫아 버렸다.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은 모두 들뜬 얼굴을 하고 있다. 뭐가 저렇게 신날까. 한 살 더 먹는 게 그렇게 좋은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관중을 카메라가 연신 훑어댄다. 저 종소리가 뭐라고 저걸 들으러 저기까지 가는 걸까.

 

 작년 새해 첫날에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제야의 종을 봤었는데, 채형원은 그때 내 옆에서 귤을 까먹으며 형, 우리도 내년에 저기 갈까? 라고 했다. 추워 죽겠는데 저길 왜 가니.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귀찮다는 듯 말했었다. 우리도 내년에 저기 갈까, 그 물음에 그러자고 대답했다면 우리는 지금 저기에 있었을까. 저 사람들처럼 잔뜩 들떠서 추위도 잊고서 웃고 있었을까. 적어도 혼자 청승맞게 쇼파에 앉아 너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지도 모르지.

 

 철컥.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 나는 잠에서 깨듯 현실로 돌아온다. 잔뜩 보풀이 인 담요나 귤껍질 같은 게 돌아다니지 않는, 그저 텅 빈 거실. 나는 얼른 텔레비전을 끄고 현관으로 간다. 문이 열리고 채형원이 찬바람을 묻힌 채 비적거리며 들어온다. 이윽고 쾅, 닫히는 문.

 

 

 “…….”

 

 

 술 냄새보다 더 신경을 긁는 향수 냄새. 이번이 몇 번째더라. 그 여자는 똑같은 향수를 쟁여놓고 쓰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왜 들어왔어?”

 

 “…….”

 

 “그냥 밖에서 새해 아침까지 쇠고 오지.”

 

 

 현관을 가로막고 빈정대고 있으니 채형원은 기운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푹 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런 것 같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 내가 그저 귀찮겠지. 그럼 증거를 없애고 들어오던가. 아니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한 마디 하던가. 내가 뭐라고 하든 말든 채형원은 오늘도 그저 고고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다.

 

 내가 더 뭐라 입을 떼기 전에 채형원은 나를 지나쳐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욕실 불이 켜지자 까만 거실에 노란빛이 길게 깔린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옷들이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욕실 문이 닫힌다. 동시에 노란빛도 가늘하게 접혀 사라진다. 오늘은 새해 첫날인데. 그냥 똑같은 하루의 연장일 뿐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새해 첫날부터 달고 들어오는 게 여자 향수 냄새라니.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병신이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집안을 먹먹하게 채우던 물소리가 뚝 끊긴다. 이내 채형원이 맨 몸으로 침실에 들어선다.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았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방안에 번져 채형원의 몸을 비춘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채형원은 태평하게 서랍장으로 가 속옷을 꺼내 입는다. 나는 여기서 또 싫은 소리를 해야 하나. 그 여자랑 좋았냐는 둥, 이럴 거면 그냥 다 집어치우라는 둥하면서 의부증에도 걸린 것처럼 몰아 붙어야 하나.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 여기서 더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하겠지. 여기보다 더 바닥이라는 게 있기나 하면.

 

 채형원은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는 침대로 걸어와 쓰러지듯 엎어진다. 매트리스가 몇 번 흔들리다 잠잠해진다. 채형원은 뒤척거리며 편한 자세를 잡는다. 맨 등에 물기도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이러고 자면 분명히 감기 걸릴 텐데.

 

 

 “머리 말리고 자야지….”

 

 

 날 선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 화를 내야 할 이유를 잊었다. 왔으니까 됐다. 밖에서 무슨 일을 했든 다시 집으로 왔으니까. 그걸로 됐다. 젖은 머리칼을 살살 매만지다 고르게 들썩이는 등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전보다 더 말랐다. 비죽하게 드러나는 그 굴곡이 서글퍼 나는 오래도록 손을 떼지 못했다. 손바닥 아래에 맞닿은 채형원의 날개 뼈가 두근두근 숨을 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커튼이 모두 열려있는 모양인지 감은 눈으로 아침볕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버릇처럼 이불을 끌어안고 뒹굴거리다가 찬찬히 눈을 떴다. 늘 그렇듯 엎어져 있는 액자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세워 놓고 일어선다. 오늘은 채형원이 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다. 채형원은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다. 어제 입고 잤던 회색 추리닝 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아침밥을 만든다. 침실문과 부엌은 마주 보고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나는 요리하는 채형원의 뒷모습을 좋아한다. 아직도, 변함없이. 오늘 아침은 된장국인가보다. 냄새가 그렇다. 채형원은 수저를 들어 간을 한번 보더니 가스레인지의 불을 조금 줄인다. 도마 위에는 큼지막하게 썰린 두부가 놓여 있다. 채형원은 언제나 정해진 순서 없이 요리를 한다. 오늘은 두부가 제일 마지막으로 된장국에 들어갈 모양인 듯하다. 

 

 지금 가서 채형원을 껴안고 잘 잤냐고 물으면 어떻게 될까. 너는 지나간 어느 날처럼 내게 웃어줄까. 아니면 귀찮다고 떨어지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려나. 무뎌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아직 못 견디겠다. 그래서 나는 그 등을 껴안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고 그냥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이것이 졸렬한 방어수단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세면대 위를 굴러다니는 채형원의 빨간 칫솔을 플라스틱 컵에 도로 꽂아 놓고서는 내 파란 칫솔을 꺼냈다. 그리고 기껏 채형원이 끝부터 짜놓은 치약을 중간부터 누르다 잠시 멈칫했다. 내가 싫어하는 채형원의 버릇이 옷을 아무 데나 널브러트리는 것이라면 채형원이 싫어하는 내 버릇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식탁에 앉으니 채형원이 밥을 퍼와 내 앞에 놓고 자기도 자리에 앉는다. 간만에 마주 앉은 아침 식탁이다. 채형원이 잠이 많아 아침밥은 늘상 내가 하는 것이 일상화였었는데 요근래에는 완전 정반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일어나기 싫어하는 채형원을 내가 억지로 들어다 식탁 의자에 앉히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채형원은 내가 깨우지 않아도 나보다도 일찍 깬다.

 

 

 “오늘 상담하러 가는 날이지?”

 

 “…….”

 

 

 채형원은 몇 달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보다 못한 민혁이가 억지로 끌고 가서 등록을 해버렸다. 처음에 채형원은 그런 치료에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알아서 잘 간다. 확실히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나아지긴 했다.

 

 

 “같이 가자.”

 

 

 내 말에 채형원은 그저 된장국만 천천히 휘젓는다. 나도 별다른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수저를 든다.

 

 

 

 

 

 

 대기실은 안락하게 꾸며져 있다. 심리 치료를 위한 병원답게 방문객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채광이 잘 되는 구조라서 햇볕이 가득 차 있다. 채형원이 상담 치료를 하는 동안 나는 오늘처럼 대기실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가끔은 같이 들어가 구석에 앉아 있기도 한다. 치료라고 해서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담당 의사와 삼십 분간 이야기를 나누는 거다.

 

 창가 쪽 쇼파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쪼르르 다가온다. 작은 혀를 내밀고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게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니 내 손등을 핥아댄다. 그러다 제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름을 부르자 다시 그쪽으로 뛰어간다.

 

 슬슬 상담이 끝날 시간이다.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대기실을 나왔다. 복도 끝에는 채형원이 걸어오고 있다. 요즘 복용하는 약의 종류가 점점 많이 지는 것 같기도 한데 물어봐도 채형원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채형원이 내 옆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란히 걷는다. 채형원은 진단서를 구기듯이 접어 주머니에 욱여넣는다.

 

 

 

 

 

 

 낯익은 복도. 왼쪽에는 창문이, 오른쪽에는 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제일 끝 문을 열면 동아리방이 나온다. 복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몸을 포박하고 어깨를 꽉 깨문다. 나는 안 봐도 누군지 알고 있다는 듯 귀찮은 기색으로 몸을 비틀어댄다. 채형원은 그래도 놔주지 않고 나를 더 꽉 끌어안는다. 형 샴푸 냄새 좋다. 채형원의 큼지막한 손에 내 머리칼이 헝클어진다. 그러면 나도 같이 채형원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는다. 채형원은 머리가 삐죽삐죽 엉망이 된 채로 웃어버린다. 채형원이 그렇게 웃어버리면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다. 온통 햇빛이다.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빛에 물들어 반짝거린다.

 

 이건 꿈이다. 알고 있다. 이건 그저 우리의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투닥거리기도 하고 미친 듯이 웃기도 했던, 그것을 아는데, 아니까…. 눈을 뜨기가 싫다. 그냥 계속 이렇게 여기에 있고 싶다. 하지만 끌어안을수록 손 안에 잡히던 감촉이 점점 사라져만 간다. 꿈이 나를 자꾸 밀어낸다.

 눈을 떴을 땐 울고 있었다.

 새벽, 푸른 빛. 아침이 가까운 모양이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베개가 축축하다.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 돌아누웠다. 자고 있는 채형원이 보인다. 세밀한 붓으로 정성 들여 그려놓은 듯, 그림 같은 굴곡을 가진 옆얼굴. 손을 뻗어 만져보려다 그냥 다시 거두었다.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겠다. 딱 두 뼘, 이 거리가 너무 멀다.

 

 

 

 

 

 몇 개월 전부터 채형원이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와인 바는 낮에는 카페를 겸업한다. 분위기가 좋아서 잡지에도 몇 번 실리고 영화 촬영도 했던 곳이다. 우리랑 같은 대학 후배였던 창균이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사정을 알고 자리를 내줬다. 채형원은 여기에서 일주일에 이틀을 제외하고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한다.

 

 근처에 나왔다가 채형원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가게로 갔다. 창균이가 없는 날이라 올라가 보진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얼마 안 가 채형원이 나온다. 난간에 기대앉아 일어서서 채형원을 바라봤다. 채형원은 인사 대신 담배 하나를 피워 문다. 담배 연기가 까만 밤하늘에 퍼진다. 오늘은 별도 하나 없다.

 

 가게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길로 10분 정도 느긋히 걷다 보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 시간에는 사람도 얼마 없어서 버스가 한산하다. 직업상 술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채형원은 늘 버스를 이용한다. 채형원이 직접 운전을 하지 않게 된 것도 꽤 오래됐다. 가지고 있던 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여태 썩고 있다. 일 년 가까이 사용하지 않은 엔진은 아마 지금 다 녹슬었을 테지.

 

 한 걸음 앞에서 걷는 채형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형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고 있다. 머리가 그새 많이 길어 뒷목을 거의 덮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맨 목이 드러난다. 내일은 목도리를 챙겨줘야겠다.

 

 한 발짝 다가서서 채형원과 걸음걸이를 맞췄다. 빨갛게 든 손을 잡으려는데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섬뜩한 기시감. 반사적으로 뒤돌아봤다. 꺾여 들어간 골목에서 갑자기 차가 튀어나온다. 넓지도 않은 길인데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고 있다.

 

 

 “형원아, 차.”

 

 

 채형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계속 앞만 보고 걷는다. 차가 점점 가까워진다. 부딪힐 거 같다. 차 지금 오잖아, 피하라고. 나도 모르게 채형원을 잡고 안쪽으로 밀었다. 그랬던 것 같다. 채형원은 중심을 잡으려 비틀대다 발이 꼬여 쓰러졌다. 차는 우리와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휑 지나갔다. 그렇게 가까이 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아, 씨발….”

 

 

 채형원은 멍하니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는다. 나 때문에 바닥에 뒤엉켜 누운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누구 하나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 채형원이 숨을 쉴 때마다 나에게 그 진동이 전해져 온다. 마주 닿은 심장. 나는 채형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있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라서 심장이 아프도록 뛴다. 혹여 채형원이 알아채기라도 할까 봐 나는 괜히 모난 소리를 한다.

 

 

 “…주위 좀 잘 살펴보고 다녀라.”

 

 

 또 사고 나는 줄 알았잖아. 그 말은 삼켰다. 채형원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아파트 단지에서 십 분 정도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있고 거기서 오 분을 더 걸으면 대형 마트가 있다. 그 거리는 역세권답게 상점들이 밀집된 곳이라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거기에는 가끔 귀신 할머니도 나타난다.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두 그 할머니를 귀신 할머니라 부른다. 인디언같이 길게 땋은 백발 머리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주로 비가 오가 전이나 후에 모습을 드러내는 할머니인데 귀신을 본다고 한다. 나도 한번 그 할머니가 허공에 대고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할 때가 훨씬 더 많아서 그냥 이 주변 학생들이 재미 삼아 만들어낸 소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일을 하다 장도 보고 머리도 식힐 겸 마트로 걸어가고 있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더니 옷을 껴입어도 한기가 뼛속으로 스몄다. 목도리를 거의 코까지 올리고서 잔뜩 움츠리고 지하철 광장을 가로질러 지나던 중 그 귀신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는 어느 짧은 치마를 입는 여자를 향해 무어라 중얼중얼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 할머니를 피해서 길을 빙 둘러간다. 할머니는 멀어지는 여자를 보면서 또 뭐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 쪽에서 걸어오는 나를 봤다.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할머니가 대뜸 소리친다.

 

 

 “네 놈이 잡아먹는 기라!”

 

 

 행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된다. 하지만 이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각자의 길을 간다. 당황해서 잠시 멍청하게 서 있던 나도 다시 걸음을 뗐다. 뭔가 괜히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빠르게 걸었던 것도 같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 할머니의 말이 이명처럼 들렸다.

 

 

 

 

 

 

 잠결에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야, 너 왜 이래….”

 

 

 퍼뜩 몸을 일으켜 채형원을 살폈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 벌써 식은땀이 한 가득이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내고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줬다.

 

 가만있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는 몸을 끌어안았다. 채형원의 감은 눈으로 자꾸 눈물이 새어 나온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새 길을 만든다. 채형원은 흐느낌도 없이 운다. 꿈에서 조차 채형원은 마음 놓고 울지 못한다.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것을 안다. 무너져 가는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채형원을 미워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래.

 

 흠뻑 젖은 속눈썹 위에 입을 맞추고 눈물을 핥았다. 채형원이 내 쪽으로 몸을 틀며 나를 안아온다. 허리를 감아 당기는 팔에 우리의 몸은 더 밀착된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채형원을 품 안으로 바짝 당기자 내가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자세가 됐다. 채형원은 내 품 안에서 아기처럼 웅크리고 조금씩 잠잠해진다. 나는 채형원의 숨소리가 다시 가라앉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채형원은 가끔 악몽을 꾼다.

 

 

 

 

 

 

 채형원은 오후가 저물어 가도록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늘은 상담 치료도 빼먹었다. 몇 번씩이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는 소리가 났는데 통화를 하는 건 못 들었다. 서재에 틀어박혀 있다 잠깐 나와 침실을 슬쩍 봤을 때 핸드폰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채형원은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밥 먹자고 불러도 대답이 없다. 억지로라도 일으켜서 식탁에 앉히면 되겠지만 나는 또 그러지는 못한다. 식탁 위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음식들을 그저 무기력하게 관망하고 있는데, 문득 귀신 할머니의 말이 또 귓가에 맴돈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던 발소리가 현관 앞에서 멈춰 선다. 네 시 오십 분. 신기록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외박을 하지.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두고 현관 앞에 섰다. 철컥, 걸쇠가 풀리고 문이 열린다. 좁은 문틈을 뚫고 술 냄새가 먼저 들어와 시비를 건다.

 

 

 “채형원.”

 

 “…….”

 

 “그렇게 아무렇게나 몸 굴리지 말고 그냥 선이나 봐.”

 

 “…….”

 

 “집에서 붙여주는 여자 많잖아. 아무나 잡아서 결혼해, 그냥. 뭐 하러 나랑 살아.”

 

 

 얼굴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대는 나를 채형원이 멀거니 응시한다. 아니, 정확히는 내 뒤쪽 어딘가를. 빗나가는 시선 따위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채형원은 느릿하게 문을 열고 마른세수를 한번 한다. 손가락 틈새로 번지는 한숨이 길다. 지겹니, 이런 내가. 지겹겠지. 나도 내 자신이 지겨운데. 지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채형원도 나도 그걸 안다. 알면서도 이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한다. 끝이 너무 멀다. 이미 끝나버린 우리는 다시 굶주린 짐승처럼 끝을 찾아 배회하기만 한다.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를 내면서. 놓지 못하는 건 어느 쪽일까.

 

 채형원은 신발을 벗으려다 중심을 잃고서 신발장에 기대선다. 주량을 훌쩍 넘긴 기색이다. 얼마나 마셔 댄 거야. 어쩔 수 없이 부축이라도 해주려 손을 뻗는데 채형원이 갑자기 쓰러지듯 몸을 수그린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어 상체를 지탱한 채형원은 몇 번이고 숨을 몰아 쉬어댄다.

 

 

 “야.”

 

 “…….”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숨들이 내 가슴속에도 떨어져 검은 구멍을 만든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내 몸을 조각조각 낸다.

 

 

 “너 울어?”

 

 

 어깨가 떨리고 있다. 내뱉는 숨소리에는 자꾸 물기가 섞인다. 소리만 들어도 안다. 채형원은 지금 울고 있다. 차라리 이대로 내 몸이 부서졌으면 좋으련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채형원의 등이 들썩들썩 크게 일렁인다. 툭툭 떨어지는 채형원의 눈물. 닦아주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위로조차 해줄 수 없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그럼 어떡해. 그냥 이렇게 보고만 있어? 채형원이 우는데. 그냥 그걸 보고만 있으라고? 어떻게 그래, 내가.

 

 채형원은 울음 섞인 한숨을 뱉으면서 무어라 낮게 중얼거린다. 못 들었어. 뭐라고 그런 거야, 응? 기어이 참지 못하고 손을 뻗는데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채형원이 상체를 확 일으킨다. 예상대로 흠뻑 젖어있는 얼굴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아버리더니 신발도 벗지 않는 채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나를 스쳐 지나가 침실 문을 확 열어젖히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어 얼른 뒤따라갔다. 채형원은 옷장을 열고 무언가를 찾고 있다. 이윽고 채형원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익숙한 하얀 통.

 

 

 “안 돼…. 너 그거 내려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온몸이 뻣뻣하다. 채형원은 주저 없이 약통의 뚜껑을 돌린다. 그제야 나는 약통을 뺏으려 발악한다. 채형원의 옷을 닥치는 대로 움켜쥐고 끌어당기고 흔들어 댔지만, 채형원은 너무도 쉽게 뿌리치고 뚜껑을 열어 아무 데나 내던진다. 바닥에 떨어져 빙그르르 원을 그리다 어딘가에 툭 부딪혀 멈추는 하얀 뚜껑. 채형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제부터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를 눈물이 눈 앞을 가린다.

 

 채형원은 낮게 흐느끼며 울음을 삼키다 다시 몸을 비튼다. 떨어지지 않으려 깍지를 꼈다. 지금 내가 두 팔로 끌어안고 있는 건 분명 채형원인데 그저 공기를 안고 있는 것 마냥 휑하다. 잡고 있어도 잡은 것 같지가 않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 정도로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던 때가 또 있었나.

 

 

 “싫어 이제….”

 

 “내가 잘못했어. 어? 그러니까…. 제발 저런 거 안 먹으면 안 될까? 어?”

 

 

 우리의 성대를 긁고 나오는 목소리가 괴기스럽게 뒤섞인다. 아직도 끈질기게 쥐고 있는 약통을 뺏으러 악착같이 손을 뻗었다.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몸부림을 치는데 채형원이 불시에 몸을 확 돌려 뺀다. 나는 그 반동으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혀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약통도 바닥에 떨어진다. 하얀 알약들이 순식간에 촤르르 흩어진다. 채형원은 바닥을 뒤덮은 알약들이 황망히 쳐다보다가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내던지며 악을 지르기 시작한다. 거울이 깨지고, 의자가 부서지고, 스탠드가 옷장 문에 부딪혀 떨어지고, 벽걸이 시계가 떨어지고… 우리들의 침실이 무너져 간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물 먹은 종잇장처럼 몸이 무겁기만 하다. 채형원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심장을 찢는다. 채형원은 방 안을 전부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던 채형원이 급기야 실성이라도 한 듯 웃는다. 쇠붙이가 긁히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나보고 어쩌라고, 대체….”

 

 “…….”

 

 “왜 이딴 것도 하나 내 맘대로 못하게 해, 왜!!”

 

 

 쥐어짜듯 채형원은 그 말을 꾸역꾸역 어렵게도 뱉어내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가늠할 수 없는 소리를 낸다. 나는 그런 채형원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방구석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스탠드는 어디가 잘못된 건지 자꾸 깜박거리며 빛을 토했다 삼킨다. 그럴 때마다 채형원의 얼굴도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눈. 차라리 안 보였으면 덜 아팠을까. 깨진 거울 조각을 주워 내 눈을 찌르면 이것보다 덜 아플까.

 

 채형원은 무표정을 하고 어느 한 곳을 노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봤다. 협탁 밑에 떨어져 있는, 깨진 액자. 채형원은 그걸 조금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가 한 발짝 다가선다. 안 돼. 채형원보다 먼저 엉금엉금 기어가 액자를 집으려 하는데 자꾸만 손이 엇나가기만 한다. 신경이 모두 절단된 것 마냥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액자를 집는 건 포기하고 아예 그냥 그 위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그만해, 제발….”

 

 

 이렇게 부서지고 깨지고 망가지려고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니었잖아.

 

 

 “현우 형….”

 

 “…….”

 

 “손현우….”

 

 

 채형원은 억지로 쥐어짠 목소리로 넋 나간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른다. 채형원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얼마 만이었더라.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 나는 대답 대신 그냥 더더욱 바짝 액자 위에 엎드렸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울음만을 토해내면 채형원은 제 가슴팍을 퍽퍽 아프게도 내려친다. 그렇게 토하고 토하면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끄집어낼 수 있을까. 차라리 텅 비어버리면 쉬울 것이다. 너를 견디고, 나를 견디는 게. 우리는 지금 미련이 남아서 괴롭기만 하다. 매일매일 더 깊은 바닥을 치면서 서로를 좀먹기만 하고 있다.

 

 우리가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걸까. 끝이 너무 멀다. 이 연극의 막이 내리는 날이 과연 오긴 할까.

 

 채형원은 한참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결국 뛰쳐나간다. 쾅, 문이 닫히고 채형원이 떠난 우리의 집은 다시 심해가 된다. 나는 아래로, 더 아래로 침전한다. 바닥이 아직 멀었나. 얼마나 떨어져야 나올까.

 

 

 

 

 

 

 노을빛이 방 안을 비춘다. 벌써 해가 저문다. 선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기를 몇 번, 이제는 시간 감각도 잃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 앉았다. 오래도록 딱딱한 방바닥 위에 구겨져 있었더니 온몸이 다 삐걱거린다. 방 안을 둘러본다. 부서지고 깨지고 망가진 우리들의 침실. 이제야 우리와 꼭 닮았다. 너덜너덜 해어져 버린 너와 나의 자화상. 몇 걸음 앞에 벽걸이 시계가 떨어져 있다. 시침은 어제의 시간에서 멈춰있다. 분침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튕겨 나갔는지 없다. 깨진 유리 조각을 걷어내고 하나 남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손끝에 걸린 얇은 바늘이 느릿느릿하게 역행한다.

 

 채형원이 다시 들어온 건 방안을 채우던 주홍색 빛이 점점 사라질 즈음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채형원이 방 문턱에 서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무릎을 접고 앉아 채형원의 발치만 쳐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더 수척해진 것 같다. 밤새 어디 갔다 온 거야. 날도 추운데. 그래도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다. 다시 집에 와줘서. 안 오면 어떡하나 무서웠어. 미안해 형원아. 내가 잘못했어. 너 아픈데 내가 너무 심했던 거 같다. 내뱉을 수도 없는 말들을 나는 온 마음으로 전한다.

 

 채형원은 방안 구석구석에 시선을 주다 비척비척 걸어와 깨진 액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노을빛의 잔상이 방안을 유영하고 있다. 스러지는 주홍색이 느적느적 어둠에게 먹힌다. 창밖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다. 죽어가는 노을 속의 우리 둘과 시침만 남은 시계. 채형원은 조각난 유리를 하나하나 치워낸다.

 

 

 “…손 조심해.”

 

 

 바짝 마른 입술이 기어이 찢어졌는지 살짝 따끔댄다. 채형원은 액자를 집어 들고는 오래도록 쥐고만 있다. 얼굴의 반을 가린 검은 머리칼이 한숨으로 쓸쓸히 흐트러진다.

 

 

 “미안해, 형….”

 

 

 잔뜩 상한 목소리. 채형원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스르륵 앞머리가 내려와 코 끝을 덮는다. 너 머리 좀 잘라야겠다. 잘생긴 얼굴 하나도 안 보이잖아. 채형원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나는 그 입술을 멍하니 보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놓지 못하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

 

 

 

 

 

 

 붕어빵 봉투가 점점 식어간다.

 

 

 “야 이 미친 새끼야.”

 

 “…….”

 

 “답도 없다, 너는.”

 

 “…….”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아파트 현관 앞에는 채형원과 그의 동생이 서 있다. 채형원은 그가 일갈하고 욕해도 그저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 그가 채형원에게 내뱉은 모든 말들은 전부 다 내 가슴에 와서 박힌다. 나는 죄 지은 사람처럼 주차된 차들 사이에 숨어있다.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온다. 그래도 일어설 수는 없다. 내겐 그럴 용기 따위는 없으니까.

 

 

 “엄마 생신 때는 들려라.”

 

 “…….”

 

 “안 그럼 내가 너 멱살이라도 잡고서 끌고 갈 거니까.”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서서 다시 세단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세단이 내 옆을 지날 때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품에 안고 있는 종이봉투가 잔뜩 구겨졌다. 붕어빵은 눅눅하게 식어 버린 지 오래다. 이러면 맛없는데. 다시 가서 사 올까…. 채형원은 이미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는지 없다. 울고 싶은 이유는 다리가 저려서 그런 것이다. 아니면 붕어빵이 다 식어서. 그래서 울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일을 할 때 주로 쓰는 서재는 복도 쪽으로 창문이 나 있다. 나는 그 아래에다 책상을 놨다. 여기는 끝 집이라서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이 없어서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창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밖에서 채형원이 불쑥불쑥 놀래키고는 했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한참을 틀어박혀 일을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집 전화가 울린다. 채형원이 받을 줄 알고 그냥 놔뒀더니만 벨 소리가 도통 그치질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받아야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기 앞에 채형원이 서 있다. 뒤돌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울리는 전화기를 보고 있다는 것만 알겠다. 방문을 열면 전화기가 놓은 곳이 대각선으로 보이는데,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문고리만 잡은 채 채형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전화는 결국 삑, 하고 째지는 소리를 뱉고는 부재중 통화로 넘어간다.

 

 

 - 있는 거 다 아는데 왜 안 받냐.

 

 

 민혁이 목소리다.

 

 

 - 걱정되게 핸드폰도 꺼 두고.

 

 

 저 목소리도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민혁이를 본 지도 꽤 됐다. 취직했다더니 바쁘다고 놀러 오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제 집 마냥 찾아와서 놀자고 귀찮게 굴었는데. 채형원과 내가 달싹 붙어있을 때면 늘 징그럽다느니 솔로 앞에서 염장 지르냐느니 하고 장난을 쳤었다. 그럼 우리는 여긴 우리 집이니까 불만 있는 인간이 나가라고 했었지. 이것도 다 옛날 일이다.

 

 

 - 다음 주였지?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민혁이의 목소리가 더 이어지기 전에 채형원이 전화기를 집어 던져 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전화기는 뭉툭한 파열음을 내며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어딘가 깨지기라도 했는지 바닥에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뒹군다. 채형원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조용히 서재 방 문을 닫고 책상에 도로 앉는다. 형광등이 다 된 모양인지 불이 들어오질 않아 스탠드만 켜 놨더니 눈이 따갑다.

 

 

 

 

 

 

 채형원은 요즘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졌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물이 넘쳐흐르는 줄도 모르고 식탁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양치질을 하다 칫솔을 문 채 멀거니 멈춰 있기도 하고, 어제 새벽에는 거실에 불도 안 켜놓고 한참 동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지직거리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화면을. 그래도 무슨 바람인지 퇴근 후에는 바로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술은 마시지 않는 대신에 담배가 조금 늘었다. 재떨이에 수북이 쌓여가는 담배꽁초들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침실은 말끔히 정리됐다. 망가진 것들을 다 갖다 버렸더니 어쩐지 휑한 기분이 들었다. 모서리에 금이 간 액자만 아직 버려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채형원은 샤워를 하고 나와 회색 추리닝 하나만 걸치고서 거울 앞에 서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건지 내가 들어 온 것도 모른다. 가닥가닥 뭉친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비어져 나와 곧은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침대에 걸터앉아 나지막이 안 자냐고 묻자 채형원이 머리를 한번 털어 내더니 불을 끄고 침대로 걸어와 풀썩 눕는다. 나도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잠들려는 순간 잘 자, 현우 형 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뺨에 닿는 온기에 뒤척이다 눈을 떴다.

 

 

 …뭐야?

 

 

 꿈인가, 눈 앞에 채형원이 있다. 꿈인가 봐. 네가 날 이런 눈빛으로 봐줄 리가 없는데. 천천히 손을 들어 채형원의 머리칼을 만지작댄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 묻은 머리칼들이 쓸린다.

 

 

 언제 왔어?

 

 

 입술을 가르고 버석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채형원은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매만지다 얼굴을 가까이한다. 방금. 귓가에 닿는 채형원의 목소리. 입술이 닿는다. 혀가 얽힌다. 겨울 같은 채형원을 끌어안는다. 채형원의 혀에선 달짝지근한 와인 맛이 난다. 이내 곧 채형원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목으로 옮겨진다. 살짝 깨물며 빨아들이는 감촉에 온 몸이 노곤해진다. 꿈이지? 내가 지금 꿈꾸는 거지. 그런데 너무 생생해. 내 품의 네가 너무 진짜 같아.

 

 채형원의 손길에 옷가지들이 하나 둘 벗겨진다. 나도 성급하게 채형원의 셔츠를 끌어 올린다. 단추 몇 개가 튕겨져 나간다. 우리의 맨 가슴이 맞닿고 심장이 함께 박동한다. 몸이 점점 달뜬다. 입 안으로 들어온 채형원의 손가락에 혀를 감고 잘근잘근 깨물었더니 채형원이 웃는다. 목을 올려 나오는 웃음소리. 시선이 만나고 다시 입술이 다가온다. 몸이 뜨거워. 데일 것 같아. 젖은 손가락이 좁은 길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한다. 안을 헤집어대는 감각에 몸이 붕 뜬다. 시트 위를 배회하던 내 손을 채형원이 잡아준다. 현우 형. 채형원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진다.

 

 

 왜 울어.

 

 

 자꾸만 넘쳐흐르는 눈물을 채형원이 닦아 준다.

 

 

 좋아서.

 

 

 네 눈빛, 네 손길, 네 체취. 모든 게 다. 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와. 꿈이라도 상관없어. 끌어안는다. 한 순간도 아까워. 떨어지기 싫다. 이런 닿음이 너무 그리웠어.

 

 

 울지 마요.

 

 

 간지러운 혀끝에 눈이 감긴다. 채형원의 손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열기가 피어오른다. 미칠 것 같아. 너무 뜨거워. 채형원의 허리에 내 다리가 감기고 우리는 더 밀착된다. 작은 틈도 내주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더 바짝 당겨 안는다.

 

 

 형원아.

 

 응.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요…. 형이 나한테 그 말 할까 봐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알아?

 

 

 채형원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어느새 채형원은 여름이 된다. 채형원이 움직일 때마다 여름이 번져 내 안으로 스며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숨을 뱉으며 서로의 폐로 호흡한다. 채형원의 숨은 내게로 오고 나의 숨은 채형원에게 간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우리의 심장만 살아, 벌떡벌떡 터질 듯 고동친다. 두 몸이 빈틈없이 맞물린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끝으로, 끝으로 내달린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새하얗게 타오른다.

 

 달콤한 꿈을 꾼다. 달콤해서 슬픈 꿈.

 

 

 

 

 

 

 잠에서 깼을 때는 옷이 모두 입혀져 있었다. 단추까지 제대로 채워져 있는 파자마의 소매를 죽 늘려본다. 이건 채형원의 것이다. 나는 이걸 꺼내 입은 기억이 없는데. 목을 쓸어본다. 미미하게 남은 잔열이 손 끝에 닿는다. 입 안을 헤집던 혀의 감촉과 몸을 만지던 손길. 꿈이 아니었나.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데 엉치뼈에 저릿한 통증이 온다. 꿈인 줄 알았는데.

 

 

 “어….”

 

 

 뭔가 허전하다 싶었다. 눈을 뜨고 나면 늘 하던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은 액자가 엎어져 있지 않았다. 웃고 있는 두 얼굴. 나도 따라 웃고 싶은데 자꾸 눈이 시큰거린다. 부엌에서는 무언가 끓는 소리가 난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맛있는 냄새.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구나. 문을 열면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어쩌면 아직도 꿈속인지도 모르겠다. 햇살이 너무도 반짝거려서. 네가 너무 눈부셔서. 너의 모습에 나는 언제나 전율에 가까운 사랑을 느껴. 아직도 변함없이 그래. 이것도 꿈이라면 형원아, 지금 너를 껴안고 인사를 건네도 되는 걸까. 잘 잤어? 냄새 좋다. 오늘 아침 뭐야. 그냥 이런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 다른 무엇보다 그런 게 가장 간절했어. 우리는 그런 소소한 안락이 그리워서 이렇게 아픈 거잖아.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이 가득 들어찬 부엌. 채형원은 국의 간을 맛보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한 발짝 다가선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습관처럼 되뇌던 그 질문. 그래, 사실 다 알고 있어. 그건 그저 나를 속이기 위한 주문일 뿐이었지.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너를 잡아먹고 너를 변하게 했어. 다 내 탓이야.

 

 나의 독연의 시간. 조명이 날 겨냥한다. 동그란 빛 안에 갇힌다. 조명 밖, 형체만 남은 채형원은 침묵하고 있다. 나는 관객석이 아닌 채형원을 향해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삐걱 두 손을 뻗는다. 조명 밖으로 나간 손목이 잘려 나간 듯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혼신을 다해 내 마지막 공연을 한다. 채형원에게 들리지 않을 대사를 몇 번이고 읊어댄다. 하지만 입술 밖으로 나가는 건 공기 방울 뿐이다. 여긴 물 속이었나. 언제부터인가 열대어 두 마리가 내 주변을 천천히 유영하고 있다. 죽은 코리도라스와 흩어지는 물보라.

 

 

 

 

 

 

 봄 같은 볕이 내리쬐는 겨울날이다. 상담실 안에는 커다란 창이 있어 햇빛이 가득가득 쏟아진다. 흩날리던 햇빛 부스러기들이 창틀에도, 채형원이 앉아 있는 소파에도 떨어져 반짝거린다. 상담 치료가 시작된 지도 벌써 십여 분이 흘렀다. 채형원은 한 달만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오늘은 나도 같이 상담실에 들어왔다. 실내 중앙에는 소파가 놓여있는데 상담은 이곳에서 마주 보고 얘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구석에 따로 마련된 의자에 앉아 얌전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의사는 익숙한 듯 차분하고 능숙하게 말을 이끌어낸다.

 

 

 “이제는 가족분들을 좀 만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

 

 “아직도 왕래가 없죠?”

 

 “…네.”

 

 “시간이 더 필요하신 건가요?”

 

 “……그것보다는, 볼 낯이 없다는 게 더 맞죠.”

 

 “차라리 직접 부딪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회피하기만 하면 부정적인 생각만 더 들고 실상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건데 그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형원씨는 지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평범한 생활이 가장 필요해요. 아시죠? 사람을 만나셔야 해요.”

 

 “…….”

 

 “형원씨가 일을 시작하시고 그 안의 작은 사회를 접하시면서 확실히 나아지셨어요. 형원씨도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네.”

 

 “이제는 가족들을 만날 차례예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먼저 전화 한 통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미루게 되면 더 힘들어지기만 하고 또 그런 작은 결여들이 모여서 나중에는 분명 형원씨가 본래 생활로 돌아가시는 데에 큰 장벽이 될 수가 있거든요. 이런 경우를 정말 많이 봐왔어요. 이건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일이에요.”

 

 “……네.”

 

 “지금 형원씨한테는 좋은 친구분들도 계시잖아요. 아직 형원씨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끌어올려 주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할 일이에요. 제 경험상 이런 경우가 흔치가 않아요. 가족도 돌아서는 경우를 많이 봐왔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형원씨의 경우는 가족과 친구들 모두가 형원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형원씨만 이제 한 걸음 다가서면 되는 거예요.”

 

 “…….”

 

 “형원씨가 그간 사람을 피했던 이유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지금은 형원씨가 조금은 이기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괜찮을 때예요, 지금은. 형원씨 성격에 힘든 일이라는 거 잘 알지만…. 지금은 가장 중요한 건 형원씨의 회복이잖아요. 인간관계는 사실 필요악이에요. 이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하지만 일련의 단점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버린다면 그건 더 큰 결함을 불러올 수밖에 없어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말 맞아요.”

 

 

 창가에 쪽에 놓인 의사의 책상에는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채형원에게도 보여줬었던 그림 카드가 있다. 처음 치료를 시작했을 때 채형원은 저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냐는 질문에 칼, 이라고 대답했었다. 나에게 저 그림은 엉킨 실타래로 보인다.

 

 

 “수면제 복용이 줄었다는 건 좋은 징조예요. 이럴 때일수록 약에 의존하는 건 사실 몸을 서서히 망쳐가는 길이라는 거 형원씨도 알고 계시죠?”

 

 “…네.”

 

 “두통은 아직도 심한가요?”

 

 “예전만큼은 아니고, 가끔요….”

 

 “수면은 어떤가요? 잠드는 게 아직도 두려우세요?”

 

 “……이제는 술 안 마셔도 그냥… 그럭저럭 잠들 수 있는 정도는 된 거 같아요.”

 

 “이참에 술도 줄이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렇죠?”

 

 “…그래야죠.”

 

 

 내도록 의사의 질문에 그저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던 채형원이 이제야 겨우 스스로 말문을 연다.

 

 

 “이제 악몽은 안 꿔요. 이때쯤 되면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냥 이젠 다…. 그러니까…. 아, 뭐라고 그러지….”

 

 “정리가 좀 되신 건가요?”

 

 “……정리, 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리, 채형원은 혼잣말처럼 그 단어를 한 번 더 읊조리고 파삭 웃어버린다. 이어진 긴 침묵. 의사는 채형원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솔직히 제가 유난…, 떨고 있는 거 알거든요.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게.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이해 못 한다는 것도 알고, 그냥 진짜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아는데….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은 없지만… 그러니까…. 아, 뭐라고 하는 거야….”

 

 “괜찮아요,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그러니까 정리라는 게 다 치워버리는 거잖아요. 저는 근데, 치워서 없앤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계속 안고 가려구요. 어차피 아예 없던 일처럼 지울 수도 없는 거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어찌 됐든 그건 이미 제 일부분이니까요. 그냥 계속… 다 안고 살려구요.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조금은 편해졌어요.”

 

 

 그렇게 말하고 채형원은 입술을 꽉 깨물며 어느 구석만 뚫어지라 주시한다. 그러다 갑자기 끔찍한 고통이라도 느껴지는 것 마냥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렵게, 어렵게 말을 잇는다.

 

 

 “이건 말 안 했었죠. 이제 정확히…. 일 년이 돼요.”

 

 

 불현듯 내 몸 안의 무언가가 추락한다. 왼쪽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숨을 못 쉬겠어.

 

 

 “내일이….”

 

 

 안 돼. 말하지 마.

 

 

 “그 날이에요.”

 

 

 그만해. 제발.

 

 

 “같이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가끔. 아니, 자주. 미쳤다고 하겠지만, 그냥… 알 수가 있었어요. 아직 제 옆에 있다는 게.”

 

 

 당장이라도 달려 가서 입을 막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나는 그저 여기에 앉아 채형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믿겨지지가 않아서요. 아직도 형이….”

 

 

 귀를 막는다.

 

 

 “죽었다는 게.”

 

 

 서서히 금이 간다. 햇빛이 잘려 나간 자리에 새까만 어둠이 들어찬다.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허구의 세계가 무너져 간다. 부정하고 모른 척했던 현실이 내 몸을 조각조각 깨트린다.

 

 

 “보내줘야 하는 게 맞는데, 그게 현우 형한테도 더 좋은 거니까. 아는데…. 그것도……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귀를 막아도 들린다. 그래도 나는 더 꽉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다. 발밑에 나뒹구는 허구의 편린들. 이제는 모두 부서져 깨어진, 나의 기울어진 세계.

 

 

 “너무 오래 끌고 있었나 봐요. 가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눈을 뜨면 아직도 채형원이 보인다. 살아 있는 채형원은 아득히 먼 거리에서 괴로움을 토해내고 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닿을 수도 없다. 나는 죽었으니까.

 

 

 

 

 

 

 겨울, 안개 낀 바다.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희미하다. 푸르스름한 물결 위에 흩날리는 하얀 눈발. 하나로 연결된 하늘과 바다에 눈이 내린다. 오늘은 날이 흐려 해돋이를 못볼 것 같다. 채형원은 얼어붙은 백사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본다. 나는 채형원의 곁에 앉아 가만히 채형원의 어깨에 뺨을 댄다. 여기에 같이 오기로 했었지. 일 년만에야 왔네.

 

 형원이 네 탓이 아니야. 내가 바보같이 차를 못 봤어. 갑자기 네가 표정이 굳어서 무어라 소리치며 달려오는 거 보면서도 그냥 장난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옆에 달려오던 차를 발견했을 때는, 뭐. 부딪히던 순간에 나는 외려 널 걱정했어. 눈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면 충격이 클 텐데 어떡하나 하고. 지금도 후회하는 건 너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야. 나는 왜 그때 미안하다는 말만 했을까. 마지막이라는 거 다 알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내 온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들려줄 수도 없게 되어버렸네. 처음에는 그냥, 마지막으로 본 네 얼굴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쉬이 떠날 수 없었어.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중에는 화가 나더라.

 

 그래서 나를 속이기 시작했어. 차라리 우리에게 권태기가 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했어. 네가 왜 술기운을 빌려서 잠을 청해야 했는지, 왜 말수가 적어지고 어두워졌는지, 왜 악몽을 꾸고 있는지. 사실 다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했어. 그저 지난해의 달력을 보고 이미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 살았어.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내 연극에 내 자신이 속고. 그러다 보니까 정말 내가 죽었다는 걸 까먹게 됐고.

 

 미련이 남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형원이 네 탓이 아니야. 다 내 탓이야. 내가 널 먼저 놓지 못해서…. 이제 다 끝났어. 나는 더 이상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어. 아니 있지 않을 거야. 내가 네 곁에 있으면 널 더 잡아먹을 게 분명하니까.

 

 바닷바람이 분다. 형원이의 까만 머리칼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형원이가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번진다. 코끝은 벌써 발갛게 얼었다. 형원이는 물기 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다만을 응시한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현우 형.”

 

 

 그래. 형원이 너도. 겨울 같은 형원이의 목소리에 나는 입술 끝을 올려 웃고 만다. 그리고 생전에 형원이가 내게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나는 형원이의 어깨에 뺨을 부빈다. 콧대를 타고 미끄러지는 눈물은 그냥 내버려 둔다. 고마워.

 

 

 “잘… 가요.”

 

 

 너도 잘 있어. 끼니 거르지 말고, 주량 믿고 술 너무 많이 자주 마시지 말고, 담배도 이제 조금 줄이고. 나 때문에 아프지도 말고, 이제 부모님 댁에도 찾아도 좀 가고…. 너 원래 주변에 사람들 많았잖아. 사람들도 이제 좀 만나. 아, 난 끝까지 너한텐 잔소리나 듣기 싫은 소리뿐이네. 미안.

 

 눈물이 자꾸 넘쳐 얼굴을 적신다.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닦아 내고 형원이를 바라본다. 마지막이니까. 마지막이라서, 오래도록 눈에 담아본다. 잘생긴 우리 형원이.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고 볼 때마다 놀라게 했던 우리 형원이. 사람들은 네가 차가울 거라고, 얼굴값을 할 거라고 자주 오해를 하지. 사실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마음도 엄청 여리고 눈물도 많은데 말이야.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행복해야 해. 나 때문에 잃어버렸던 생활들도 다시 찾고, 멋진 수트 입고 다시 회사도 다니고, 예쁜 여자도 만나서 결혼도 하고, 너 닮은 아기도 꼭 낳고…. 얼마나 예쁠까. 너 닮은 애기. 있지 형원아, 나한테 미안한 삼정 같은 거 갖지 않아도 돼. 나는 너랑 결혼할 여자도 좋아할 거니까.

 

 결국 형원이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 한줄기.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둔다. 형원이의 눈물을 턱 끝에 잠시 맺혔다가 툭 떨어진다. 형원아, 채형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본다. 파도가 친다. 바다가 운다. 눈 오는 바닷가의 형원이가 하얗게, 하얗게 멀어져 간다. 사라진다.

 

 

 

 

 

 

 ‘비 되게 많이 온다.’

 

 ‘그러게.’

 

 ‘우리 내일 학교 가지 말까요?’

 

 ‘너 내일 전공이잖아.’

 

 ‘그거야 민혁이한테 대출해달라고 하면 하지 뭐.’

 

 

 아직도 기억해. 비 오던 여름밤. 내 반지하 자취방. 우리는 습기 찬 방안에서 서로의 달뜬 몸을 끌어안고 밤이 새도록 얘기를 했었지. 그냥 둘이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만했던 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빗소리가 들린다. 넌 아마 모를 거야. 내가 너보다 먼저였다는 걸. 자존심이 뭐라고 나는 그걸 그렇게도 꼭꼭 숨겼을까. 사실은 형원이,

 

 

 ‘형도 나랑 같이 미칠래요?’

 

 

 네가 그 말을 해주기 훨씬 전부터 난 이미……. 우습지. 언제고 그 말을 하려면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아직도 넌 나한테 그래. 나한테 너무 죄책감 갖지 말고, 나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마.

 

 안녕.

 

 

 

 

 

 

 

 

심규선 - 이제 슬픔은 우리를 어쩌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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