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Walk


놀이터
옥순씨 씀

날짜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나는 그날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에 비친 파란 하늘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린 남자애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배경삼아 학교 구석의 벤치에 누워 시간을 죽이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시시해.”
 
내 옆에 앉아서 운동장의 친구들만 보는 형 때문에 조금 질투가 나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눈에 파란 하늘이 가득 담겨서, 형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반짝였다.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 당황스러워서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냥 모든 게 다 시시하지 않냐고. 인생이란 결국 의미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반복일 뿐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숨고 싶은 어린 내 말에, 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난 좋은데. 그냥 이런 작은 순간들도, 다 소중한 추억이니까.”
 
덤덤하게 흘러오는 목소리가 바람 같았다. 같이 노니까 더 좋지, 하고 실없이 웃으면서 물어오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바람과 함께 나를 스쳤다. 
파랗던 하늘도, 나무 그늘 사이로 내려오던 햇빛도, 공을 차며 노는 애들의 웃음소리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지고, 단 하나만 내 눈에 가득 담겼다. 사람의 인생이 변하는 순간은 그 무엇보다 빛나고 아름답다던 어떤 책의 구절처럼, 내 막연한 호감이 첫사랑이 되던 날은, 반짝이는 파란 하늘 같은 눈동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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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 위의 형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같은 동에 살면서 오다가다 마주치지만 인사는 하지 않는, 그런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우리학교 학생이 한두명도 아니고. 중학교가 같아서 좀 익숙하긴 했지만, 그냥 얼굴만 아는 그런 사람.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쳐 목발로 등교하게 된 첫날에, 형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가방을 들어줬을 때 내가 깜짝 놀랐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형이 키도 크고 덩치가 좋은 편이라, 처음엔……. 돈 뺏으려는 줄 알았다. 
 
의외로 형은 착하고 순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다른 학년의 소문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것뿐이었는지, 형이 가방을 들어줬다는 말에 친구들은 그 형이면 그럴 만하다는 반응이었다. 그 형은 무섭게 생겼는데 복도에서 부딪치면 괜찮냐고 꼭 물어봐 준다며, 친해지면 든든한 백이라고 친구 녀석들은 낄낄거렸다. 
 
아침의 배려는 한 순간의 충동적인 행동인 줄 알았는데, 형과의 등교는 그날이 처음이자 끝이 아니었다. 그 날 하교할 때에도, 그 다음날 등교할 때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형은 우리 반 앞에서, 우리 아파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우리는 내 다리가 낫고 난 뒤에도 등하굣길을 같이 걸었다. 목발없이 내려온 나를 보던 형의 동그란 눈과, 수업이 끝나고 2학년 복도 앞에서 형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했을 때 놀라 동그래진 입술이 재밌어서, 나는 매일 형을 기다렸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켜본 형은 항상 덤덤한 표정에 알기 쉬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 같아서 가까이 다가가 보면 구름이 개구리 모양이라며 웃고 있거나, 발치에 다가온 길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슬쩍 쓰다듬거나. 
투박한 손길에는 의외의 세심한 배려가 숨어있었고, 크게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을 하는 일도 본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내 첫인상 그대로였던 것은 다양한 간식이 끝도 없이 나오는 형의 가방이었다. 
하루는 등교길에 형이 주는 간식을 몇 개 받아먹다가 배불러서 거절했더니, 다음날부터 형은 딱 한 개만 나눠주고는 더 먹어보라는 말이 없었다. 그 후로도 며칠이나 간식을 딱 한 개만 주는 형이 어이없고 웃겨서 조금 섭섭하다고 했더니, 거절당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과자를 한 움큼 쥐어 주는 형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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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반짝이는 내 첫사랑이 시작된 여름이 끝나고, 방학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던 형은 2학기가 시작되던 날, 구릿빛 피부와 더 넓어진 어깨를 자랑하며 웃었다. 
본격적으로 체대입시 준비를 시작할 거라는 형의 말에, 나는 조금 질투가 났던 것 같다. 겨우 한 학년 차이일 뿐인데, 형은 왜 항상 더 어른스러운지. 나는 아직도 이런저런 생각만 하며 방황하고 있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을 준비해가는 형의 담담한 모습이 멋있고 그런 형이 좋으면서도, 괜히 형의 옆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서러웠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사실 형이 다니는 체육관 옆에 있는 학원으로 일부러 옮긴 것이었지만-만난 형이랑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네를 타다가, 공부를 잘하는 내가 부럽다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형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 해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제 2학년으로 올라가는데, 빨리 진로를 정해야 하는데, 이런 부담감에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일까. 입시 준비에 딱히 어려운 일은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형의 덤덤한 말투가 짜증이 나서,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형처럼 모든 게 쉽지 않다고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쉽지는 않지, 나도. 근데 어차피 걱정해 봤자 내가 답을 알 수 없는 일이면, 그냥 하는거야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나와 눈을 맞추고 또박또박 자신이 고민한 답을 말하는 형의 머리 위로, 보름달이 환하게 빛났다. 아니, 오히려 달보다 형의 눈이 더 반짝였던가. 그건 달빛이었을까, 내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까? 
오늘도 빛나는 사람에게 동경과 사랑과 갈망을 느끼며, 삐쭉 나온 입술로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네자 귀여우니까 한번만 봐준다며 형은 내 머리를 헝클었다. 
잘하는 걸, 열심히.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작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차며 조용히 중얼거리자, 옆에서 형이 말했다. 그래, 잘하는 걸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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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3학년에 올라가고 나서는 예전처럼 매일 형을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학교나 집 근처에서 형을 마주치면 그 날은 꼭 일기를 썼다. 형은 여전히 곧고 담담한 사람이었고, 나는 몸도 마음도 조금 더 큰 덕분에 이전보다는 쉽게 내 마음을 감출 수 있게 된 어린아이였다. 매번 내 일기장은 나에 대한 고민과 우울, 형에 대한 동경과 질투로 어지러웠다. 
독서실에서 자습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형이 지나가기를 매일 기다렸지만, 형을 만나더라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복잡한 내 마음을 형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잘 지냈냐는 간단한 인사에도 나는 대답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그렇게 항상 겉도는 우리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형을 닮으려고 노력해봤지만 시시한 하루하루가 소중하기는커녕,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인생이 뭔지, 꿈이 뭔지, 사랑이 뭔지. 답이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찬 지독한 사춘기였다. 
 
마음이 조금밖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날 밤도 놀이터 그네에 앉아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끝으로 모래를 쑤시며 한숨을 쉬던 내 그림자 위로, 바람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형원아.”
 
올려다본 풍경엔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는 밤하늘과, 어두운 가로등 빛에도 반짝이는 눈망울이 있었다. 곧고 시원하게 뻗은 눈썹이 살짝 휘어지며 나를 향해 웃었다. 몇 년 전 그날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온 상냥함에, 나는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형에게 보이고 말았다. 
 
달이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일 만큼 한참동안, 형은 아무 말없이 울고 있는 내 앞을 가려주었다.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등을 토닥여주지도 않는 투박한 위로였지만 그 담담한 배려가 너무나 형이었다.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아무렇지 않게 기다려주는 그 모습이 내가 형을 좋아하게 된 이유라서, 나는 또 충동적으로 한 마디를 뱉고 말았다.   
 
“좋아해요, 형.”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과 잠겨서 갈라지는 목소리 때문에 더 엉망이 되어버린 고백은 절대로 내가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터져버린 폭탄에 손이 덜덜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물을 닦고 목을 가다듬었다. 
형이 듣지 못했을 수가 없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단 진정하기 위해서 깊게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손을 깍지 껴 맞잡고, 형을 기다리며 발끝으로 파 놓은 모래 구덩이들을 슬쩍 덮었다. 그렇게 상황을 외면하면서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을 흘려보내고도, 나는 무서워서 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형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무서웠다. 계속 이어지는 침묵과 함께 깊어지는 절망감에 내가 일어나 도망치려고 마음먹은 그 순간, 눈 앞으로 막대사탕 한 개가 내밀어졌다. 
 
크고 두터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은 막대사탕 한 개가, 귀엽고 당황스러웠다. 엉겁결에 건네받은 사탕을 입에 물자, 영원히 내 앞을 지키고 있을 것 같았던 발이 내가 앉은 그네의 옆자리로 향했다. 
밤이 깊어 조용한 놀이터에는 한동안 사탕을 먹는 소리와 그네가 흔들리며 내는 마찰음만이 울려 퍼졌다. 입 안 가득한 단맛에 용기를 얻어 옆을 보니, 형은 달을 보며 그네를 타고 있었다. 이 사탕은 무슨 뜻일까? 
혼란스러웠지만, 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단호한 거절보다는 차라리 두리뭉술한 희망고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빨리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지 않으면 고백의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너, 나 기억 못하더라.”
 
형이 뜬금없는 말을 꺼내며 웃었다.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돌아보는 나에게, 형은 내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첫 만남을 이야기했다. 
내가 아직 유치원생이고 형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을 무렵. 아직 사귄 친구도 없고, 학교도 동네 놀이터도 처음이라 혼자 놀고 있던 형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막대사탕을 건네 주었다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 일을, 형은 마치 어제 일처럼 말했다. 그 뒤로 우리 둘은 다른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가끔 아파트 근처에서 마주칠 때 마다 속으로 사탕꼬마에게 반가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형의 얼굴이 즐거워 보여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조금 간지러운 분위기에서, 우리 둘은 그 날 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형이 체대를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소방관이 되고 싶어서 라는 것도 그 날 밤 처음 알았다.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해서 이룰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하고싶은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서 찾은 꿈이라고 했다. 매일의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형은, 누군가의 매일을 지켜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형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도, 형을 참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형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고민과 깊은 생각들도 알지 못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했고, 그래서 형을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창피했다. 혹시 내가 형을 좋아하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고 오해하면 어쩌지, 아니 형의 얼굴을 좋아하긴 하지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작아진 사탕조각을 씹었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형도 나도 의식적으로 방금 일어난 사건-고백-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형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장 답을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절당하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이 마음의 일방통행을 계속 하고 싶었다. 
 
환하게 보이던 보름달이 구르고 구르다 아파트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없이 발을 맞춰 걷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도착했을 때 형이 일부러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는 것을 깨달었다. 조금 놀라서 돌아보자, 형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부렸다.
“아니 그냥, 바래다주고 싶어서. 늦었잖아.”  
멍청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얼마나 멍청한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지. 잘 자라, 하고 조용히 속삭이고는 부끄러웠는지 얼른 뒤돌아 걸어가며 형이 손을 흔들었다. 옆 통로 입구 안으로 형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형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집까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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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특별히 변한 점은 없었다. 시간이 맞는 날은 같이 등교를 했고, 밤에는 놀이터에서 같이 그네를 탔다. 다만 나는 이제 대놓고 형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고, 형은 그런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귀 끝을 빨갛게 물들였다. 형은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형을 보며 웃었다. 어두운 가로등 조명을 방패삼아 가끔은 형의 손을 잡아보며, 그렇게 서로를 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이후로 서랍에서 일기장을 꺼내지 않았다. 더 이상 내 속마음을 쓰레기 버리듯 써내려 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매일 밤 놀이터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사람이 내 일기장이었고, 하루의 끝이었다.  
 
가을이 지나 수능이 끝나고, 형은 무사히 1지망이었던 대학교의 체육학과에 합격했다. 집에서 통학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의 학교였기 때문에, 형은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면 자취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미안해하는 형의 앞에서, 나는 한껏 서운하고 아쉬운 티를 내며 어리광을 부렸다. 당황한 형이 나를 달래기 위해 자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 원대한 계획을 형에게 속삭였다. 
“형이랑 같은 대학 갈 건데. 그래서 같이 살건데.” 
여전히, 놀래서 동그래진 눈망울과 입술이 귀여웠다. 
 
형 자취방에서 같이 살건데. 장난스럽고 뻔뻔하게 말했지만, 나는 이 계획에 꽤나 진심이었다. 내가 다리를 다쳤던 1학년 1학기 동안 형이 내 등하교를 도와주면서 부모님들도 아는 사이가 되었고, 형이 합격한 대학교는 사범대로도 유명했으니까. 잘하는 것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해준 형 덕분에 나는 사범대 정도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 생각을 설명하면서, 이게 얼마나 실현가능한 계획인지 자랑하는 내 옆에서 형은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좋은 계획이라고 기특해하며,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것도 대견하다고 해주는 형의 칭찬이 듣기 좋았다. 그런 꿈을 가진 적은 없지만, 형이 다니게 된 대학을 따라가려고 마음먹은 이후로 생각해 낸 가장 그럴듯하고 안정적인 핑계였다. 
진실을 알게 되면 형이 실망하려나. 조금의 불안과 걱정은 뒤로 한 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짝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형을 더 좋아하는 만큼, 나는 조금 더 오랫동안, 형과 이런 사이이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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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교 다니면서, 같이 살기. 지난 1년 매일 아침에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던 다짐을 떠올리다 부끄러워져서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일은 내 졸업식이자 형과 새 집으로 이사하는 날이었고, 최근 몇 달 동안 내 밤잠을 설치게 한 내 작은 욕망을 실현할 디데이였다. 
 
내 계획대로 나는 무난하게 형이 다니는 대학의 교육학과에 합격했다. 지난 1년간 ‘가고 싶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선배’로 우리 부모님께 눈도장을 찍은 형과, ‘공부 잘하는 옆 통로 동생’으로 주말마다 형의 집을 들락거린 덕분에 우리 둘이 같이 자취할 수 있는 집도 지난 주에 계약을 마쳤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니, 사실 다 순조롭지는 않았다. 해가 바뀌던 날, 이제 나도 성인이 된다고 내심 기대했던 그 날 밤도, 형과 나는 놀이터에서 그네만 타다가 헤어졌다. 1월 1일 새해의 밤에도, 설날에도, 심지어 발렌타인 데이에도, 기껏 마음의 준비를 했던 보람도 없이 아직 내 입술은 순결했다. 
 
다 형의 잘못이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모른 척하는건지. 은근 슬쩍 입술에 뭐가 묻었다며 닦아주려고 하면 재빠르게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문지르며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 내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으니까 좀 봐 달라고 하면, 가까이 오지는 않고 갑자기 안경을 꺼내 쓰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는 형은 철벽이 따로 없었다. 혹시 이제 우리 사이는 짝사랑인 걸까 의심도 들었지만 여전히 손만 잡아도 빨개지는 형의 귀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뽀뽀를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동거 첫 날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이제 같이 살아야 하는데, 뽀뽀쯤이야! 뽀뽀가 뭐 그렇게 큰 일이라고! 속으로 큰소리를 떵떵 치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또 애꿎은 매트리스를 두들겼다. 
 
졸업식을 마친 후에 부모님과 짜장면을 먹고 집에 돌아오다가 무심코 놀이터를 돌아봤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친구와 놀고 들어가겠다 말씀드리고 급하게 달려간 곳에는 형이 처음보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번 편하다는 이유로 추리닝이나 과잠만 입고 다니던 사람이 검은 터틀넥 스웨터에 코트를 입고는, 뒷짐을 지고 웃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멋있었다.
 
“뭐에요, 형? 뒤에 뭐 숨겼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물어보자, 형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나에게 내밀었다. 들고 있는 꽃다발의 장미보다 빨갛게 변한 귀 때문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를 위해 멋지게 차려 입고 꽃다발까지 준비해서 축하해주는 형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졸업하기 전까지는, 아직 학생이잖아.”
눈을 피하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형을 빤히 바라보자, 목까지 빨개진 형이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라, 설마 이 분위기는. 중국집에서 나올 때 습관처럼 계산대의 박하사탕을 집어먹은 스스로가 기특했다. 내가 자꾸 기회를 노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학생이라서 기다리고 싶었다고 해명하는 형을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마주보고 서 있다가 꽃다발을 받는 척, 형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슬금슬금 형이 가까이 다가왔다. 1학년 때만 해도 형보다 한참 작아서 까치발을 해도 비슷하지 않았는데, 그 동안 많이 자란 덕분에 이제는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형과 함께한 3년 동안, 나는 마음도 몸도 많이 자라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까. 
피식 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는 형은 귀여웠지만, 이미 몇 달이나 이 순간만을 기다린 내 인내심은 몇 분 이상을 참지 못했다. 심호흡을 하며 잠깐 방심한 형의 코트 깃을 잡아당겨, 입술을 맞댔다. 로맨틱…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일단 어떻게든 맞대고 시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찬 성급한 행동이었지만,  
역시. 동그랗고 말랑거리는 입술은 귀엽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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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취방 근처의 놀이터로 밤산책을 나와 그네를 타면서, 형은 그날의 이야기로 투덜거린다. 그래도 첫 뽀뽀였는데, 잠깐을 못 참고 형의 멱살을 잡았어야 했냐고. 버릇을 잘못 들였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지만, 지금 형은 어제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내가 동기들과 술 마시느라 늦게 들어온 일로 투정을 부리는 중이라는 것을, 아까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현우 형, 집에 가요 이제.”
 
얼른 이 밤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 저 투덜대는 입술을 한번 더 귀여워해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형의 손을 잡고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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