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Lights
w. 수박바
“진짜 춥네.”
몇 시간을 날아와 내린 공항의 첫인상은 그랬다. 잠이 덜 깨서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눌러쓴 야구모자 사이로 머리가 다 쭈뼛 섰다. 겨우 몇 미터 내려 움직이는 건 데도 온 세상이 새하얗다. 입김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감상에 젖을 여유도, 정신도 없이 후다닥 실내로 들어가자, 그제야 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입은 두툼한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너 그러고 가면 죽을 수도 있어. 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동시에 떠오른다. 나름대로 가진 것 중에는 제일 두툼한 걸 껴입은 건 데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안됐다.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 행선지였다. 큰 짐들은 이미 집으로 다 보내버리고 동행한 거라고는 어깨에 짊어진 큼지막한 보스턴백 하나뿐. 이 안에 껴입을 옷이 얼마나 들어있더라. 짐을 정리하던 지난밤을 떠올리는 머릿속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사실 현우는 추위라면 자신 있었다. 기초 체온이 높은 편이라 그런다나, 늘 친구들에 비해 얇게 입은 차림으로도 땀을 뻘뻘 흘리기 일 수였다. 멜팅 올라프라는 귀여운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으니. 현우가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를 밝혔을 때 쏟아지던 조언들은 모두 추위에 관해서였다. 뭘 그렇게까지 겁을 줘 하고 웃어 넘겼는데, 확연히 다른 진짜 겨울이었다. 결국 야구 모자 위로 후드를 뒤집어 쓰고 끈을 단단히 묶자, 귀가 좀 답답한 것 빼고는좀 나았다. 그제야 시내 터미널만 한 자그만 공항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온통 두터운 옷을 껴입고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관광객으로 보였다. 준비들도 철저하지. 겨울이어도 눈보다는 비가 많이 오는 그 도시에서 출발한 것은 모두 같지만, 현우 빼고는 모두 단단히 잘 준비를 해 온 모양이었다. 비슷비슷한 방한복 차림의 관광객들 사이 유독 돋보이는 것은 커다란 북극곰이었다. 공항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새하얀 북극곰은 위압적인 자세로 모두의 기념사진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큰 곰을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셀카는 커녕, 영정 사진 하나 남기기 힘들 게 분명하므로 현우도 사람들 사이에서 기념 셀카를 찍으려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살면서 다시 올 일 없을 게 분명한 곳인데 그래도 사진은 찍어야지. 물론 대충 걸친 앵글에 곰이 90에 저가 한 5긴 해도(나머지 5는 물론 행인이다.) 뭐 찍히기만 하면 되었다.두세장 찍으면 되는데 뭐. 입 꼬리를 끌어 올리다가 그새 자란 수염이 신경쓰여 앵글을 조금 아래로 내리려는 찰나였다.
“찍어드릴까요?”
“암 오케, 어? 압, 네. 네!”
전혀 상상도 못한 타이밍에 들린 모국어에 대답이 꼬였다. 대답만 꼬인 건 아니고 혀도 좀 씹어서 눈물이 찔끔 난 게 더 문제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민 기다란 손에 뭐라도 홀린 듯이 핸드폰을 맡기자 익숙한 듯 받아드는 남자가 그제야 보였다. 두툼히 껴입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도록 무장을 한 남자였다. 거짓말 보태 주먹만 한 얼굴은 털달린 군밤 모자 사이로 콩알만큼 나와 있어, 간신히 봐야 얼굴이 보일 만큼.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핸드폰을 받아 들더니 익숙한 듯 현우를 움직였다. 조금 더 옆쪽으로요. 네, 손은 내려도 괜찮아요. 찍을게요. 하나 더 찍을게요. 좀 웃어보시겠어요? 찰칵, 찰칵, 연달아 네 장 정도 찍더니 못내 아쉬웠는지 두어 장을 더 찍고 나서야 겨우 현우는 어색하게 든 브이를 내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현우씨 맞죠?
“네?”
“픽업 나왔어요. 채형원입니다.”
이 여행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현우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 어디를 마지막으로 찍고 가야 하나를 고심할 무렵, 룸메이트가 불쑥 오로라 사진을 내밀었다. 누군가의 인스타 계정이었다. 여기 어때? 현우가 사진을 받아들자 거의 넘어왔다는 듯이 친구가 신이 나서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국해서 돌아갈 날짜도 거의 비슷했고. 지난번에 다녀온 친구들이 극찬을 했다며 너도 좋아할 거라고 떠드는 내내 현우는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고, 내민 사진만 들여다봤다. 그 계정의 피드는 오로지 밤하늘로 채워져 있었는데,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 위로 너울거리는 초록색의 신비한 빛이 채워진 밤하늘은.
수락은 쉬웠다. 현우는 여행을 같이 하기에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세세한 계획은 친구가 모두 세웠고 현우는 제 때 밥만 먹여주면 별 불만 없는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계획을 세우기 좋아하는 꼼꼼한 친구와 그를 잘 따르는 체력 좋은 친구는 보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 예상치 못한 문제는 친구에게 있었다. 어학 연수를 오기 전 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시던 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비보였다. 정신없이 귀국 준비를 하는 친구에게 차마, 여행에 대해 물을 만큼의 인성은 아니었던 터라 뭐 취소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 하고 말았던 것이 지난주였다. 이상하게 끌리던 그 사진이 생각났지만, 뭐 그뿐이었다. 현우는 지나간 것에 별로 세세히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며칠 전 친구에게 바우처가 도착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자, 이제야 상을 치르고 짬이 났다는 연락과 함께 너라도 잘 다녀오라는 메세지가 함께 돌아왔다. 거기 예약하기 얼마나 어려운 곳인데로 시작하는 친구의 말을 전부를 기억 할 수는 없었지만 뭐 결국 현우는 예정대로 옐로 나이프행 비행기에 타게 된 것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픽업도 다 나올 거고, 가이드가 전 일정을 같이 하니까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었지. 한국...아, 그러고보니 얘기 했었다. 가이드가 한국어를 잘 하니까 문제 없다고. 그런데 한국어를 잘 한다고 하면..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라는 소리를 안해서 조금 놀라서요. 손현우입니다.”
바로 손을 내밀었지만, 맞잡아 오는 손은 없었다. 채 2초도 되지 않을 정적이 비행 시간보다 긴 것만 같은 것은 왜일까. 자기소개 후 보통 악수… 하지 않나. 조금 오버 했나.
머쓱한 현우가 손을 물리려 하자마자, 손이 잡혔다.
“그러고 나가면 얼어죽어요.”
단, 악수는 아니고 왠 두툼한 장갑이 끼워지는 중이었다. 엥? 멍하니 쳐다보는 현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원은 두꺼운 제 장갑을 벗어 현우의 손에 끼우기에 여념 없었다. 살짝 내려깐 속눈썹이 참 길었다. 감상도 잠시, 방금까지 형원이 끼고 있었을 두툼한 털이 꽉 찬 장갑 두 쪽이 모두 현우의 손에 끼워졌다.
“저 추위는 별로 안 타는데.”
“와 본 적 있어요? 여기?”
“…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가볍게 내쉰 형원은 익숙한 듯 매고 있던 가방에서 두터운 머플러까지 꺼내 현우의 목에 둘둘 감았다. 졸지에 후드 위로 둘둘 김밥처럼 감긴 현우가 반항의 의미로 눈썹을 세웠지만 좋은 향이 나는 머플러가 둘러지자 내내 선득했던 목덜미가 순식간에 따뜻해져 할 말이 없었다.
“숙소에 방한복 준비해놨으니까 갈 때까진 그걸로 어떻게 버텨봐요.”
“진짜 괜찮은데.”
“나가면 쟤라도 뒤집어쓰고 싶어질걸요? “
형원이 가리킨 것은 공항 가운데 우뚝 솟은 새하얀 그 북극곰이었다.
“얼른 가죠.. 저쪽에 주차해놨어요.”
저거 실제 곰이라던데. 학교 다닐 때부터 별명이 곰새끼였던 현우는 괜히 찔렸다. 할 수 없이 긴 다리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걷는 형원을 조용히 따를 수밖에.
-
“거봐요.”
차에 탄 현우의 속눈썹이 새하얗게 얼어있었다. 내쉰 숨이 속눈썹에 맺혀 얼다니. 동화 속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정말 장난 아니긴 하네요."
솔직 담백한 감상에 형원이 그거 보라며 히터를 조금 더 높였다. 현우는 아직 추위에 된통 당한 것을 믿을 수 없는지 얼이 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차량에 붙은 온도계가 -35도에서 깜빡거린다. 그래도 어제보단 따뜻한 편인데. 그 말은 해주지 않기로 했다. 그저 숙소에 준비해 놓은 방한복이 조금 짧을 것 같아, 형원이 가지고 있는 여유분으로 바꿔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체인을 단단히 감은 타이어가 하얀 눈으로 굳게 다져진 도로를 드르륵 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분들은 숙소에 계시나요."
히터가 힘을 냈는지, 현우가 부스럭거리며 머플러를 조금 풀어내려고 꿈질거리고 있었다. 둘둘 감겨 조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원래 소인원만 예약을 받기는 하는데. 이번 투어는 현우씨 혼자에요.”
“네?!! 저 혼자요?”
"네. 현우씨 일행분도 그렇고. 다른 두 분이 더 계셨는데 거기는 날씨가 워낙 안 좋아서 비행기가 안 떴대요. 종종 있는 일이죠. 뭐 조금 심심하실 수는 있겠지만."
“아니 저야 좋죠. 저야 좋은데.”
“좋은데?”
“… 그 그렇게 해도 생계에는… 지장이 없으신가요?”
상상도 못한 소리에 형원의 웃음이 터졌다. 만난 지 십오 분 만에 생계 걱정을 듣다니. 웃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기는 했는지, 참느라 부들거리는 손이 핸들을 꽉 움켜쥐어 봤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로 참던 웃음이 더 크게 터져, 안 그래도 히터 열기에 달아오른 현우의 얼굴만 벌겋게 더 달아오르는 결과만 초래했다. 어우 갑자기 덥네. 방금까지 얼어 죽을뻔했던 현우는 부채질까지 하며 괜한 창밖만 보는 신세가 되었으니까. 그만 웃어야지 하는데, 그게 쉽나. 오랜만에 빵 터진 형원의 웃음이 겨우 진정된 건 다음 신호에 걸렸을 때 쯤이었다.
“걱정마요. 취미로 하는 일이거든요.”
시뻘건 현우의 귀를 바라보며 부러 농담을 섞어 말을 건냈다. 아무래도 너무 웃었지. 사실 완전히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다행인 건지, 풀이 죽은 건지 형원의 농담에도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수긍을 하고 만다. 그에 또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형원이 애꿎은 핸들만 꾸욱 쥐는 걸 창밖을 보는 현우는 모를 게 분명했다.
“배는 안고파요?”
화제를 밥으로 돌리자 잽싸게 다시 고개가 돌아온다. 그 속도만 봐도 대답이 필요 없었다.
“조금? 많이 고프지는 않아요.”
“그럼 일단 숙소 도착해서 식사부터 하고, 조금 쉬었다가 나가는 걸로 해요. 많이 피곤하지는 않으시죠?”
“그럼요! 쌩쌩해요! “
“다행이네요. 오늘 날씨가 썩 좋지 않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한 열한시쯤부터 헌팅 가볼까 봐요.”
“헌팅이요?”
“네. 오로라가 잘 보이는 스팟이 있거든요. 날씨에 따라 크게 달라서, 차로 저랑 같이 이동하면서 찾는 걸 여기서는 오로라 헌팅이라고 해요. 대충 친구분한테 설명은 들었죠?”
“솔직히 말해도 돼요?”
“뭔데요? 멀미 심하다는 거 빼고 다 들어줄게요.”
차를 좀 타야 해서. 길이 험한 곳이 좀 있거든요. 형원의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멀미는 괜찮아요! 멀미는 괜찮고..사실 계획을 친구가 다 짜서 ..저는 그냥 사진만 보고 온 거라서요. 잘 모르거든요.”
어쩐지. 형원은 예약을 위해 메세지를 주고받던 현우의 친구를 떠올렸다. 꽤나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타입으로 이미 현지에 대한 정보가 빠삭했다. 덕분에 다른 예약 손님에게 보다 당부 사항도 적었다. 물론 사정으로 여행 여정이 틀어져, 둘 중에 한 명만 온다고 했을 때도 친구니까 뭐 대략 비슷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따라오는 쪽이었군. 그렇다면 꽤나 얇은 차림으로 무모하게 공항에 서 있던 현우가 이해가 되었다.
“무슨 사진을 봤어요?”
“친구가 사진을 하나 보여줬었거든요. 인스타그램에서. 그게 너무 신기해서 가고 싶다고 한 거라.”
“아마 제 계정일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뭐 인스타로 예약을 한다고 했던 거 같!”
“맞아요. 취미로 한다는 말 농담이긴 한데. 원래 사진 찍거든요. 가이드는 취미로 가끔만.”
“아…그래서 제 사진도...”
“미안한데 인물은 별로 소질 없어요. 풍경 전문.”
공항에서 찍은 사진...되게 잘 나왔던데. 오래간만에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하고 내심 생각했던 게 머쓱해졌다. 물론 현우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 형원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다.
“사진 좋아해요?”
“보는 것만요. 찍는 건 잘 못해요.”
“그래 보이긴 하더라고요. 셀카 심각하던데.”
“아니, 셀카는 좀..”
구박 아닌 농담이라며 웃어 보이는 형원 덕에 제법 분위기가 풀어졌다. 첫인상은 조금 차갑게 생긴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닌 현우로서는 다행이었다. 몇 번 현지 투어를 해보았지만, 또래의 가이드와 함께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매번 가이드 할아버지들의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던 것에 비하여 모국어가 주는 편안함은 상상보다 더 나았다. 형원의 목소리는 꽤 낮은 편이었는데, 그에 비해 발음은 둥글둥글한 편이었다. 지명을 얘기하는 영어 발음이 좋은 걸 보니, 국적은 한국인이 아닌 걸까. 현우는 아까의 생계 이후로 어디까지 묻는 것이 실례가 아닐까의 경계를 아직 정하지 못해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어색한 침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문일까. 잠깐 걷는 것만으로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던 바깥과는 달리 따뜻한 차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퍽 낭만적으로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새삼 어제와는 다른 세상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를 가득 메우던 불빛이 하나 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고요한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새로이 들어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끝없이 펼쳐질 것 같던 길 끝, 저 멀리 타운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두근대는 마음이 불빛과 같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
“잘 잤어요?”
집 가득 풍기는 커피 냄새가 끝내줬다. 1층으로 내려가자, 편한 차림의 형원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타이밍 좋네. 마실래요?”
“…아이스로 부탁해도 돼요?”
“그대로 들고나가서 마시면 아이스 될걸요?”
“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현우의 새집 진 뒤통수가 그렇게 황망할 수가 없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은 표정에 형원은 웃으며 얼음 큐브를 꺼냈다. 놀리는 거에 재미들리면 안 되는데. 놀림당한 앙금이 남았는지 입술이 뾰루퉁 나와서도 내미는 아이스커피에는 눈을 빛내며 받아든다. 솔직한 반응에 자꾸만 놀리고 싶어지는 건 비단 형원의 잘못 뿐만은 아닌게 분명했다.
“자는데 춥진 않았어요?”
"춥긴요. 자다가 이불 걷어차고 잔 거 같아요. 기절해서 기억은 안 나지만."
현우가 묵는 방은 이층 첫 번째 방이었다. 문으로 보아 비슷한 방들이 두어 개 더 있는 듯했다. 첫날 형원이 현우에게 방을 소개해주자, 정말 이 방을 써도 되냐고 두 번을 다시 물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우는 시티에서 딱 그 반만 한 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쉐어를 했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가는 시티에서 방세를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뿐만 침대도 무척 푹신했다. 돌아누울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스프링 다 나간 이층 침대에서도 잘만 자던 현우였으니. 자는 게 아까울 만큼 좋은 침대였다. 첫날은 물론이고, 어제는 기절했다는 게 과언이 아닐 만큼 단 잠이었다.
“일찍 일어났네요. 한두시는 되어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째 투어를 끝내고 들어온 게 새벽 세시 무렵이었다. 기운이 남았는지 집에 도착해서는 그래도 제법 친해진 형원과 맥주를 몇 캔 했다. 보드카도 한 잔 마시고. 다섯시가 넘어서야 자겠다고 올라갔던 것에 비하면 이르긴 했다. 열두시를 막 넘어가는 시계를 확인한 현우는 실컷 잤다며 풀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바람에 머리에진 새집이 조금 더 커진것은 모르겠지. 이곳의 일과는 단순했다.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투어에 보통 오후에나 일어나서 조금 관광을 하고 다시 밤이 되면 오로라를 쫓는게 보통 이 마을을 찾는 이들의 루틴이었다. 다 둘러보아도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이 작은 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목적은 모두 같았으니까. 그러나 첫날도, 둘째날도 결국 오로라는 둘에게 모습을 보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구름이 많더라니, 역시나였다. 단순한 운에 걸기에는 이곳까지 오는 여정은 그리 간단하지않았으므로 예측 가능한 모든 것들을 사용해 오로라를 쫓지만, 허탕을 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형원에게야 익숙한 일이었지만, 새로운 여행객이 오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현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지만.
"형원씨야 말로 너무 빨리 일어난 거 아니에요?”
휴대폰으로 날씨를 보고 있던 형원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현우 머리에 진 새집 만큼은 아니지만 형원의 얼굴도 꽤 부어 있었다. 같이 늦게까지 마신 술때문이었다. 혼자 마시는 술을 관둔 이후로 오랜만에 마신 참이었다. 내리는 눈을 안주삼아 마시기 시작하면, 알콜 중독까지 순식간이었다. 형원은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어제는 그런 의미에서 제법 즐거운 술자리였다.
“그렇게 게으른 사람으로 보였어요? 저?”
“아니, 그게 아니라. 더 주무셔도.”
“배고프지 않아요? 어젯밤에 먹는 얘기를 하도 해서 그런지 나는 배고프던데."
어젯밤 신나서 스테이크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자신이 떠올라 현우의 귀가 달아올랐다. 평소 말이 많은 편도 아닌데, 어제는 꽤 많이도 떠들었다. 술도 들어갔겠다. 따지고 보면 만난지 이틀 된, 거의 초면에 가까운 사람인데. 분위기가 그랬다. 이틀동안 오로라를 쫓는 일도 그랬다. 추운데서 사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다리는 일 뿐인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다. 현우는 사실 기다리는 것에 별로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낚시도 몇 번이나 따라가본적이 있었는데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낚시를 하느니 바다에 직접 뛰어드는 게 훨씬 나았다. 그처럼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별로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낚시보다도 낮은 확률이라는 오로라를 기다리는일은 왜 지루하지 않았는지 의문이긴 했다. 더군다나 기다리는 오로라는 코끝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그만 들어가자는 말에 본 시계가 새벽 두시가 넘어 있어 놀랐다. 고작해야 한두시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였다. 맥주 한 잔 하자고 형원에게 먼저 권한 것도.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기울이던 캔맥주, 그리고 자꾸만 시선이 가던 형원의 얼굴. 같이 사이좋게 덮은 담요 사이로 부딪히던 마른 무릎, 아직 술기운이 남은 듯 어딘가 몽롱하던 현우를 현실로 잡아 이끈 것은 코앞에서 다가온 퉁퉁 부은 형원의 얼굴이었다.
“어제 말 했죠?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에그 베네딕트 먹게 해 줄게요.”
꽤나 자신만만하게 웃는 형원을 따라 현우도 속절없이 웃음이 터졌다. 기대할게요. 대답과 동시에 현우는 깨달았다. 여기 도착해서는, 자꾸만 기대하게 될 일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
“이런 하늘을 매일 보는 기분은 어때요?”
“글쎄, 오늘은 보일까 정도?”
간이 의자에 눕듯이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현우가 말을 꺼냈다. 멋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렇다고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의 감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핏 보면 먼지같이 보일 정도로 빼곡한 별들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오늘은 지난 이틀과는 달리 오로라 빌리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로라 빌리지는 오로라가 주로 잘 보이는 곳에 하얀색의 작은 천막으로된 티피 텐트가 곳곳에 설치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꼭 작은 스머프 마을 같이 보였다. 캄캄한 호수 앞에 위치한 티피안은 난방도 되어 있어 -40도에 가까운 날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온기가 있었다. 그러나 형원의 여분의 방한복으로 온몸을 무장한 현우는 티피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형원과 같이 오로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형원의 카메라는 둘 앞에 고정되어있었다. 카메라를 잘 모르는 현우의 눈에도 제법 좋은 카메라처럼 보였다. 행동 반경이 큰 현우가 덤벙대다가 발로 찰까 걱정하자, 형원은 현우가 한 몇 년 조수로 따라다니면 될 만큼밖에 안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해 현우를 되려 식겁하게 만들었다. 현우는 아직 형원의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알기 힘들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을 어떤 방향으로 뻗어야 할까를 고민하던 현우에게 형원이 김이 모락모락나는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옆에 눈 한주먹 쥐어 넣으라는 형원의 농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우는 뜨겁지도 않은 지 김이 풀풀 나는 걸 그새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입김이 새벽 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형원은 여전히 커피가 든 컵을 들고 조금 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 걱정도 싹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방금 흩어진 숨 사이로는 한숨이 섞인 모양이었다. 여행의 일정은 딱 반절이 지났다. 삼일째 밤. 그리고 현우는 여행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 떠올려보려 했지만 형원은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별로 걱정이 많은 타입은 아닐 것 같았는데 의외네요. 현우씨.”
“걱정이 왜 없겠어요. 당장 한국 돌아가면 뭐하고 사나 걱정이 태산인데.”
“졸업반이라고 했죠?”
“네. 막학기라서 일단은 본가로 가려고요. 복학은 아마 그 다음에나 할 것 같아요.”
두 살 아래라고 했나, 형원은 고민을 하느라 골몰해있는 얼굴이 그럼에도 반짝거리며 빛난다는 말을 하려다가는 적당히 식은 커피만 한 모금 넘겼다.
“집에 돌아가는 게 오랜만이라 좋기는 한데, 뭐랄까 한 거 없이 돌아가는 것 같아서 또 불안하기도 하고 뭐 그런데 여기 하늘만 보면 그런 게 잘 생각이 않나요.”
“여행이니까요. 막상 생활이 되면 다를 것도 없어요.”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현우가 의외라는 듯이 형원을 돌아봤다.
“형원씨는 어쩐지 그런 고민이랑 거리가 멀어보여요.”
“그래보여요?”
형원은 고개를 꾸닥거리며 눈을 빛내는 현우를 보며 작게 웃었다.
“오로라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 아니요.”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이란 뜻이에요.”
“새벽에 주로 보여서 그런건가요?”
“뭐 그럴 수도 있고.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명의 신 아우로라에서 따왔대요.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가져오는 여명의 여신.”
“우와.”
“그래서 그걸 쫓기시작했는지 몰라요.”
형원이 스물 하나에 이 마을에 왔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찰나의 오로라처럼 너울거리며 그가 형원의 삶에서 사라졌을때부터 오로라를 찍기 시작했다. 돌아갈 집이 없었으니까.
“… 아침이 빨리 되기를 바라서요?”
“반대였는지도 모르죠.”
중2병이라고 하죠? 그게 늦게 왔어요 제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털털 웃는 형원과는 달리 현우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잔뜩 구김이 간 미간 사이에 걱정이 그대로 읽혀 괜한 이야기를 했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형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끄집어낸 기억이었다.
“.. 저 본가가 제주도라고 얘기 했었나요?”
“제주도에요?”
“형원씨도 와본 적 있어요?”
“아니요. 한국은 중학교 때까지만 있었어서. 서울 외에는 가본 적이 없어요. 그것도 한참 전이지만.”
“다시 오면 기절할 수도 있어요. 많이 달라졌을걸요. 여튼 꽤 큰 섬이긴 한데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바닷가 근처였거든요. 여름에는 해가 늦게 지니까 친구들이랑 바다에서 노는 게 일이었는데."
형원은 가 본 적도 없는 곳이지만 어쩐지 상상이 되었다. 물론 본 적도 없는 어린 현우가 태양이 작렬하는 바닷가에서 뛰어 노는 모습까지.
"어느날은 놀다가 좀 깊숙히까지 헤엄을 쳤나봐요. 뒤돌아 보니까 언제 갔는지 친구들은 하나도 없고. 해는 이미 져서 캄캄하더라고요."
"무서웠겠네요."
"엄청요. 갑자기 잘 하던 수영도 잘 안되고, 어쩐지 파도도 센 것만 같고. 다시 돌아갈 길이 막막해서 막 눈물이 나는데."
"울었어요?"
"..조금요."
"귀여웠겠네."
"네?"
"계속 해봐요. 그런데?"
현우는 그날 그렇게 바다가 무서운 곳인 줄 처음 알았다. 낮의 바다와 전혀 달랐다. 헤엄을 쳐도 물 방향이 바뀐 것인지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육지에 닿기가 어려웠다. 반에서 제일 수영을 잘 하는 현우였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눈물도 처음에만 났을뿐, 아무리 엉엉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는 눈물은 금세 그쳤다. 짠 건 바닷물이나 눈물이나 비슷했으니 바닷물로 족했다. 한참을 씨름하던 끝에 무슨 생각이었을까. 어린 현우는 팔 다리를 뻗기를 포기하고 그냥 바다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아무리 파도가 무서워도 그 순간을 꾹 참고 바다에 몸을 맡기면 몸은 둥실 떠오르기 마련이다. 헤엄칠 힘도 없는 현우는 그냥 바다를 침대 삼아 누워버렸다. 물에 반쯤 잠긴 귀로 물이 들락날락, 파도에 넘실 거리는 물이 턱 끝까지 왔다 가기를 반복할 무렵, 저 하늘 끝에 무언가 반짝하고 떨어지는 게 보였다.
"별똥별?"
"맞아요. 살면서 그날 별똥별을 처음 본 거였거든요."
"보기 쉽지 않죠."
현우는 너무 놀라 소원을 비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몸을 돌려 이미 궤적만 남고 사라진 별 방향으로 정신없이 팔 다리를 저었다. 어린 마음에 빠르게 가면 별이 떨어진 자리가 보일 것만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현우는 별이 떨어진 자리는 찾을수 없었다. 대신, 그렇게 헤엄을 쳐도 닿기 힘들었던 해변가에 발이 닿았다.
"소원을 이뤄줬네요."
"비는 거 까먹었었는데."
"우는 소리가 별한테도 들렸나보죠."
이십대 중반에 엉엉 울던 시절 얘기를 하고나니 쑥스러움은 현우의 몫이었다. 그 날 집에 들어가 등짝을 호되게 얻어 맞은탓에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위험한 일이 있었다고 말 하면 더 혼날 게 분명했으니까. 사실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현우도 반쯤 까먹고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왜일까. 이 날이 생각난 것은. 순간, 그 바닷가에서 떨어지던 별의 궤적이, 올려다보고 있던 밤하늘과 겹쳐졌다.
"어?"
"빌었어요, 소원?"
현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미 사라진 궤적을 가리키며 묻자 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똥별 맞아요.
"살면서 딱 두 번째인데.."
“두 번을 다 소원을 못 빌었네요."
"형원씨는 소원 뭐 빌었어요?"
"..소원을 빌 만큼 드물지 않은데 여기서는."
"그래서 한 번도 안 빌었어요?"
여기서는 사실 별똥별은 흔했다. 하룻밤 새 이렇게 많이 떨어진다고 할 만큼의 별이 떨어지는 밤도 있었다. 해가 지고 뜰 때마다 소원을 빌 리 없듯이. 그럼에도 그런 아까운 짓을 했다는 듯이 바라보는 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자, 순간 형원은 한 번도 빈 적 없던 소원을 빌고 싶어졌다.
"빌어도 될까요."
"이미 늦었잖아요."
"그동안 적립해 둔 걸로 한 번은 어떻게 봐주지 않을까 싶은데."
"뭔데요?"
"들어줄래요?"
"?"
밤하늘에 별똥별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형원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별의 궤적보다 선명하게 들어왔다. 제게 와닿은 입술은 별똥별보다 현실감이 없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형원의 입술이 제 입술 위에 내려앉은 영원 같은 몇 초가 지나고, 아주 천천히, 형원의 감은 눈이 열렸다. 속을 알 수 없이 새카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였다. 그 안에 비친 게 무엇인지 알고 싶기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들여다보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형원의 밤하늘. 눈을 마주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현우는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다. 현우의 눈이 스르륵 감김과 동시에 형원이 차갑게 언 뺨을 감싸 쥐며 현우를 티피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껏 포개진 둘의 걸음이 비틀거리며 마치 왈츠를 추는 것 같았다. 닫힌 티피 밖, 저 멀리 사람들의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밤하늘을 뒤덮은 춤추는 초록빛 너울, 오로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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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런 감흥없던 그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울렁이는 것은, 멈추어 있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또한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오로라의 색보다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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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몸은 형원보다 체온이 높았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물론 이곳의 추위는 조금 예외였지만. 두터운 이불 아래 조금의 틈도 없이 꽉 끌어안으면, 품에 가득차는 뜨끈한 체온이 좋았다. 벌거벗은 타인의 체온이 이렇게 기분이 좋았나. 형원은 현우의 등을 끌어안은 채, 목덜미 깊숙이 고개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게 간지러운지 잠결에도 조금 웃는 현우였다. 간밤에 어떻게 운전을 해서 돌아왔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짐을 지프에 대충 쑤셔 넣으면서도 놓지 않고 쥐고 있던 현우의 손만 기억 났다. 행여나 놓칠새라 잡고 있던 손. 장갑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빌어먹을 날씨가 원망스러웠던 것도 처음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침대로 뒤엉켜 쓰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몇 시에요?"
잠에서 막 깬 현우의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사정없이 갈라진 목소리에 현우보다 더 놀란 것은 형원이었다. 목이 왜 이러지? 대수롭지 않아 하는 현우와는 달리, 그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어떻게 온 것인지는 희미해도, 제 아래에서 울던 현우는 무엇보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여덟시도 안됐어요. 더 자도 돼."
"으음.."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이 뻐근한 몸을 쭉 펴 기지개를 피고 싶었으나,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형원은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더 자도 된다면서 어깨며 목덜미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는 형원 덕에 잠은 달아난지 오래였다. 간지럽다고 키득거리던, 현우도 조금씩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쓸어주던 손이 점차 노골적으로 야릇해진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어나 어떤 얼굴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눈을 뜨기 직전까지 고민하던 것이 아무 소용없었다. 가슴을 더듬거리던 손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현우가 돌아 누워 다시 뒤엉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아침이었다. 아침이 오는것이 늦은 겨울 도시의 좋은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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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원의 인스타그램에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지 벌써 한달째였다. 언제 팔로잉 했는지도 모를 관심없는 홍보 계정이나 하나도 안 궁금한 친구들의 피드는 매 시간 새로운 게 올라오는 것 같은데 정작 궁금한 형원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매일 아침 루틴처럼 확인을 하는 데도, 변함없이 현우가 한국으로 오던 날 올라온게 마지막이었다. 형원의 인스타그램을 채운 각기 다른 오로라 사진들 가운데 가장 선명하고 커다란 오로라였다. 평소처럼 장소나 시간은 써있지 않았다. 그저 작은 비행기 이모티콘 하나만 남겨져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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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아오는 날까지 현우는 오로라를 구경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마치 잠시라도 떨어지면 안 되는 사람들처럼. 꼭 붙어 있기에도 한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물론 형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쫓기는 사람처럼 매번 시간을 확인하는 현우와는 달리 형원은 느긋해보였다. 심지어 그날 티피 앞에서 둘이 뒤엉키는 바람에 쓰러져 눈에 쳐박혔던 카메라가 고장 난 걸 확인했을 때도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은 현우 뿐이었다. 남의 것처럼 멀뚱히 바라보던 형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별똥별이 소원을 들어준 값으로 치자면 싼거 아니냐는 엉뚱한 말이나 하고. 여전히 현우는 형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기 어려웠다. 그럴 땐, 몸을 부딪히는 게 조금 쉬웠다. 저를 급하게 끌어당기는 손, 마주 닿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조급함은, 알 수 없는 마음보다는 분명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게 좋아서, 현우는 자꾸만 형원을 끌어 안았다. 마주 안아오는 품에 기대면 소란한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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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원의 침대 맡에는 밖이 그대로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형원의 품을 베고 누우면 마치 빔으로 틀어놓은 것처럼 끝없이 눈이 내리는 풍경이 보였다. 형원의 집은 타운에서도 차로 한참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있다면 꼭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온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늦은 밤, 문득 거실에 늘어놓았던 방한복을 꺼내 입고 집 앞으로 산책을 나선 것은. 잠깐 나가는 건데 뭐 하고 운동화를 신었다가 잔소리만 실컷 들었다. 소파에 앉은 현우의 발에 두터운 양말 두개, 그리고 스노우 부츠까지 신겨주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실은 추위에 약한 것은 형원었으면서. 처음 공항에서 장갑을 벗어주던 것이 떠올라 현우는 괜스레 마음이 울렁거렸다. 새하얀 눈에 반사된 어둠은 어딘가 포근했다. 비록 방금 엉덩방아를 찧어 주저 앉아 바라보는 풍경일지라도. 눈이 없었더라면 분명 쿵 소리를 낼 만큼 요란하게 넘어져버린 현우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놀란 형원의 얼굴을 봤다. 카메라가 고장나도 눈 하나 깜짝 안하더니. 푹신한 눈 사이로 고작 미끄러진 걸 보며 더 커질 수 없이 눈이 커졌다. 황급히 저를 일으키려는 손을 되려 잡아 끌자, 애초부터 버틸 생각도 없었다는 듯이 허물어져준다. 추운 걸 싫어하는 그가. 와르르, 저에게로 허물어져준다. 그게 좋아 괜히 잡고 있던 손을 꽉 잡아 쥐자, 형원이 더 세게 손을 쥐어왔다. 그럴리 없는데도, 장갑 낀 손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은 이미 그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고 있는 제 뺨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손길이 좋아,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아가며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기도 했다. 둘은 그날 쓴 털모자가 하얗게 얼때까지 나란히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캄캄한 어둠, 오로라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현우는 그때 문득 다른 풍경에서 그의 손을 잡는 상상을 했다. 봄이어도 좋고, 여름이어도 좋았다. 잡은 손 사이로 느껴지는 게 그의 맥박인지, 내 심장 소리인지 헷갈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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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낮과 밤이 지나는 동안 쌓이는 눈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처음 몇 달동안 햄버거만 사 먹은 얘기, 집에 돌아가면 당장 졸업때문에 토익을 봐야 한다는 얘기, 전공은 뭔지, 현우가 사는 곳의 겨울을 얼마나 다른지. 주로 묻는 것은 형원이었고, 현우는 하다하다 집에서 귤농장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별 이야기들을 다 늘어놓다가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고, 눈을 떠보면 형원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기도 했다. 형원도 가끔씩은 제 이야기를 했다. 현우는 갈증난 나무처럼 이것저것을 더 묻곤 했다. 토막토막 끊긴 이야기 사이의 형원의 시간들을 상상하다가, 현우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술을 가져가면 느릿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주 오래 이렇게 있었던 사람들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서 정작 궁금한 것들은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현우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냐는 말을, 공항에서 잡은 손을 놓을 때까지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형원 또한 묻지 않았다. 그저 처음 만났던 그 차림 그대로 웃으며 현우가 탑승 게이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을 뿐.
그랬으면서. 만나야 하는 친구들 약속도 미루고 아침마다 이러고 있는 게 한심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잘 지냈냐는 대답이 돌아올까봐 무서운 마음이 더 컸다. 마주 끌어안을 때면 확실했던 마음이 별똥별처럼 사라진 것은 아닐까. 오늘도 현우는 디엠창을 닫았다. 썼다 지운 메세지가 그 밤하늘의 별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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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우를 움직이게 한 것은 다른 아닌 엄마였다.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의 일년만의 컴백인지라 눈물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다정하게 맞아주더니 감동적인 상봉은 일주일은 커녕 며칠도 가지 않아 평상시로 돌아왔다. 아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바 아니었다. 복학까지 몇 개월이나 남은 시간을 빈둥빈둥 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형원이 있을 겨울에 머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제주는 다른 곳보다도 봄이 빨리 찾아오는 곳이었다. 봄이 되면 섬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현우가 대학을 가면서부터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한 부모님은 비어있던 예전 집을 개조해 가끔씩 사람들에게 빌려주곤 했다. 봄이나 여름에는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방에 쳐박혀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는 현우의 등짝에 불이 났다. 차 가지고 나가서 사오라는 물건 목록이 빼곡한 것이, 예약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들 좀 내버려두라고 문을 쾅 닫을 나이도 아닌지라, 어쩔 수 없었다. 차키를 들고 나서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밤공기에 꽃향기가 묻어났다. 된통 빠져버린 사랑에 고민하느라 사방에 꽃이 핀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순간, 정신이 들었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언제 보일지 안보일지 모르는 오로라를 멍하니 기다리기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까마득히 멀어 보여도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향해 팔다리를 휘저어보는 것이 현우에게 어울렸다. 이렇게 시간만 흘려 보내다보면 쌓이던 눈 사이에 저의 기억이 모두 뒤덮일지도 몰랐다.
그래, 오늘은 꼭. 메세지를 보내자. 어떤 대답이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보고싶다고
.
이상하지, 생각을 하자마자 형원이 참을 수 없이 보고싶어졌다. 몇 글자 메세지로 이 마음이 전해질리가 없었다. 그동안 겁이 나서 주저하고 있던 시간이 바보같이 느껴질 만큼 답답했다.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게 차 키가 아니라 비행기 티켓이라면. 그렇다면...
똑똑.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터져나온 감정의 둑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현우를 현실로 부르는 소리였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자 누군가 현우 차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길을 막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깥에 선 이의 얼굴은 창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창문을 내리자, 인내심 좋게 서있던 사람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쳐온다.
"현우씨."
꿈인가. 방금까지 현우의 머릿속을 쥐고 흔들던 사람이 눈 앞에 서 있었다.
"서둘러온다고 왔는데, 벌써 봄이 되버렸네요."
벗어 쥐고 있던 코트를 흔들며 웃어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형원의 얼굴이 닿았다. 꿈이 깰까, 차마 그대로 더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이는 손을 잡아 끈 것은 형원이었다. 쪽, 얽어맨 손가락에 입을 맞춘 형원이 현우의 손바닥에 얼굴을 부빈다. 먼 길을 달려온 것을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늦은 건 아니죠?"
속을 알 수 없이 새카만 형원의 밤하늘을 들여다보는 게 무섭던 밤이 있었다. 그의 경계가 어디쯤일까를 더듬거리던 눈 먼 밤을 지나, 그의 물기어린 눈동자 가득 비춘 자신을 본다. 확인하는 게 두려워 망설이던 시간은 현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팔을 뻗어 서로를 끌어안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품 안 가득한 현우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참아왔던 깊은 숨을 들여 마셨다. 형원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오로라가 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