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Walk


나의 친애하는 첫사랑
션박스 씀

 

 

 

 

 

"현우야, 너 다음 주부터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 찍어야 된다?"

"...네?"

"왜 있잖아. 요즘 MONFLEX에서 유명한 리얼 러브 하우스. 그거 시즌3."

"그거 제가 나가요? 저 말고 다른 멤버들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미 결정된 거라 어쩔 수 없어. 그쪽에서 널 꼭 집어서 얘기했거든."

"저요? 저를요?"

 

갑작스러운 고정 스케줄 통보에 현우는 눈만 껌뻑였다. 현우의 벙찐 표정을 본 매니저는 짧은 스포츠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현우야, 이거 진짜 인기였던 거 알지? 너만 잘 하면 우리 한 번에 뜰지도 몰라. 응?" 매니저는 현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한번 웃었다. 현우는 매니저가 짓는 미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되고 싶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원하는 일과 원하지 않는 일을 고를 수는 없었다.

 

대형 기획사도 아니고 중소 중에서도 완전 소형 기획사로 봐도 무방한 소속사에서 겨우 데뷔한 현우는 그룹을 알릴 수 있다면 뭐든지 열심히 하겠다는, 빠른 태세 전환을 했다. 두 달 전, 운 좋게 역주행으로 그룹 인지도와 노래가 꽤 알려진 덕분일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그룹명에 비해 '손현우'의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매니저의 스케줄 통보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말주변도 별로 없고 적극적으로 웃겨주는 타입도 아니었기에 한창 핫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앞으로 섭외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랑 같이 찍는 상대는 누군데요?"

"어, 채형원 배우. 채형원 배우가 꼭 너랑 하고 싶대."

"....채, 채형원 배우요?"

"그렇다니까~ 완전 대박 아니냐, 현우야?" 

 

'그' 채형원 배우와 같이 찍어야 한다니. 현우는 리얼리티를 찍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욱 긴장이 되었다. 채형원은 얼굴, 피지컬도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없을 만큼 좋았지만 연기력까지 대단해서 데뷔하자마자 영화계를 잡아먹은 괴물 배우였다.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드라마, CF까지 채형원이 나온 모든 것들은 항상 히트를 쳤다. 게다가 '우성 알파'라는 것도 채형원을 우상화하기에 딱 좋았다. 우성 알파는 극히 드문 세상에서 외모와 인성까지 갖춘 채형원이 우성 알파라는 사실이 우연히 드러나자 사람들은 신이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칭송했다. 백만점의 남자. 미모, 성격, 연기력, 재력, 집안.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채형원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그에 반해 손현우는 어떠한가. 스물세살에 겨우 데뷔해서 스물 여섯이 될 때까지 아직 정산도 받지 못한, 3년 차의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의 하나였다. 입담도 별로 없어 예능에 나가기엔 부족했고, 살랑이는 애교로 만인에게 귀염 받는 타입도 아니었다. 연습생들 중에서 제일 열심히 춤 연습을 해서 데뷔조에서 메인 댄서가 되었고, 데뷔조에서는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리더가 되었을 뿐이었다. 데뷔하고 나서는 이 마저도 너무 밋밋한 수식어였지만. 그래서 회사에서는 대중들에게 손현우를 각인시킬 수 있는 단어를 생각했다. 열성 오메가. 키 크고 체격 좋은 손현우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열성 오메가였다. 그래서 처음 데뷔했을 때, 손현우는 자신을 소개하는 몇몇 단어 중 열성 오메가를 빼놓지 않았다. 5명의 멤버 중 오메가는 손현우 밖에 없었고, 알파처럼 생긴 손현우가 사실은 오메가라는 반전은 이런저런 홍보할 때 좋지 않겠냐는 회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렇게 손현우는 그룹 VISTA X의 리더이자 메인 댄서라는 타이틀 외에 열성 오메가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달았다.

 

채형원과 더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많을 텐데. 우성 알파 채형원과 어울리는 우성 오메가 연예인이나 일반인이나, 뭐 어쨌든, 자신이 아는 것만 해도 손에 꼽고도 남는데. 채형원급 정도면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랑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들 채형원과 찍고 싶어서 안달 났을 텐데. 

 

아니, 모든 걸 차치하고 '구남친'인 저와 '굳이' 찍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현우의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다.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의 현우를 본 매니저는 이번에 반응 좋으면 다음 시즌에 다른 멤버들도 출연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며 희망에 가득 찬 눈빛과 말투로 달랬다. 그 눈빛에 현우는 어설프게 웃으며 매니저에게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가까스로 누르며 현우는 그룹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X월 X일 수요일 오후 3시. MONFLEX 리얼 러브 하우스 제작발표회가 시작되었다. 무대 앞에 프로그램 제작진과 출연진 전원이 기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PD가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리얼 러브 하우스는 숙소 하나를 통째로 빌려 두 달 동안 살면서 찍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시즌 1이 방영된 이후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걸친 채, 그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듯한 연출과 에피소드들로 반응이 좋아 시즌 2에 이어 시즌 3까지 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시즌 1과 2처럼 시즌 3도 총 3커플의 에피소드가 제작될 예정이었다. 이번 시즌3의 출연진은 운동선수 H와 인플루언서 G, 모델 D와 쉐프 J, 그리고 배우 채형원과 아이돌 손현우였다. 스크린에 띄워지는 출연진들 중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현우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현우는 인기는 많지 않은 케이블 TV 예능 두 개, 가끔 있는 음악 방송, 행사 서너개 정도의 스케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에는 춤 연습과 보컬 트레이닝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리얼 러브 하우스 시리즈를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춤과 예능 모니터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에서 자주 관련된 이야기를 했기에 -거의 9시 뉴스급으로 스몰토크에 많이 사용된 소재였다-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대세인지는 알고 있었다. 

 

여기에 자신이 나가다니. 제작발표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음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큰 파도에 휩쓸린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이 덮쳐 손에 땀이 났다. 더군다나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요즘 핫한 유명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해야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순식간에 부담감이 느껴져 속이 울렁거렸다. 

 

계속 갈증이 났다. 앞에 놓인 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실까. 한창 PD와 기자들의 인터뷰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괜히 물 한 모금 잘못 마셨다가 긴장감에 사레에 걸려 기침하면 어쩌지. 작은 것 하나에도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현우는 그저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받는 조명이지만 오늘따라 더 눈부시고 뜨거웠다. 제 옆에 앉은 형원이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봤는지 책상 위의 생수를 열어 빨대를 꽂아 건넸다. "형, 빨대 꽂았으니 천천히 마셔요." 현우는 지금의 제작발표회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나, 바로 옆에 자꾸 스치는 형원의 팔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였다. 

 

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꾸벅 인사하며 생수를 양손으로 받았다. 건네받은 물을 마시자 애타는 속이 어느 정도 식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손에는 여전히 땀 범벅이라 현우는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도 매번 제작발표회에 올 때면 긴장돼." 제작발표회 직전까지도 말 한마디 없었던 형원의 귓속말에 현우는 잠깐 황당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저도 모르게 맘이 놓였다. 수많은 시상식과 무대 인사를 돌던 대배우도 아직 이런 자리가 어색할 수 있구나.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빨대로 물을 쪼옥 빨아 건조한 목을 축였다.

 

다 같이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제작 발표회 현장을 나오면서도 현우는 그저 프로그램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구남친' 손현우가 아닌 '아이돌' 손현우로서. 근래에 들어서야 조금이나마 빛을 발하는 멤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형원에 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역시 백만점의 남자❤ 매너가 몸에 베여 있어~(포토)]

[우성 알파 채형원과 열성 오메가 손현우, 신선한 커플 케미가 기대 UP!]

[꿀 떨어지는 눈빛, 채형원(포토)]

 

괜히 찾아봤나. 제작발표회의 반응이 어떤지 찾아보기 위해 검색하던 현우는 우르르 쏟아지는 기사들의 제목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성된 기사들의 반은 거의 형원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현우는 피할 새도 없이 눈으로 따라 읽었다. 딴 생각은 하지 말자고 되뇌었던 자기 최면이 통한 건지, 형원의 사진과 기사를 보아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이대로만 하자고 현우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붙들고 빌고 또 빌었다.

 

 

 

 

✻ ✻ ✻

 

 

 

첫 촬영 당일, 현우가 캐리어를 끌고 새로운 숙소로 향했다. 진솔한 가상 연애를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세 커플에게 모두 각각 다른 숙소를 제공했다. 현우가 도착한 숙소는 서울에서 차로 40분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창밖만 멍하니 보던 현우에게 매니저는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매니저가 내려준 곳에는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시간에 맞추어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니저와 현우는 스태프들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이지만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만들기 위해 소수의 제작진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우는 제 앞에 몇 안 되는 제작진에게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를 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현우씨, 캐리어 끌고 가는 것부터 시작할게요. 현우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포장이 되지 않은 자갈밭에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조용한 동네에 울렸다. 

 

"실례합니다."

 

현우가 도착한 숙소는 한옥이었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툇마루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는 형원이 보였다. 형원은 하늘색 린넨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눈을 감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현우는 그 일련의 과정에 지금보다 더 어린 형원의 모습이 흐릿하게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형원은 현우의 캐리어 바퀴가 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현우는 캐리어를 끌며 형원의 옆에 털썩 앉고는 어깨를 콕콕 찍었다. 

 

형원은 흠칫 놀라면서 눈을 떴다. '안녕하세요' 현우의 입 모양이 벙끗대는걸 보며 형원은 그제야 끼고 있던 에어팟을 빼며 허둥지둥 현우에게 인사했다. 죄송해요, 제가, 좀 전에 도착해서, 아, 음악 듣고 있어서 몰랐어요. 현우는 제작발표회 때 본 의젓한 형원의 모습과 다른, 제가 알고 있었던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어 웃어 버렸다. 한껏 어른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긴장한 것은 역시 저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었다. 진정성있는 가상 연애를 위해 최소한의 제작진과 스태프들로 구성되었지만 형원 또한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왔어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시작한 첫 만남은 생각보다 편안한 향기를 품었다.

 

툇마루에서 더 이상의 진전 없이 어색하게 앉아 있는 둘에게 조연출이 현우의 캐리어를 가리켰다. 눈치 빠른 형원이 현우에게 방을 알려주며 짐을 풀고 툇마루에서 다시 보자고 얘기했다. 형원과 현우의 방은 거실을 가운데에 두고 맞은편에 있었다. 방문 앞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현우가 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짙은 색의 원목 마루를 지나 미닫이문을 열었다. 방에는 침대와 협탁, 옷장이 전부였다. 방을 둘러보던 현우는 협탁 위에 놓인 소형 캠코더와 쪽지를 발견했다.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두고 현우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 WELCOME TO REAL LOVE HOUSE ❦

리얼 러브 하우스에 오신 당신께.

당신의 달콤쌉쌀한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캠코더는 당신의 감정 기록장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그리고 잠들기 전에 꼭 마음을 기록해 주세요.

틈틈이 감정을 남겨주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 

당신의 감정이 어디로,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진실한 사랑을 기대할게요.

 

 

현우는 천천히 쪽지를 읽었다. 진실한 사랑을 기대한다니.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줄도 모르는 무심한 한 줄에 현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셀프캠은 이전 시즌들에서 많은 팬들이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아했던 콘텐츠였기 때문에 현우도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아야만 했다. 셀프캠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현우가 카메라 각도를 조정하고, 큼큼거리며 목을 푼 다음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VISTA X의 현우입니다. 저는 지금 막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채형원 배우님의 방 맞은편에 짐을 풀었어요. 아까 처음 딱 마주쳤는데, 음악을 듣고 계셔서 제 소리를 못 들으셨더라구요. 선풍기 바람을 일케, 딱, 맞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기시는데 역시 멋있다? 이런 생각이 쎄게 들었어요. 하하. 맨 첨에 봤을 때는 약간 완벽하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허점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아까 약간 당황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좀 귀여우셨어요. 네, 귀여우시다... 아, 이제 저는 나가서 같이 뭘 해야 할지 찾아 볼게요. 또 올게요.]

 

녹화 버튼을 끄고 현우는 캠코더를 협탁 위에 다시 올려 놓았다. 이건 방송이다. 적당히 연애하는 느낌만 줄 것. 목덜미를 착착 때리며 다시 자기 최면을 걸고, 현우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형원은 여전히 마루에 앉아 있었다. 현우의 발걸음에 맞춰 툇마루 바닥이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현우가 오는 소리를 듣고 형원이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아까, 첫 인사가 너무 이상했던 것 같아서. 다시 인사해요, 우리."

"아, 네."

"안녕하세요, 현우씨. 채형원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손현우입니다."

 

정식으로 인사하자며 내민 형원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오히려 아까의 인사가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딘가 모르게 뻣뻣한 인사였지만, 형원은 마주 잡은 손에서 미미한 바다향을 느낄 수 있었다. 현우가 먼저 손을 풀고, 멋쩍게 웃었다.

 

"형원씨, 혹시 미션지같은거 못 보셨나요?" 

"미션지요?"

"다른 시즌 보니까 첫 회에 미션지가 있더라고요." 

"아, 이번에는 없대요."

"아아..."

 

또 다시 어색한 기류가 둘 사이를 감쌌다. 형원은 사실 오늘 첫 데이트에 뭘 하면 좋을지 생각 중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숙소가 어떤 곳인지 미리 알려주지 않은 탓에, 계획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덧붙여 말했다. 첫 데이트란 말에 현우는 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깐의 정적을 깨며 형원이 일단 같이 집 구경을 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같아서 현우는 좋은 생각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집,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푸슬푸슬 웃는 형원의 뒤를 쫓아 현우도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옥의 구조를 살린 숙소는 전체적으로 단아했고 심플했다. 둘이 지내기에는 충분히 넓게 느껴졌다. 서까래가 노출된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간 현우는 제일 먼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생수 몇 개 들어 있는 게 전부였다. 

 

현우의 등 너머로 형원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미션이 없는 게 아니었구나. 냉장고가 텅 비었네. 우리 집 구경 끝나면 장 보러 갈래요?" 현우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온기에 살짝 놀랐지만 태연한 척 넘어갔다. 미닫이로 된 방문을 열어 각자의 방도 구경했다. 동일한 가구에, 정반대인 배치였다. 호텔식으로 개조된 욕실을 끝으로 형원과 현우는 집 구경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장 보러 갈까요? 형원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장바구니를 손에 집었다. 

 

형원과 현우는 동네 마트까지 걸었다. 길에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나 길을 걷다 마주치는 대부분은 형원을 알아보았다. 게다가 카메라가 따라다니니 시골 마을에서는 더욱 시선 집중이었다. 마트까지 걸어가는 동안 둘은 어떤 것을 장 봐야 할 지 꽤 진지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형원과 현우 둘 다 요리를 잘 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간편 식품 위주로 메뉴를 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해진 메뉴는 저녁엔 볶음밥, 디저트로 복숭아, 다음 날 아침은 프렌치토스트와 시리얼이었다. 형원이 카트를 끌고 현우가 야채와 햇반과 반찬들을 카트에 담았다. 

 

"채형원씨 맞으시죠?" 

"어떡해, 진짜 잘생기셨다~" 

 

몇몇 사람들은 카메라와 스텝들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형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화면에서만 보던 유명인이 눈앞에 있으니 믿기지 않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형원의 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이 다소 시끌벅적 해졌지만 형원은 친절한 미소를 띠며 현우의 어깨를 감싼 채 말했다. 

 

"여러분, 저 지금 애인이랑 장 보러 왔어요. 사인이랑 사진은 이따 시간 내서 꼭 해드릴 테니까 저희 장 빨리 보고 올게요. 괜찮으시죠?" 

"아유, 그럼그럼~" 

"형원씨 이따 꼭 해줘야 해~!" 

 

감싸 쥔 어깨에 시선이 절로 따라가는 현우였다. 형원을 좋아해서, 형원을 보고 싶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바보같이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우는 괜히 그런 팬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죄송합니다, 인사하며 자리를 피했다. 현우는 어깨를 말아 쥔 손과 '애인'이라는 단어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장 보는 것에 집중했다. 형원은 자기가 내뱉은 말이 어떻게 현우를 찌르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어 현우는 뻘쭘 해졌다. 살짝 더운 기운에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돌리니 카메라가 보였다. 아, 그렇지. 지금 촬영 중이지. 현우는 정말로 촬영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간단한 메뉴를 구성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장바구니는 꽤 무거웠다. 형원은 아까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지키느라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우는 그 한 가운데서 만인에게 사랑을 받으며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멋있어 핸드폰을 꺼내 몰래 형원을 찍었다. "아, 뭐예요, 현우씨. 거기서 나 찍는 거예요? 이쪽으로 와요." 형원의 말에 주변에 뭉쳐 있는 팬들이 현우가 형원에게로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형원은 현우를 옆에 두고 같이 사진 찍어 달라고 말했다. 못 본 사이에 형원은 넉살이 늘어 있었다. 찰칵대는 카메라 효과음 속에서 누군가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형원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감사하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현우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두고 누가 들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현우가 들기로 했다. "현우씨는 고집이 정.말. 세네요." 실랑이에서 진 형원이 입술을 삐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둘은 햇반을 데우고 김치와 야채를 썰며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형원이 도마 위의 야채를 다듬었다. 칼을 쥔 긴 손가락에 시선이 멈췄다. 형원은 예전과 똑같이 하나도 늘지 않은, 어설픈 칼질을 하고 있었다. 형원이 가까스로 다듬은 김치와 야채를 넣고 밥을 넣자 프라이팬 안의 볶음밥은 2인분을 훌쩍 넘어 점점 불어났다. 화수분처럼 샘솟는 볶음밥의 양에 둘은 저항 없이 웃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볶음밥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현우는 배가 고팠는지 한 그릇을 더 먹었다. 형원은 볼이 빵빵해진 현우를 보며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도록 웃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어느새 첫날도 늦은 밤이 되었다. 살짝 살얼음이 낀 맥주 캔을 들고 둘은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개구리와 매미 우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우리 말 편하게 하는 거 어때요? ...현우형?" 

 

형원의 둥근 입에서 나오는 옛 호칭이 낯설게 느껴졌다. 현우는 살짝 취기에 취해서인지, 여름 밤과 함께 밀려오는 형원의 향기 때문인지 살짝 몽롱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부터 좋았어요, 저는. 왜, 처음에 만나면 어색하고, 어색한데 잘 해보고 싶고 그렇잖아요. 오늘 제가 딱 그런 마음이었어요. 맨 처음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제대로 첫 인사를 하지 못 한게 너무 아쉬워요. 아니, 그때 왜 계속 노래를 듣고 있어서. (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가 났다.) 긴장 풀려고 노래 듣고 있었던건데, 망했어. 아, 멋있어 보이고 싶었는데. 그렇게 허당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꼭 잘 보이고 싶은 사람한테는 이렇게 된다니까. 다들 그 맘 공감하시죠?]

 

 

 

✻ ✻ ✻

 

 

 

처음 만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현우는 늘 그래왔듯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낯선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 어제 형원과 장을 보고 걸었던 동네 길이라 그런지 조금은 익숙했다. 현우는 보폭을 더 크게 벌려 뛰었다. 뒤에서 현우씨- 하며 현우를 따라나선 불쌍한 카메라맨의 목소리가 들리다 멀어졌다. 약간의 알콜에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 현우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단번에 아른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달렸다. 방송이니까. 방송때문에. 턱 끝으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달아오른 볼을 꾹꾹 누르며 현우는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골랐다.

 

돌아오는 길에 주저 앉아 있는 카메라맨을 일으켜 숙소로 걸어왔다. 함께 숙소로 가는 길에 카메라맨이 현우씨 너무하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현우는 못생긴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너무 민망해서 그랬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카메라맨은 그 마음은 알겠으나 그것 또한 리얼리티의 묘미라며 핀잔을 주었다. 한 번 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현우는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 미열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온 현우는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를 식히기 위해 바로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맥주 두 캔에 이렇게까지 열이 오른 적은 없었다. 주기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현우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파우치 속의 억제제 통을 꺼냈다. 열성이라 일정치 않은 주기였기 때문에 현우는 몸에 조금이라도 열이 난다 싶으면 억제제부터 먹었다. 아마도 계속 무게감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어젯밤에 살짝 풀린 게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타원형의 알약을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약효가 빨리 나타나길 기다리며 현우는 셀프캠을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VISTA X 현우입니다. 얼굴, 많이 안 부었죠? 어제 형원이랑, 참, 어제부터 말 놓기로 했어요. 형원이랑 밤에 맥주 조금 마시고 아침에는 해장하려고 동네 한 바퀴 뛰고 왔어요. 아직 형원이는 자고 있는 것 같아요. 저희 둘다 아무 계획을 못 짜가지구... 보시는데 좀 심심하지 않으실 까요? 오늘은 간단히 밥 먹고 뭘 할까요? 자기 전에 잠깐 찾아봤는데, 근처에 디저트 카페가 있더라구요. 거기 가자고 해볼까요? 오늘 날씨도 좋고 제가 또 달달한 걸 좋아해서... 디저트가 궁금하기도 하구요. 음, 또 올게요.]

 

덜 말린 머리칼을 이리저리 털면서 현우는 셀프캠 녹화를 종료했다. 현우는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집 앞 마당에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 덕에 툇마루는 크고 서늘한 그림자가 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잔잔한 분위기는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기 딱 좋았다. 

 

"혀엉, 일어났어요?"

 

형원이 방에서 반도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현우가 있는 곳으로 왔다. 백만점의 남자는 자고 일어난 모습이 꽤 귀여운 편이었다. 현우형, 저 얼굴 많이 부었어요? 인터뷰하고 나왔는데, 너무 부었으면 안 되는데. 형원이 빵빵해진 동그란 얼굴을 들이미는 통에 현우는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빼었다. 어어, 그래두 잘생겼어. 잠에서 깬 형원은 귀여웠지만, 형원의 단정한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며 뻗친 뒷머리를 슥슥 정리해주었다. 형원은 현우의 옆에 앉아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현우는 어렸을 때 키웠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부드러워. 형원은 눈을 감고 익숙하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형원이 눈을 떠 현우를 바라보았다. 형, 향기가 참 좋다.

 

눈이 마주친 현우는 그 찰나에 형원과 다시 사랑에 빠질 것을 함부로 확신했다.

 

 

 

✻ ✻ ✻

 

 

 

리얼 러브 하우스 1회가 방영되고 현우가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제작발표회 이후부터 틈틈이 자신들의 소셜 채널을 통해 홍보를 해왔던 운동선수 H와 인플루언서 G의 반응이 제일 많았다. 세 커플 중 가장 저조한 반응을 보이는 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할 걸 그랬나. 첫 방부터 형원에게 미안해진 현우였다. 그나마 다행히 형원 덕분에 화제성은 조금이라도 있었다. 댄디해 보이는 형원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반전 매력을 보여준 게 팬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그동안 신비스러웠던 형원의 이미지 너머로 실제 형원의 리얼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현우와 함께 있을 때 보여준 편안한 분위기의 영상 클립이 많이 공유되면서 현우도 덩달아 인지도가 조금 올랐다. 그래도 프로그램 자체의 반응은 좋아서 1회가 방영된 지 하루 만에 MONFLEX의 인기 콘텐츠 TOP 6위를 차지했다. 

 

다음 에피소드는 현우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1회에 나온 H와 G의 달달한 옥상 이벤트가 열띤 반응을 얻자 현우도 이벤트를 준비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번에 개봉하는 형원의 영화 시사회에 깜짝 등장으로 축하와 응원을 해주는, 어쩌면 싱거울지도 모를 이벤트였다. 현우는 매니저를 통해 형원의 소속사와 제작진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고 형원이 초대한 영화 시사회에 스케줄을 핑계 삼아 거절해야만 했다. 형, 다른 날에도 안 돼요? 라고 묻는 기대감에 찬 형원에게 현우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송을 위해 컴백 시기라 일정 조율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시사회날, 형원은 현우가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운지 관객석 쪽을 두리번거렸다. 영화 속 형원이 맡은 캐릭터 소개를 하고, 관객들의 요청에 하트를 몇 번 만들며 재밌게 봐달라는 이야기로 끝인사를 맺었다. 감독과 출연 배우들이 함께 인사를 마치고 나자 영화관 입구 쪽에서 현우가 서툰 솜씨로 만든 자신의 키 만한 꽃다발을 들고 형원을 향해 걸어왔다. 형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현우와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우리 형원이 영화 재밌게 봐주시고 입소문도 꼭 내주세요. 관객들을 향해 예쁜 말을 하는 현우가 반가워 형원은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둘 사이에 살짝 눌린 꽃다발에서 꽃잎이 몇 개 바닥에 떨어졌다. 어, 꽃다발, 꽃다발. 이거 직접 내가 만든 건데. 형원은 점보 사이즈의 꽃다발을 받아들고 꽃다발과 현우를 번갈아 보았다. 형이 직접 만들었다고요? 앞치마를 허리춤에 걸치고 제 손바닥보다 작은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다듬으며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형원은 함박웃음이 절로 났다. 

 

와 줘서 고마워, 현우형. 나 꼭 한번 형 초대하고 싶었거든. 현우의 목을 끌어안은 채, 현우에게만 들릴만한 작은 목소리로 형원이 귀에 속삭였다. 현우의 심장이 열렬히 뛰었다. 그날의 무대인사는 많은 사람들이 형원과 현우의 달달한 모습에 질투 아닌 질투를 하며 끝이 났다. 형원은 그날 '백만점의 남자'에 이어 '채햇살'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다음 에피소드에는 현우와 형원의 커플 화보 촬영 스토리가 담겼다. 똑똑. 대기실 문을 두드렸지만 분주한 안에서는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형원은 대기실 문을 빼꼼 열고 들어갔다. "현우형." 하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분주했던 대기실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집중되었다. "어이쿠, 그렇게들 보시면 부담스러워요." 형원은 양손 가득한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현우가 컴백 준비와 함께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 관리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형원은 숙소에서 새우 샐러드 도시락을 싸 왔다고 했다. 아직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지 않은 현우는 의자에 앉아 거울 너머로 형원과 눈인사를 했다. 스태프분들 것도 있으니 드시고 하라며 생긋 웃는 형원의 미소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밖에 커피차도 있어요. 오늘 제가 현우형 외조 팍팍 하려고요. 많이들 드세요. 형원은 '국민연하남'으로 등극해 또 한 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몇몇은 커피차로, 몇몇은 샐러드와 간식으로 정신이 없었다. 현우의 머리를 만져주던 헤어 디자이너도 끼고 싶은 눈치인 듯해서 현우가 먼저 잠깐 쉬었다 해도 되는지 물었다. 헤어 디자이너 누나가 빨리 먹고 빨리해준다며 서둘러 머리에 핀을 꽂은 채로 현우도 일어섰다. 형원의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해 현우는 사람이 조금 빠지길 기다리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형원은 군중 사이로 손을 뻗어 현우의 팔을 잡으려 애썼다. 현우형. 거기서 뭐 해. 이쪽에 와서 앉아요. 순간 현우는 사람들 틈새로 불쑥 튀어나온 형원의 손을 잡았다.

 

형원은 제 손만큼이나 컸다. 따뜻한 건지 뜨거운 건지 아니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는 건지. 현우는 잡은 손의 온도를 체감하고 있었다. '현우씨는 오메가 답지 않게 손이 크네.' 예전에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의 MC의 가벼운 농담이 스쳐 지나갔다. 형원의 손에 딱 맞는 자신의 손을 보며 현우는 손을 빼기 위해 움찔거렸다. 

 

그러나 형원과 현우가 붙어 있는 그림을 만들려고 카메라맨이 형원에게 손짓을 하는 걸 보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시청자들은 이런 장면에 열광할 것이 분명했다. 촬영임을 잠시 잊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현우는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감정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 현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원은 현우를 끌어당겨 옆에 앉히고는 손받침까지 하며 샐러드를 떠서 먹여 주었다. 쑥스럽지만 형원이 이렇게까지 열심히인데 자신이 내빼서는 안 될 일이었다. 

 

포크에 얹혀진 샐러드를 한입에 넣으니 볼 안에 가득 찼다. 아삭아삭한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고 삼키는데 빤히 쳐다보는 형원때문에 현우는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형원의 긴 손가락이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우형, 뭘 이렇게 묻히고 먹어요. 현우는 자신의 볼에 붙은 작은 풀 조각을 떼어 제 입으로 넣는 형원을 멍하니 쳐다봤다. 딸꾹. 샐러드 급하게 먹어도 체하나? 물 줄까요? 딸꾹. 빨대를 꽂은 생수를 건네는 형원의 손등만 바라보았다. 딸꾹.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물을 몇 모금 넘겨도 딸꾹질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간식 타임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화보 촬영에 임한 형원은 조금 어려운 점이 있었다. 매혹적인 커플 패션 화보의 분위기를 잡아야 하는데 현우와 가까이 붙을 때마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화이트 셔츠의 형원과 블랙 민소매를 입은 현우의 묘한 케미를 한껏 발산시키기 위해 세트장에 끈적이는 팝송도 틀어 놨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단독 촬영일 때는 잘만 분위기를 잡던 형원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현우와 같이 찍을 때는 무표정이 3초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포즈를 잡느라 형원의 몸에 살짝 닿게 될 때마다 푸핫, 하며 웃는 통에 오히려 현우는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가보겠습니다. 형원아. 왜 그래, 진짜."

 

형원의 어깨를 밀치며 다시 포즈를 취해보는 현우에게 감독이 마주 보지 말고 차라리 등을 맞대어 찍자고 제안했다. 형원과 현우는 바닥에 앉은 채 등을 돌리고 앉았다. 전보다 너른 등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감독이 뒤로 젖힌 고개를 살짝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는 자세를 요청했다. 포즈를 조금씩 바꿀 때마다 형원은 바닥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커플 화보는 처음이라 긴장했는지 현우에게서 향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현우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아주 미미한 향이었지만 우성 알파인 형원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 요청에 다른 포즈로 바꾸기 위해 바닥을 짚은 형원의 손등 위로 현우의 손가락이 가볍게 스쳤다. 형원은 움찔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형원씨 지금 눈빛 좋다. 지금 자세 좋고. 그치. 손은 잡지 말고 손가락이 얽히고설키듯이. 좋아."

 

감독은 형원에게 현우를 더 가까이 붙였다. 고개를 조금만 더 돌리면 깊게 파인 넥라인에 쇄골이 도드라진 현우가 있었다. 감독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이것저것 더 요구해왔다. 형원은 자신의 시선이 곧게 뻗은 쇄골에 머무르지 않도록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 웃음이 헤펐던 형원은 순식간에 감독이 원하는 느낌에 몰입했다. 현우도 그에 맞춰 곧잘 따라와 촬영은 제 시간 내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역시 채배우야. 다 함께 프리뷰를 보고 있던 와중에 감독이 형원을 향해 엄지를 들었다. 현우는 모니터 화면에 나온 사진을 살펴보느라 집중하고 있었다. 뭔갈 집중할 때면 항상 도톰한 아랫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 다 현우형 덕분이죠. 형원은 자신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지만, 티 나게 벌게진 현우의 목덜미를 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리얼 러브 하우스 회차를 더해갈수록 다행히 형원과 현우에 대한 반응도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동안 형원이 SNS에 현우의 컴백과 화보 촬영 사진을 올려준 것도 한몫을 했다. 형원은 방송 촬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우의 컴백 주간 틈틈이 영양제나 간식 같은 걸 보내기도 했다. 방송용으로 쓰는 스마트폰이 아닌 개인폰으로는 형원으로부터 매일같이 연락이 왔다. 쌓여가는 문자 메시지들은 스무살의 손현우와 열아홉의 채형원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풋내가 물씬 나는 어린 시절의 연애가 계속 선명해졌다. 현우는 촬영 첫날 형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형원과 처음, 그러니까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던 순간의 눈빛과 변함이 없었다. 과거의 감정이 확실히 피어나기 전에, 현우는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문자보다 전화를 더 선호하는 현우였지만 지금 형원의 목소리를 들으면 일렁이는 감정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형원아 미안한데 이제 이 번호로 연락하지 마.

우리 얼마 안 남은 방송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

그동안 신경 많이 써줘서 고마웠어. 

 

고심 끝에 보낸 문장이 전송되자마자 형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몇차례 더 형원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현우는 꼿꼿이 화면만 노려보며 끝끝내 받지 않았다. 잘근잘근 깨물린 검지 손톱은 끝이 삐뚤빼뚤하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마지막 전화를 끝으로 형원에게서 더는 전화를 걸려오지 않았다. 

 

형, 미안한데 이 번호로 난 계속 연락할 거야.

근데 당분간 연락은 자제할게. 형 불편해하는 거 같으니까.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형 잊은 적 없고 여전히 형 좋아해.

 

현우는 대체 어떻게 답장을 해야 형원을 단념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형원은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는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형이 좋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열아홉의 순애는 어째서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지 현우는 슬퍼졌다. 

 

형은 나한테 연락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해도 돼.

나 또 형 없어서 잠을 늦게 자. 

 

형원은 잠이 많았으면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안경 너머로 퉁퉁 부은 눈을 볼 때면 현우는 일찍 일찍 자라며 타박했지만 넘쳐흐르는 생각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현우가 본격적인 연습생 생활을 위해 자취를 시작하고 형원도 함께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좁은 매트리스에 현우의 옆에 누워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면 형원도 금방 잠에 들었다. 

현우의 곁에서는 이상하게도 그 많던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현우의 옆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 늘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그러다 같이 지낸 지 일 년. 현우의 고이 잠든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살짝 벌려진 입술을 맞대어도 보다가, 돌려진 등위의 날개뼈를 만져 보며 제 향을 묻히다가. 그렇게 좁디좁은 싱글 매트리스에서 꼭 껴안았다. 그러면 형원은 혼자 잠 못 드는 어느 새벽보다 훨씬 이른 밤에도 쉬이 잠들 수 있었다.

 

현우는 형원이 보낸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형이 없어서 잠을 늦게 잔다는 한 문장은 형원과 함께 지냈던 무수히 많은 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다짐했던 마음은 기억을 더듬어가는 밤에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현우는 마지막 밤, 형원에게서 도망쳤다. 

 

형원아, 우리 이제 그만하자. 미처 다 치지 못한 커튼 틈 사이로 오렌지색의 가로등 불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그날은 형원이 11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된 날이었다. 형, 나 주인공 됐어. 원톱 주연이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해맑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형원을 향해 현우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 헤어짐을 고했다. 왜 그러냐며 어깨를 붙드는 형원을 밀치며 현우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현우씨, 우리 형원이 영화 주연 됐어요. 연기도 잘하고 마스크도 좋아서 형원이 이제 뜰 일만 남았어요. 저희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고요. 형원이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거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현우씨 알죠? 현우씨도 연습생하는거, 더 집중해서 해야되지 않겠어요? 스물인데도 데뷔를 못한 거면 좀 힘들지 않을까.

 

현우는 형원의 소속사에서 미리 연락 받았던 내용을 곱씹었다. 형원과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말한 바가 맞는 길임을 바라며.

 

 

 

 

✻ ✻ ✻

 

 

 

 

프로그램은 2회 정도 남긴 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프로그램은 대세였고, 팬들은 방송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도 그들의 연애를 보는 것을 바랬다. 그래서 형원과 현우의 소속사에서는 숙소에 촬영일 하루 먼저 도착해 A LIVE 하는 것을 기획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시청자들의 호감을 살 것이 분명했다. 연락하지 말란 문자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해오던 형원을 실제로 보자니 현우는 속이 심란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긴 여정의 유종의 미를 위해 현우는 쓸데없고 복잡한 감정을 모두 감내해야만 했다. 

 

정해진 날짜에 숙소에 도착한 형원과 현우는 매니저들이 알려준 대로 촬영용 스마트폰과 거치대를 세팅했다. 숙소에는 스텝도, 매니저도 아무도 없이 단둘뿐이었다. 매번 함께 하던 매니저들은 온데간데없이 저희만 남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니 현우는 방송에 어색한 분위기가 풀리지 않고 그대로 방송될까 걱정이 되었다. 더군다나 형원은 현우가 어떤 곳이 더 나을지 장소를 찾아보는 곳마다 따라왔다. 

 

"현우형, 그때 문자 읽은 거 맞지?"

"형원아, 우리 어디서 찍을까?"

"나 형 여전히 좋아해. 형도 나 못 잊었잖아."

"그냥 툇마루에서 찍자. 여기가 제일 낫다."

 

형원과 현우는 서로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툇마루에 자리 잡았다. 거실은 조명이, 주방은 배경이 별로였다. 툇마루의 불빛은 은은하게 빛났다. 형원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현우는 침착하게 방송 준비를 했다. 형원과 마주 보지 않을 가까운 미래를 위해 현우는 애쓰는 중이었다. 구구절절 사랑을 고백하던 형원도 몇 분 후에 있을 라이브 방송에 집중하기로 했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팬들에게 공지했던 시간이 다가와 서둘러 세팅을 마무리하고 시작할 준비를 했다. 금요일 밤 10시, 라이브 버튼이 눌렸다. 

 

"지금 켜진 거에요?"

"네에, 지금 라이브 되고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1분 정도 있다가 인사할까?"

"네, A LIVE는 처음이라 좀 떨려요."

"나도 할 때마다 떨려. 지금도 어색해."

 

시간이 지나자 시청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댓글창은 너무 빠른 속도로 형원과 현우의 이름과 하트로 도배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채형원입니다. 불금에 괜히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죄송하네요."

"리얼 러브 하우스 촬영은 내일부터인데 오늘 미리 와서 한번 켜봤어요. 어때요, 여러분?"

 

팬들의 육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댓글은 폭발적으로 로딩되었다. 시작 직전까지도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형원과 현우는 수없이 올라오는 댓글을 읽기 위해 모니터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댓글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너무 빨라서 못 읽겠어요, 형."

"어어, 나두. "

"댓글은 나중에 읽을까요? 지금 하나도 안 보여가지구. 이제 무슨 얘기하지?"

"촬영 비하인드나 찍으면서 재밌었던 에피소드? 그런거 팬분들이 궁금해 하시는거 같더라구."

"비하인드? 비하인드으으? 뭐가 있지." 

 

결국 댓글 보는 것은 포기하고 비하인드라고 할만한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형원이 먼저 입을 뗐다. 이거 진짜 비하인드인데. 형원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현우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현우는 저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형원이 저렇게 웃고 있을 때는 사고를 쳤거나, 사고를 치기 전이었다. 현우는 형원의 어깨를 잡았고 제발 라이브 방송에서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형원은 현우를 보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진짜 진짜 여러분만 알고 계세요. 현우형이랑 저. 저희 원래 알던 사이에요."

 

형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음표가 수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현우가 예상했던 -솔직히 사귀었다고 말할 줄 알았다- 내용은 아니라 다행이었으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건 아닐까 현우는 걱정되었다. 형원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현우를 본체만체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고, 현우형이 댄스부 동아리였거든요. 축제 때 형이 공연을 하는데, 춤을 너무 잘 추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춤 잘 추는 법을 알려달라고 형 쫓아다니고 그랬죠. 저는 현우형이 원래 춤을 잘 추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타고난 사람들. 근데 형은 잘 추기도 했지만 진짜 연습을 많이 하더라구요. 노력형이었어요, 현우형. 저는 그렇게까지 못 하겠어서 나중엔 현우형 춤 추는 거 구경만 했죠."

 

느릿하게 이어지는 형원의 목소리는 늦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게 없었거든요. 학교 다니라니까 다니고. 공부하라니까 하는 그런 학생이었어요. 세상이 다 무미건조한. 아핫, 네. 약간 중2병이 늦게 왔었나봐요. 하루는 현우형이 춤 연습하는걸 보는데, 무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은 다 저렇게 예쁜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게 저한테는 연기였어요. 잘 해보고 싶고, 열심히 해보고 싶더라구요. 운 좋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이렇게 컸네요." 

 

현우는 형원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춤을 배우겠다며 쫓아다니던 후배가 어느 날 갑자기 연기를 배워서 자주 못 온다고 큰 눈에 속상함이 가득했던 것만을 기억했다. 형원은 처음에 비해 차분해진 분위기를 미안해하며, 댓글을 읽어보겠다고 화제를 돌렸다. 

 

[와 선후배사이 대박ㅋㅋㅋㅋㅋ]

[이거 약간 첫사랑 재질?]

[둘이 진짜 사겼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얘들아]

[형원아 나중에 현우오빠랑 댄스커버해줘]

[현우 또 귀빨개진다]

 

형, 당황했어요? 왜 이렇게 빨개졌지? 올라오는 댓글을 읽은 형원이 현우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팬들은 그저 장난일 뿐이겠지만 저들이 던지는 작은 댓글 하나하나는 자꾸만 현우의 마음에 던져져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팬들과 형원이 똘똘 뭉쳐 귀가 빨개진 현우를 한 마음으로 놀려 댔다. 현우는 재빨리 지금 상황과 관계없는, 분위기를 쇄신할만한 댓글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오빠들 지금 숙소 온라인 집들이 해주세요]

"아! 누가 온라인 집들이를 해달라고 하셨는데요. 방 공개 괜찮아?" 

"아이, 당연하죠. 집 공개할 때 필수로 하는 노래 알죠? 너무 라떼인가?"

 

현우가 앞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은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곧이어 형원의 뒤모습이 보였다. 형원은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현우가 들고 있는 거치대를 대신 잡았다. 현우는 형원의 살짝 긴 뒷 머리카락이 셔츠에 닿는 것에 눈을 두고 있었던 것을 들킨 줄 알고 움찔했다. 형, 저만 찍으면 어떡해요. 형도 얼굴 나와야지. 각도를 다시 조정한 스마트폰 화면에는 형원과 현우의 웃는 얼굴이 한가득이었다. 

 

집 소개를 해본 적이 없어서. 뭘 보여 드려야 할 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볼게요. 방송에서 이미 많이 보셨겠지만, 그래도 저희 따라서 한번 가보실까요? 여기는 거실. 여기 축구 게임이 있더라구요. 저희 여기서 가끔 축구 게임도 하고요. 다음에는 어디 보여드릴까요, 형? 음, 주방으로 가자. 갑시다, 주방. 여기는 기억나시죠? 네에, 화수분처럼 불어났던 볶음밥 만들던 곳이죠. 형원과 현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맛있긴 했는데 양이 많아서 나도 먹느라 힘들었어요. 관자놀이를 긁적이는 현우를 보며 형원은 한 번 더 웃었다. 이제 저랑 현우형 방이 남았는데, 누구 방을 먼저 가볼까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방의 좁은 복도에서 덩치 큰 어른 둘은 누구의 방을 먼저 들어갈지 두리번거렸다. 

 

현우가 먼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제 방은 뭐, 딱히 볼게 없긴 해요. 형원은 현우의 방에 들어가서 한 바퀴를 돌고 나왔다. 원래의 방에 캐리어 가방, 협탁 위에 스킨로션과 가습기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는 제 방인데요. 현우형 방이랑 구조만 반대고 가구는 똑같아요. 형원이 문을 열자 현우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미미했지만 형원의 알파향이 묻어 나왔다. 형원은 그것을 눈치채고 방에서 아저씨 냄새가 난다며 웃음으로 무마했지만 형원의 향이 좋다며 너무도 솔직하게 답하는 현우의 귀는 또다시 새빨개져 있었다. 촬영 기간 내내 형원이 체향 갈무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현우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진한 숲속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으니까 좋네. 혼잣말로 사고 친 줄도 모르고 웃고 있는 현우를 보며 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어어? 당황하는 둘의 모습에 댓글창은 물음표와 불 이모지로 가득했다. 

 

형원과 현우는 간단한 룸투어를 정신없이 마무리 짓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직도 귀끝이 발간 현우의 모습을 보고 팬들이 댓글로 놀려대기 시작했다. 난리가 난 댓글창을 보던 형원도 웃음이 터져 현우의 귀끝을 만지며 덩달아 같이 놀렸다. 형원의 손가락이 닿자 더 빨개지는 현우의 귀에 댓글창이 난장이 되었다. 

 

아, 애정행각은 안 보는 데서 하라고요? 너무 웃기다. 원래 이렇게 재밌어요, 팬분들? 빠른 댓글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던 형원은 그새 익숙해졌는지 올라가는 댓글 중 몇몇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을 회상하던 둘은 1시간만 하기로 예정되었던 것을 훌쩍 넘어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현우를 오래 봐 왔던 팬들은 현우의 편해 보이는 모습과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모습을 보며 가상으로만 그치지 않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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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in] 국민연하남 채형원, 1년째 교제 중? 다정한 한강데이트 목격!

[단독] 백만점의 남자 채형원 ❤핑크빛 연애무드... 상대는 누구? 

[HOT이슈] '진짜 연애중?' 리얼 러브 하우스 채형원 한강데이트 단독 입수!

 

마지막 회차를 남겨둔 리얼 러브 하우스 촬영 중, 형원이 긴급히 전화를 받았다. 소속사 대표였다. 온라인상에 형원의 스캔들이 퍼지고 있다며 직원들과 함께 프로그램 촬영 숙소로 가겠다는 연락이었다. 형원은 이렇게까지 다급한 대표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숙소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형원의 매니저가 죄송하다며, 촬영을 잠시 접어야 할 것 같다고 알렸다. 죄송합니다. 말하는 형원의 얼굴은 살짝 굳어 있었다. 현우는 형원이 짓는 그 표정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수군거리는 스태프들을 보니 이미 그들도 형원의 스캔들을 확인한 듯했다. 

 

1회를 남겨두고 터진 형원의 열애설은 프로그램에 크게 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 목전인 제작진과 출연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가상 연애 관찰 프로그램인 만큼 시청자들의 몰입을 돋우는 것이 중요했기에, 형원은 다시 한번 스텝들을 찾아가 일일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현우에게도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네서, 현우는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듣는 저 자신이 미안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형원아, 괜찮아. 대표님 오신다니까 차분히 얘기하고..."

"하. 현우형. 나때문에 진짜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에 형원이 실제로 자신이 아닌 타인과 연애 중이었을 수도 있지-의 일말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되새긴 것 같아서 현우는 조금 마음이 쓰렸다. 교외에 있어 조용했던 동네에 벌써 기자들이 도착했는지 대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제작진들이 혹시 몰라 형원에게 방에 들어가 있는 게 좋겠다며 살살 달래어 들여보냈다. 촬영지까지 침범해 우글우글 떠드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열애 소식도, 괜찮다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현우에게도 화가 나 형원은 향을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였다. 방에는 온통 시더우드향이 퍼졌다. 숲의 향기가 난다며 좋아했던 현우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바로 곁에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날카로운 향이 방안의 밀도를 높여 형원의 살갗에도 따가움이 느껴졌다. 우선 형원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어떤 기사들이 났는지 직접 확인했다. 대충 제목만 훑어보아도 누구인지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 두는 편이 좋았다.

 

'...리얼 러브 하우스에 출연 중인 국민연하남 배우 채형원의 한강 데이트가 목격되었다. 상대는 OO기업 대표의 우성 오메가 아들로 현재 1년째 열애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까지 읽고 형원은 바로 자신과의 열애설이 난 주인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에게 고백했던 재벌 2세의 맹랑한 우성 오메가는 고백을 거절당하고 친구로 지내자며 쿨한 모습으로 친분을 이어오더니 결국 이렇게 뒤통수를 쳤다. 기사 봤어? 형원은 발랄하게 묻는 목소리에 소리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현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았다. 너, 지금 이거 뭐 하는 거야. 으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알파향이 전해지기라도 한듯 상대방이 움찔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기사 다 사실이잖아. 너 내 전화 받고 한강에 온 것도. 연애한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너, 이거 선 넘었어."

"채형원, 너 어디 가서 나 같은 사람 못 만나."

"난 이미 예전에 만났어. 너보다 훨씬 좋은 사람."

"누구? 손현운가, 걔? 걔 별거 없잖아. 열성에, 뭐 엄청 유명하지도 않고."

"네 입에서 그렇게 나올 사람 아니야. 기사 내리던가, 정정기사 내."

 

너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손현우도 너랑 같은 마음일까? 언제적 연애 놀음 갖고 아직도 난리야? 사랑도 하고 더 높게 올려 줄 수도 있는데, 난 왜 안 되는데! 형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에 질린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끊는다. 너 기사 안 내리면 나도 가만 안 있어. 손현우 건드려도 가만 안 있어. 울고 불며 형원의 이름을 외쳐 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포털 사이트에 메인에 자신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보면서 형원은 쓴 웃음을 지었다. 현우형도 이거 봤겠지. 제대로 된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인 기분이었다.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던 형원은 이런 인터넷 논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현우에게 빨리 솔직하게 말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원아! 짧은 외침과 함께 방문을 열고 소속사 대표가 뛰어 들어왔다. 창문 좀 열자, 인마. 질식할 것 같다. 알파인 소속사 대표가 코를 틀어 막으며 창문을 열었다. 

 

대표님, 어떻게 해야 돼요? 차가운 분노가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듯했다. 서늘한 안광을 내뿜는 형원의 등을 툭툭 쳤다. 형원아. 사실대로 말해줘. 너 그 열애설에 난 애랑 진짜 사귀는 거야? 아뇨, 걔 혼자 저 좋아하는 거예요. 고백한 거 거절했는데 친구로 지내자고 해서, 그냥 친구로 지냈던 것 뿐이에요. 정색을 하고 쳐다보는 눈빛에 대표는 기사의 사실 여부를 확실히 파악했다. 

 

"일단 공식 반박 기사 내고, 보아하니 그쪽에서 다 섭외해서 기사 낸 것 같더라."

"아마 그렇게 해야 잠깐이라도 자기한테 갈 줄 알았을 거예요, 걔 성격상."

"대비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둘게. 분위기도 이래서... 오늘 촬영은 이만 접는 게 좋지 않을까?"

"대표님. 저한테 빚진 거 있으시잖아요."

 

그거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드릴 게요. 형원의 마지막 말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대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우와 헤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앞의 대표라는 사실을 형원은 오래전에 알았다. 

 

형원이 첫 데뷔작 현장에서 갑작스러운 러트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데리러 갔을 때였다. 억제제를 먹기에는 이미 러트가 시작되어 소용이 없었다. 대표가 오메가를 부르겠다 했지만, 다른 오메가는 필요 없다며 혼자 앓고 버티는 형원이 안타깝고 속상해 이럴 줄 알았으면 현우 그냥 네 옆에 둘 걸 그랬다는 한숨 섞인 한마디는, 지금껏 형원이 쥐고 있는 대표의 목줄이었다. 

 

자신을 위해 헤어져 달라는 한마디에 가버린 현우가 미웠지만 형원은 현우가 내린 선택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너를 위한다는 말은 너무도 자기 희생적이었지만 이면에는 넘쳐흐르는 애정이 있었다. 형원은 현우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 영화, 드라마, 광고 등 모든 작품은 제 손으로 골랐다. 형원이 원하는 대로 대표는 최대한 밀어주었다. 그렇게 형원은 지금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올라섰다.

 

형원의 요청에 마지막 촬영이 재개되었다. 맥주 몇 캔을 툇마루에 놓고 형원과 현우는 잎사귀를 길게 늘어트린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형원의 부탁에 따라 스텝들은 없었지만 맞은편의 카메라는 여전히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일은 미안해요, 형."

 

현우는 그저 형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형원은 오늘 있었던 스캔들의 전말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대중들에게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기사로 오해를 풀 수 있겠지만, 현우에게는 모든 것을 빠지지 않고 말해주고 싶었다. 현우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왜 그 사람의 고백을 거절했냐고 물었다. 형원은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서요."

 

 

 

 

✻ ✻ ✻

 

 

 

 

리얼 러브 하우스 종방연에 모든 출연진과 제작진이 모였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방영되자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와 MONFLEX의 인기 콘텐츠 TOP 1위를 기록했다. 형원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본 시청자들은 형원과 현우 커플에 대해 더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모델 D와 쉐프 J가 커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목이 형원과 현우에게 향했다. 마지막 회차에 의미심장하게 끝나버린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두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비밀로 남겨둬야 나중에 외전으로 또 나올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형원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넘칠 듯 찰랑이는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원샷! 원샷!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 현우와 형원의 시선이 교차했다.

 

사람들이 따라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잔, 두잔 얻어 마시다 보니 얼큰하게 취해 버린 현우는 잠깐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오늘은 쉽게 취기가 올랐다. 걸을 때 마다 어지러운 게 생각보다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현우는 가게의 옆 골목 담벼락을 등지고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목 뒤를 스치는 바람이 꽤 서늘했다. 벌써 가을이 오려나. 계절이 바뀌는 건 밤에 부는 바람 냄새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현우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뜨거운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낮은 시야에 검은 스니커즈가 눈에 들어왔다. 

 

형, 술 많이 마셨어요? 현우의 옆에 똑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은 형원이 현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나나 우유 먹으면 좀 낫다며. 이거 먹어 봐요. 건네진 작고 뚱뚱한 바나나우유를 한 손에 쥐었다. 더는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았던 속이었지만 달큰한 향이 현우의 코를 자극했기 때문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댔다. 처음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시고 들어왔을 때 형원이 사다 주었을 때부터 현우는 술에 취하면 항상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쪼롭. 현우가 마실 때마다 형원이 찬찬히 등을 쓸어내렸다. 

 

천천히 마셔요. 바나나 우유 덕에 갈피를 못 잡던 정신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형원이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좋아 현우는 얼마 남지 않은 작은 우유를 아주 천천히 마셨다. 형, 고생 많았어요. 형원의 짧은 한마디에도 여전히 현우는 큰 위안을 얻었다. 형원아, 너도. 너도 고생 많았어.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린 현우의 말이 형원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뭐라구요? 한 번 더 묻는 형원을 향해 고개를 들어 너도 고생해따구! 혀가 풀려 새는 발음으로 외치는 현우때문에 형원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활짝 웃는 형원의 모습은 자신이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현우는 지금 밤 11시 59분 59초에 놓인 신데렐라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현우는 즐겁게 웃고 있는 형원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익숙하고 그리웠던 입맞춤이었다. 

 

"현우야, 거기 있어? 우리 대표님 가신대. 잠깐 인사드려." 

 

현우를 찾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현우는 입술을 떼고 바로 일어섰다. 현우를 올려다보는 형원의 시선을 피하며 벽을 짚고 걸었다. 휘청이는 다리에 정신을 집중한 채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 발자국 내딛는 것에도 안간힘을 썼다. 뒤에서 형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경 많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어, 현우씨가 고생 많았지 뭘. VISTA X 다음 활동도 잘 해보자고~"

"네넵.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대표를 매니저와 함께 부축해 차에 태웠다. 대리 기사에게 잘 부탁드린다며 매니저가 팁을 더 얹어 주고, 현우는 인사불성인 대표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대표를 싣고 출발하는 차를 보면서 현우도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니저에게 몸이 안 좋아 집에 가겠다고 말한 뒤,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지금 형원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다. 

 

 

 

 

✻ ✻ ✻

 

 

 

 

첫사랑에게 고백받고, 종방연에서 키스하고. 어색하게 도망친 이후 형원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가끔 보내던 메시지도 그날 이후로는 오지 않았다. 현우는 종방연 날짜에 멈춰 있는 대화창을 보며 차라리 안심했다. 술주정이라 생각하고 어이없는 일을 겪은 것처럼 잊고 지나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반응이 좋았던 프로그램 답게 출연진들 모두가 함께 만나 인터뷰 촬영을 하는 스케줄이 잡혀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현우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번 촬영은 MONFLEX 리얼 러브 하우스 시즌 3 Q&A 편으로 제주에서 찍기로 되어 있었다. 출연진들 전원에게 사전 질문을 SNS를 통해 받고 해당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현우는 스케줄이 일찍 끝나 전달받은 시간보다 더 일찍 제주에 도착했다. 촬영 현장에 도착하니 운동선수 H와 인플루언서 G가 인터뷰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형원과 현우는 이 커플의 다음 순서였다. 현우는 미리 준비를 마치고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멤버가 재밌다고 추천한 게임으로 초조함을 달랬다. 다가오는 촬영 시간에 차라리 지금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않길 바랬다. 

 

"형원씨 왜 안 오지? 원래 시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데."

"뭔 일 있는 거 아니야? 빨리 연락해 봐봐."

 

촬영 시간이 30분이나 지나도 형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정이 틀어진 탓에 형원과 현우는 마지막에 찍고 실제 커플이 된 모델 D와 쉐프 J를 먼저 촬영하는 것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현우는 대기실에 가는 길에 형원의 매니저와 통화 중인 작가와 마주쳤다. 교통사고요? 교통사고 크게 난 거에요? 형원씨는요?  현우는 대기실 문에 붙어 작가의 통화를 엿들었다. 아니, 그래도. 촬영은 내일 해도 되니까 오늘은 푹 쉬세요. 에휴. 네, 그럼 알겠어요. 많이 다친 건지, 어디를 다친 건지 알 수 없는 내용에 현우는 초조해졌다. 천지재변으로 비행기가 뜨지 말아 달라고 했지, 교통사고가 나서 오지 말아 달라고 빈 적은 없었다. 

 

1시간 후에 형원과 매니저가 도착했다. 형원은 오른쪽 어깨에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형원을 기다리다 스튜디오를 정리하던 제작진은 형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정리를 멈추고 형원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형원은 늦어서 죄송하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형원의 매니저는 양손에 들고 온 커피 캐리어를 내려 놓았다. 현우는 형원의 뒤에서 서성이며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망설였다. 

 

"교통사고 크게 난 거 아니고, 뒤에서 살짝 박아서 괜찮아요."

"근데 형원씨 팔에 보호대 했잖아~ 병원에서는 뭐래?"

"어디 금 가거나 부러진 데는 없어서 괜찮아요. 내일 물리치료 받으려고요."

"그럼 오늘 인터뷰 너무 길지 않게 할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랜만이에요, 현우형."

"그럼 커피 마시고 촬영할게요."

 

형원이 먼저 현우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인터뷰 의자에 앉았다. 현우도 커피를 들고 형원의 옆에 앉았다. 형원에게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스텝들도 정리하던 장비들을 다시 풀며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형원이 촬영 시작 전 목을 좌우로 돌렸다. 현우는 간단한 스트레칭에도 걱정이 되어 괜찮냐고 물었다. 형원은 살짝 뻐근해서 그렇다고 달랬지만, 현우의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진짜 뒤에서 살짝 박았어. 내일 병원 가서 물리치료 받을게. 형,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지금 촬영해야 되니까 울상 짓지 말고요. 못난이 쿼카같아. 현우는 자신의 양 볼을 주욱 잡아 늘이는 형원때문에 가까스로 울지 않을 수 있었다. 

 

 

Q. 오랜만이다. 다들 잘 지냈는지?

형원: 잘 지내고 있었죠. 오늘 경미한 교통사고만 빼면. 크게 다친 건 아니니 염려 마세요.

현우: 오랜만이에요. 리얼 러브 하우스 덕분에 바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Q. 리얼 러브 하우스를 찍으면서 상대방에게 진짜 반한 적이 있는가?

형원: 물론. 현우형을 옆에서 조금이라도 지켜봤다면 반하지 않을 리가 없죠. (스텝들 야유) 하하. 근데 진짠데. 현우형은 참 열심히 해요, 뭐든지.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근데 그게 티가 잘 안 나서 그렇지. 어쩌면 형이 티를 내기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반했어요, 제가. (스텝들 또다시 야유) 아니 물어봐 놓고 왜 이래, 다들.

현우: 형원이는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어요. 잘생기고 착하고.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한… (형도 나한테 반했는지 물어봐 주세요.) 형원인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 배울 점도 많아요.

 

 

Q. 서로 향 맡아 본 적 있는지?

형원: (형원이 눈을 흘겼다) 이거 약간 수위 있는, 그런 거 노린 질문인 것 같은데. 맞죠? 맡아본 적 있어요.

현우: A LIVE에서 룸투어할 때. 형원이의 방문을 열었을 때 아주 살짝 났어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형원: 다 방송에 나온 건데 왜 다들 쑥스러워 하는 거죠?

 

 

Q. 리얼 러브 하우스 첫 촬영 때 마트에서 찍힌 사진이 화제였는데, 애인이라고 했던 건 일부러 그런 건지?

현우: 이건 저도 형원이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제가 말한 게 아니라서.

형원: 그때 같이 마트에서 뭐가 필요한지 장보고 그러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서 튀어나온거에요.

 

 

Q. 마지막 회에 형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현우인가?

형원: (현우를 슬쩍 보며) 그건 노코멘트 할게요. 

현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까까지의 걱정에 가득 찬 어수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화기애애하게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형원과 현우는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장난치며 재미있게 말해 놓고는 촬영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금 서먹해졌다. 형, 이제 우리 만날 일 별로 없는 거 알지? 나 이제 드라마 촬영 들어가서 한동안 바쁠 거고 형도 광고다 콘서트다 준비하느라 바쁘다며. 근데, 형. 그때 나한테 키스한 거. 무슨 의미야? 마이크를 떼며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는 형원을 보며 현우는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누가 봐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형원의 얼굴을 보다 형원의 어깨 보호대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형원이 사고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 휘몰아쳤다. 게다가 형원이 잊고 싶은 기억을 꺼내 물으니 현우는 생각에 과부하가 걸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테라스에서는 출연진과 스텝들 몇몇이 모여 조촐한 맥주 파티를 하고 있었다. 현우가 부엌에 물을 마시러 내려갔을 때, 모델 D가 맥주 한 잔만 같이 하자며 잡아 끌었다. 이색적인 제주의 풍경을 만끽하며 현우는 맥주 두 캔을 순식간에 비웠다. 잠깐 어울려 떠들던 현우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형원에 대해. 안 그런 척했지만 현우의 세계는 형원을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형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형원을 위한다는 자신의 배려는 지나친 사랑의 이면이었다. 형원에 대한 마음은 너무 많은 두려움과 너무 많은 사랑이었다.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현우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식상할 정도로 많이 말해두었어야 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한 마음이 아직 남아 괴롭혔다. 미련이라고 불리는 감정이어도 좋았다. 쉽게 떨쳐지지 않는 감정의 마지막까지 형원에게 줄 수 있다면.

 

현우는 형원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물론 연락처에서 '배우 채형원'을 검색하고 한참 후에 걸었지만. 통화음 소리가 몇 번 흐르고 형원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가라앉은 목소리는 형원이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우는 자신의 조급한 감정에 아픈 형원을 생각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아, 아니야. 형원아.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으려는 현우를 형원이 붙잡았다. 형, 할 말 있어서 전화했잖아. 잠깐 밖에서 바람 쐴래? 현우도 지금 결심한 이상,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먼저 밖에 나가 있겠다고 답했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촘촘히 박힌 별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어두운 밤에 불빛은 드물어 바다 위에 별들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모래사장에 철썩이며 다가왔다 멀어지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만히 무언갈 응시하고 있으면 시간에 대해 생각할 수 없어졌다. 

 

멈추어 선 발걸음을 옮겨 걷자 모래가 발밑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발소리 말고 더 큰 보폭으로 나는 소리에 현우가 뒤를 돌아보자 형원이 긴 팔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형원이 웃고 있는 모습은 환하게 보였다. 현우는 아마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형원을 기다렸다 함께 나란히 걷는 산책은 그저 조용했다. 철썩대는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면 현우의 심장 뛰는 소리는 형원에게 들렸을지도 몰랐다. 형원이 옆에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충만했다. 형원은 현우가 무언갈 말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가 꾹꾹 눌러 담아 온 마음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좋아해."

 

이렇게 짧은 세글자를 말하기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건지. 현우는 빨개진 귀끝은 이제 목 뒤까지 점점 번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형원은 그 모습을 약여히 볼 수 있었다. 형원은 이렇게 될 것을 예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현우가 언젠간 자신의 옆에 있으리란걸. 나도 좋아해, 형. 형원과 현우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어딘지 무미건조하지만 뜨거운 고백을 나누었다. 옆에 나란히 걷을 때마다 손등이 스쳤다. 닿은 손등이 간지러웠다. 손을 잡을까. 아무리 어둑한 밤바다라고 해도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형원에게 자신이 스캔들의 한 부분이 될까 두려워 현우는 그냥 손등이 스치는 것을 가만히 두었다. 그러나 형원은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야 했다. 

 

현우형. 형원이 걸음을 멈춘 채 현우를 불러 세웠다. 형원의 갑작스러운 멈춤에 현우는 내딛던 발을 멈춰야만 했다. 정적이 흐르는 둘 사이의 간격을 형원이 가득 메우며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현우의 턱을 잡고 도톰한 입술을 내렸다. 현우는 짧은 정적에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말캉한 형원의 입술이 닿았음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형원이 자신의 턱을 더 잡아 내리며 벌려진 틈 사이로 뜨거운 숨을 불어넣을 때가 되어서야 형원의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 형원과의 첫키스처럼 숲향기가 감싸는 시원한 바다맛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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