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Walk


돗가비
션곰발 씀

 

보름달이 뜬 깊은 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가장 흐릿한 새벽 세 시 삼십 분. 음기가 가장 강한 시간대가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매망량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무료할 때면 지나가는 인간들을 홀리기도, 내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밤산책'이라 부른다.

 

 

 

*

 

손현우에겐 비밀이 있다. 형원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도 참 무신경하지. 그 오랜 시간을 같이 숙소 생활을 했는데 이제야 알다니. 그 비밀이라 함은, 이따금씩 스케줄이 없는 새벽이 되면 손현우가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간다는 거다. 뭐 약속이 있거나 운동을 하거나, 어쨌건 스케줄 때문에 남는 시간이 불규칙하니 새벽에 자유시간을 갖는 거 아니겠냐 하겠지만 손현우의 경우엔 몹시 의심스러웠다. 형원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현우가 일정한 시기에 한 번씩 나간다는 패턴을 알아낸 이후로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마음속엔 의심이 자리 잡게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전까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한번 의식하고 나니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형원은 제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캘린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우가 새벽에 나간 날마다 표시해둔 것이 보인다. 캘린더를 휙휙 넘겨보니 주기는 대체로 한 달에 한번.

 

우리가 막 데뷔한 신인도 아니고. 이제 연차도 찼는데 사고만 안치면 되지 같은 팀 멤버가 밖에서 뭐 하는지 속속들이 캐낼 이유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하필 현우라 그런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엔 작은 궁금증으로 시작한 호기심은 어느새 눈덩이만큼 불어나버려 이제는 몸 어딘가에 가시가 돋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 정도로 궁금해서 돌아가시겠단 뜻이었다. 

 

어쩌다 불규칙하게 나가면 뭐 약속 있구나, 혼자 걷고 오려나보다 할 텐데. 거의 정확히 한 달 주기로 같은 시간에 나간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만 하지 않나. 그런데 멤버들은 별 얘기가 없으니 혹시 저 혼자만 몰랐던 건가 싶어 주위 멤버들에게 돌아가며 물은 적도 있었다.

 

"너 현우형 새벽에 어디 가는지 알아?"

"아니? 친구 만나나 보지 뭐."

"그렇게 늦은 시간에?"

"음.. 그럼 혼자 운동하고 오는 건가?"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희한한 건 멤버들 중 관심을 갖는 사람도 오직 형원 뿐이었다. 그냥 볼 일이 있나 보지. 뭘 그렇게 궁금해해?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핀잔을 주는 멤버도 있었다. 심지어 매니저들 반응도 같았다. 아니 진짜 나만 궁금하다고? 형원은 오히려 그게 더 신기했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지금까지 기록해온 주기와 시간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스토커 취급만 당했다. 

 

"너 지금도 현우형이랑 제일 많이 붙어 다니지 않냐? 너도 니 삶을 살아, 좀."

 

빈정이 상한 형원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누가 보면 내가 현우형한테 집착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그러고 보니 조금 그런 것 같다며 동조해줄 사람이 한 명쯤은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런 말까지 듣고 나니 진짜 내가 이상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아, 모르겠다. 오늘 스케줄도 다 끝났으니 잠이나 일찍 자야지.

 

 

 

 

잠에 빠져있던 형원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캄캄한 밤이다. 내가 일어날 때도 아닌데 눈을 떴다고? 웬만하면 중간에 깨는 일이 거의 없는지라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마침 방 밖에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형원은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시간은 정확히, 새벽 세 시였다.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현우 방으로 돌진했으나 안은 텅 비어있었다. 캘린더를 켜보니 오늘이 현우의 마지막 새벽 외출로부터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이다. 그 주기가 돌아온 거다. 형원은 그대로 슬리퍼만 신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거의 바로 뒤따라 나왔음에도 현우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새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뛰어다니며 현우를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다시 숙소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궁금증까지 달아난 건 아니여서 형원은 제 침대에 앉아 현우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현우가 뭘 하면서 돌아다니는 건지 신경 쓰여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시간 뒤. 띠리릭-. 도어락이 열리더니 현우가 들어와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원은 지금 당장 방을 나가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칫 지금까지 안 자고 현우를 감시한 것처럼 보일까 봐 궁금하더라도 일단은 참기로 했다. 

곧장 화장실로 들어간 현우는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날이 많이 덥기는 한데 땀이 많이 났나. 그런데 그런 것치곤 현우 답지 않게 샤워를 꽤 길게 한다. 영 이상한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한참 자던 중에 깨서 그런지 그토록 안 오던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잠에 대한 저항성이라고는 1도 없는 형원은 샤워기 소리를 듣던 중 그대로 다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한창 곤히 자던 형원은 제 몸을 흔드는 손길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형원아, 이제 일어나야 돼. 누군가가 형원을 부드럽게 깨우고 있었다. 새벽에 현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형원은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으응-.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칭얼거리듯 그러자 따뜻하고 큰 손이 이마를 슬슬 쓸어 만진다. 일어나야 된다니까. 지각비 내고 싶어서 그래? 지각비라는 말에 본드로 붙여놓은 것 같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형원은 눈을 크게 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정도로 무덤덤한 현우도 이번만큼은 놀랐는지 어어, 하며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이내 중심을 잡은 현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지각비 얘기 하니까 바로 일어나네. 아까 주헌이도 그랬는,"

"새벽에 어디 갔다 왔어요?"

 

저도 모르게 불쑥 묻자 현우가 말을 더듬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다.

 

"어, 어? 너 안 자고 있었어?"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깼었어."

 

의심 살까 봐 적당히 둘러대자 현우가 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런데 정작 어디 갔다 왔냐는 물음에는 대답을 않는다. 

 

"어디 갔다 온 건데요?"

 

현우의 까맣고 동그란 눈이 도르륵 굴러간다.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입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인다. 대충 뭐 운동하고 왔어.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왔어.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현우는 더 의심스럽게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답답해진 형원이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형, 새벽에 어디 갔다 왔냐니까?"

"다들 뭐해! 우리 빨리 차 타러 가야 돼."

 

때마침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주헌의 등장으로 대화는 끊겨버렸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현우는 기다렸단 듯이 어, 갈게! 하며 잽싸게 방을 빠져나가버렸고, 홀로 남겨진 형원도 일단 스케줄에 늦으면 안되니 서둘러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물론 의심은 더 강해진 뒤였다.

 

 

 

스케줄이 모두 끝나고, 형원은 현우와 얘기할 타이밍을 찾으려 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형원은 현우가 자신을 은근히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분명 새벽에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던 날 이후부터 저를 대하는 현우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뭔가가 있다고 제대로 냄새를 맡은 형원은 한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현우가 앞으로도 이렇게 저를 경계한다면 팀에 지장이 갈 것은 물론이고, 현우가 일정한 주기마다 왜 새벽에 나갔다 오는지에 대해서도 영영 알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형원은 그 새벽 외출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자 현우는 경계심을 허물고 형원을 예전처럼 대했다. 먼저 다가와서 챙겨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 형원은 고민에 빠졌다. 아예 피하지 못하게 날을 잡고 직접적으로 물어볼까? 그러다 형이랑 사이 애매해지면 어떡하지? 어떻게든 현우의 비밀을 알아내려고만 할 뿐인 형원의 머릿속에 '형한테 관심을 끈다'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으흠흠~. 현우가 메뉴판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빡빡하던 스케줄이 조금 느슨해진 날이라 늦은 밤 저녁을 먹기 위해 단골 가게를 찾은 두 사람이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예쁘게 꾸며진 인테리어에 웬만하면 미리 예약도 해야 하는 식당이라 오늘도 민혁에게 둘이 또 데이트 하러 가냐며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그냥 흘려들었을 그 말이 그날따라 묘하게 형원의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형이랑 놀 때는 왜 이렇게 데이트스럽게 되는 거지? 주헌이 왜 맨날 둘만 만나냐며 서운해하고, 기현은 놀 때 자신도 불러달라며 방송에서까지 얘기했지만 현우와 형원은 주로 둘이서만 붙어 다녔다. 물론 다른 멤버들과도 어울리고 외출을 하긴 했지만, 유독 서로를 조금 더 자주 보고 만나면 연인들이 갈만한 장소를 많이 찾았다. 딱히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항상 방향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전에는 그냥 생각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렸는데, 막상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뭔가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져서는 메뉴를 고르는 현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통실한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인다. 난 이거랑 이거 시킬래.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 선명히 보이는 입술 위의 작은 점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현우가 형원을 툭 건드렸다.

 

"야, 형원아. 여태 메뉴 안 고르고 딴 생각 했어?"

"어? 어어.. 그냥 형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니가 먹을 건데 너 먹고 싶은 거 골라."

"어차피 우리 음식 여러 개 시켜서 같이 나눠 먹잖아. 난 다 좋으니까 알아서 시켜줘요."

 

그래? 현우가 다시 메뉴판을 살피는 동안 형원의 시선은 현우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고민하느라 평소보다 살짝 나온 입쯀, 아니 입술 때문인지 저보다 형인걸 알면서도 오늘따라 유독 덩치만 큰 애기처럼 보인다. 흐음...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작 저녁 메뉴 고르는 건데 뭐가 그렇게 결정이 어려운지 도르륵 굴러가는 둥근 눈동자 아래로 애교살이 볼록하다. 형원은 그런 현우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작게 웃음이 났다. 현우는 얼마나 메뉴 선정에 집중한 건지 형원이 웃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현우가 고심해서 주문을 넣고 나서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형원은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맛있게 먹는 현우를 보다가 불쑥 물었다. 형. 형은 왜 나랑만 먹어요? 그 말에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을 우물거렸다. 

 

"으응? 나 다른 애들이랑도 먹잖아."

"유독 나랑 더 자주 가잖아요. 특히 이런 거."

"이런 게 뭔데?"

"데이트 코스로 갈만한 식당들."

 

어.. 그게... 현우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왜 곤란해하는 거지? 형원은 눈을 빛내며 현우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이에 뭐가 껴서 그랬던 건지 씹던 음식을 꿀떡 넘긴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형원이 니가 입이 짧아서 더 많이 먹을 수 있잖아."

"......"

 

난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거지. 아니, 맞는 말이고 전에도 들었던 말이긴 한데 왜 데미지를 입은 것 같냐고. 형원은 짜게 식었지만 쉽게 굴하지 않고 일말의 희망을 담아 다시 물었다. 

 

"정말 그 이유가 다예요?"

 

또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현우가 이번엔 정말 눈에 띄게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굉장히 쑥스러워하는 사람처럼 귀 끝도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형? 형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현우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며 작게 건드리자 현우가 흠칫하며 손을 쏙 빼버린다. 평소답지 않은 반응에 형원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으니 아예 볼까지 빨개진 현우가 말을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서비스 나왔습니다."

 

그때 작은 접시에 담긴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며 절묘한 타이밍에 대화가 끊겼다. 어우, 서비스 감사합니다 사장님. 맛있겠네요. 현우는 가게 사장을 구세주라도 되는 듯이 올려다보며 꾸벅 목례를 하고선 음식을 집어먹었다.

 

"진짜 맛있다. 너도 먹어봐, 형원아."

"응."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물어본 거였는데, 현우 반응이 의외다 보니 형원은 저까지 조금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분위기도 어쩐지 묘해졌다. 그냥 밥이나 먹자. 더이상 묻지 않고 남은 음식을 먹는 형원에게 현우의 시선이 슬쩍 닿았지만, 형원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형원은 현우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왜 이렇게 현우형이랑 연애하는 기분이 드는 거지? 그것도 막 연애 초기인 풋풋한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형원은 괜히 베개에 퍽 주먹을 꽂았다. 벌레 물린 것도 아닌데 뭔가 명치가 간질거린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그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아 침대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는데 뉴스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 밤, 블루문이 뜬다.' 

 

블루문? 그게 뭔디. 형원은 의식의 흐름대로 기사를 눌러 읽어내려갔다. 한 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뜨는 경우 그 두 번째 보름달을 블루문이라고 한다... 블루문을 어디선가 들어봤긴 했는데 그런 뜻인 줄은 몰랐네. 그렇게 생각하며 팬카페에 접속해 댓글을 달아주던 형원은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역시나 세 시. 현우가 또 외출을 하려 하고 있다. 이상하다. 아직 한 달 안됐는데? 캘린더를 보니 주기가 오려면 며칠이 더 남았다. 다른 볼일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왠지 촉이 심상치가 않았다. 

 

둔감한 편인 형원에게 이런 촉은 아무 때나 발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형원은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고 있던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형원을 보고 묻는다.

 

"나가게?"

"응. 편의점 갔다 오려고요."

"니가 이 시간에?"

"갑자기 맥주가 땡겨서."

 

그러자 현우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그런다. 

 

"형원아. 너 무슨 고민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요새 고민이 있어 보였나? 형원은 그 물음에 대답할까 말까 고민했다. 형이 새벽에 나가는 게 내 고민이야.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 취급 받을게 뻔하니 그냥 그런 거 없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 원래 가끔 자기 전에 맥주 한캔 하잖아."

"냉장고에 남은 거 있지 않아?"

"추천 받은 맥주가 있어서 그거 먹어보려구요."

"아.. 그래?"

 

몸을 숙여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운동화를 신는 형원의 머리 위로 시선이 내려앉았다. 형이 의심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내 고민 있으면 꼭 얘기하라며 어깨를 쓸어주는 손길이 마치 안심하라는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저번처럼 먼저 보내면 놓칠 것 같아서 편의점 핑계를 대고 나온 건데 현우는 의외로 느긋했다. 괜히 나 혼자 뻘짓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터덜터덜,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하며 몇분 정도 걸어갔을까. 현우가 골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이쪽으로 가야 돼서. 편의점은 그쪽이지? 그러더니 형원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원은 덩그러니 서 있다가 현우가 들어간 골목을 뒤쫓았다. 미행이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지만 현우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에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사이에 뭐 어때. 그렇게 합리화하며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걸었다. 조용한 밤길을 작게 울리던 운동화가 천천히 멈춰 섰다. 

 

형원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분명 방금 전에 들어갔는데, 현우는 온데 간데 없이 골목이 텅 비어있었다. 길게 이어진 골목길은 갈림길조차 없어 어디로 빠질 데도 없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황당해서 앞머리를 쓸어올리는데 문득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온다. 맞다. 오늘 두 번째 보름달이 뜬다고 했었지. 블루문. 

 

내가 쫓아오는 걸 알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 건가? 그래도 설마 현우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 그냥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현우는 이미 놓친 것 같고, 어차피 이 골목길을 쭉 따라서 나가면 숙소로 가는 큰 길이 나오니 그냥 달구경이나 하면서 돌아가자 싶어 계속 걷기로 했다. 그런데 골목 중반을 지나던 중. 갑자기 쑤욱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크게 놀란 형원이 반사적으로 팔을 허우적댔다. 

 

겨우 무게중심을 잡고 그 자리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는데 뭣도 없는 똑같은 골목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지나치는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지? 분명, 방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착각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아주 순간적이어서 더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형원은 자신이 지나온 허공에 손을 휘둘러봤지만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가던 길 마저 가기로 했다. 요새 몸이 허해진 건가. 그렇게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보름달이... 원래 저렇게 컸었나?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평범한 크기로 보이던 보름달이 거의 열배는 더 커보인다. 이 길도, 눈앞에 보이는 풍경도 모두 같은데 달만 저렇게 커지다니.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익숙한 환경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란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형원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뒷모습에 형원은 안도감이 물밀듯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저를 두고 먼저 골목길에 들어섰던 현우였다. 그는 아까와 똑같은 걸음걸이로 공원을 가로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원래 공원이 있었나? 하지만 그 의문은 현우를 발견했다는 반가움에 길게 가지 않았다. 

 

형, 하고 현우를 부르려던 형원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현우의 옷깃을 잡아채 끌어당긴 것이다. 마치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갑작스러웠으나 자세히 보니 형체가 있는 사람이었다. 현우보다 약간 더 키가 큰 그 남자는 현우를 당긴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형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현우는 적잖이 놀랐는지 그를 밀쳐내려 했으나 양 손목을 전부 붙잡혀버렸다. 

 

현우의 극성팬인지 그냥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변태인진 모르겠으나, 어쨌건 현우를 구해야 하는 상황인 건 분명했다. 형원은 그 남자를 현우에게서 떼어낼 심산으로 전속력을 다해 뛰어갔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모습은 형원이 생각하던 것과는 한참 달랐다. 현우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의 키스에 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두 사람은 형원이 가까이 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주변에 한두 명씩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신경도 쓰지 않고 질척한 키스를 계속 이어간다. 형원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형이 그동안 새벽에 나온 이유가... 애인이 있어서 그런 거였어? 그것도 남자? 그래서 지금까지 숨겨왔던 거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허탈함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별안간 확 짜증이 치솟았다. 뭔가 돌덩이 같은 게 가슴에 콱 들어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답답스러웠다. 현우가 다른 남자와 스킨쉽을 하는 게 왜 이리 기분이 나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 나 몰래 남자를 만나고 다녀서? 우리 사이에 비밀을 만들어서? 어쨌건 평소 성격대로였다면 뒤돌아서 우회길로 돌아갔을 텐데, 지금은 어쩐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서서히 손을 내려 현우의 엉덩이를 움켜쥐었을 땐 형원의 몸은 이미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간 형원은 두 사람을 확 떼어냈다. 맞물린 입술이 떨어지고, 형원을 발견한 현우가 눈을 크게 떴다. 어, 형원아?! 형원은 현우가 놀라든 말든 투박하게 남자의 어깨를 밀쳐냈다. 남자를 향한 이유 모를 적개심이 차올랐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새벽에 현우형을 꾀어내? 어디 면상이나 보자. 그런 생각으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형원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벙쪄버린 형원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형원과 똑같은 얼굴을 한, 채형원 자신이었다. 남들이 보면 채형원 둘이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입고 있는 옷만 다를 뿐이지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원을 복사해놓은 것처럼 똑같은 생김새였다. 도플갱어, 복제인간 등등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으로 가득 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형원이 저가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서 현우를 부르려던 때였다.

 

"너구나. 돗가비를 사랑에 푹 빠지게 한 인간이."

 

형원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비염기 섞인 목소리까지 똑같아서 형원은 팔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돗가비? 그게 대체 뭐지? 알 수 없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는데 현우가 끼어들어 남자에게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가라."

"왜? 셋이서 뒹굴면 재밌을 거 같은데. 니가 좋아하는 얼굴이 둘이잖아."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남자의 어깨 위로 화륵 불이 붙었다. 불꽃의 색깔이 붉은 색이 아니라 푸른 색이어서 형원은 두 번 놀랐다. 푸른 불꽃이어도 뜨겁긴 뜨거운지 남자가 알았어, 알았다고! 하며 소리치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정확히는, 몸뚱이만 사라진 거라 남은 옷가지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런데 그 쌓인 옷가지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웬 너구리가 휙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형원은 얼이 빠져서는 쏜살같이 멀어지는 너구리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요새 스케줄이 빡세서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형원아.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현우가 형원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멍하니 현우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던 형원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형. 방금 뭐예요? 나만 본 거 아니지?"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어?"

"아까 그 남자 대체 뭐예요? 어떻게 내 얼굴을 하고 있던 건데요? 너구리는 또 뭐고?"

"다 얘기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내 말 좀 들어, 인마."

"아니, 여기서 말해요. 왜-,"

 

당장 여기서 얘기하라며 현우를 몰아붙이던 형원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인적이 매우 드문 공원이었는데 어느새 빽빽하게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이란 것이 참으로 기묘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인기척 하나 못 느낀 것은 물론이고, 더 소름이 돋는 사실은 그들이 전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형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될 곳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털이 쭈뼛 선 상태 그대로 굳어있는 형원을 현우가 힘으로 잡아끌었다. 

 

"여기 있으면 니가 위험해져서 그래. 빨리 따라와."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로 형원은 거의 혼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형원아, 괜찮아? 식은땀이 맺혀있는 형원이 걱정됐는지 현우가 이마를 쓸어주는데 침대에 앉아있던 형원이 그 손을 턱 붙잡았다. 

 

"형, 사람 아니죠."

 

형원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는 걸 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인 형원이 어떻게 자의적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넘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형원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옛부터 간혹 형원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인간들 중에서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미쳐버린 이들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원아. 일단 천천히 심호흡을,"

"그 돗가비라는 게 형이에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에 까맣고 둥근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형원이만큼은 절대 모르길 바랐는데. 모종의 이유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원에게만큼은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현우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형원의 추궁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 맞아."

"그럼 사랑에 빠졌다는 말도.. 진짜예요?"

 

형원의 진지한 얼굴에 현우가 입술을 잘게 짓씹었다. 차라리 다 내려놓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인 걸 눈치라도 챈 건지 제 손을 붙들고 있는 형원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형."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다시 한번 현우를 부른다. 형원은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듯 결연해 보였다. 현우의 머릿속에 온갖 부정적인 미래가 그려졌지만, 형원이 직접 눈으로 봐버린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체념한 현우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현우가 태어난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조선 시대. 피가 묻은 오래된 옥반지에서 자연적으로 탄생하게 된 현우는 여타 다른 돗가비들처럼 힘이 세며 술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면서 춤추는 것도 좋아하는 존재였다. 심심할 때면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씨름 내기를 하기도 하고 다른 이매망량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는, 그런 천진난만하고 어린 돗가비.

 

그렇게 한량처럼 살던 중, 시간이 흐르며 조선이 쇠퇴하고 망조가 들기 시작하자 덩달아 삶도 무료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가는 곳마다 곡소리만 들려오니 흥이 날 리가 있을까. 그래서 현우는 스스로 깊은 산에 들어가 동면에 빠져들었다. 그 후 현우를 깨운 것은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산을 깎아지르는 공사 소음이었다. 돗가비라는 이름이 도깨비로 전승될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왕 잠에서 깬 거 세상이 어떻게 변했나 도심으로 갔는데, 마침 처음 보게 된 것이 전광판에 나오는 아이돌이었다. 그런데 춤추고 노래하는 그 모습이 어찌나 흥 나고 멋있어 보이는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춤사위였기에 더 그래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 뒤로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인간인 척 생활하다 무사히 데뷔까지 하게 되었는데, 활동을 하던 중에 형원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처음엔 마냥 신기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녀석이 왜 이렇게 갈수록 잘생기고 멋있어 보이는지. 조선 시대 미남상에 익숙해져 있던 현우였으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대상에 익숙해지며 형원이 잘생겨 보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사실 외모만 잘난 거였으면 얼마 좋아하다 말았을 텐데 형원은 그 얼굴에 유머감각까지 뛰어났다. 거기다 성격도 느긋하고 속도 깊은 것이 조선 시대 때 먹었던 곰탕보다 더 진국이었다. 다른 멤버들 모두 수려한 외모에 좋은 성품을 지녔으나 현우가 유독 형원에게 빠져든 이유는, 그에게는 제 힘이 통하지 않아서였다. 동면에서 깨어난 뒤로는 거의 정체를 숨겨야 할 때만 힘을 쓰긴 했어도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현우에게 형원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인간들 중에선 보통 수행을 오래 한 스님이나 신력이 깊은 무당이 아니고서야 돗가비 힘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는데. 형원은 스님도, 무당도 아닌데 신통방통하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형원의 앞에서는 돗가비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그래봤자 메밀묵이나 막걸리 같은 돗가비가 좋아할 만한 식음료들을 게걸스럽게 먹지 않기 정도였지만. 다른 멤버들이나 매니저들에게는 힘을 써서 자신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형원에게는 그럴 수가 없으니 나름 조심하기는 했다.

 

문제는 형원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자 그를 볼 때마다 자주 동한다는 것이었다. 돗가비들은 원래가 색을 밝히는 이들인데 거기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 왠종일 붙어있으니 현우로서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옛 설화에서 호색한으로 분류되는 돗가비면서도 현우는 다른 사람과 몸을 섞기는 싫어했다. 그만큼 현우가 형원에게 순정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돗가비로서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꾹꾹 눌러 참다보니 결국 병이 나버렸다. 이따금씩 몸살이 난 것처럼 으슬으슬하면서 몸이 쑤실 때도 있었고, 자꾸만 기운 없이 축축 처지기도 했다. 컨디션이 최악으로 치닫는 날이 점점 길어지니 이러다간 팀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아 현우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해서 형원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하기 싫다는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현우는 결국 밤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다른 돗가비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물어보기 위해서. 인간들의 인적이 드물고,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새벽 세 시 반. 이승과 저승의 경계 사이로 들어간 현우는 저와 같은 돗가비들만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현우에게 같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딴 게 왜 고민인 거야? 그 인간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다른 것들과 욕구만 풀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오히려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되려 고민만 더 늘어나버린 현우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돗가비로서의 본능까지 억누를 정도로 형원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현우에게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형원에게 고백을 할 용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형원이는 나를 좋은 형, 든든한 리더로 여기고 있는데. 그렇게 뻔한 상황에 굳이 형원에게 고백을 해서 팀 분위기를 개판 낸다? 리더로서도 실격인 행동이었고, 팀을 많이 아끼는 현우로서는 그것만은 꼭 피하고 싶었다. 형원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숨을 거둘 때까지 짝사랑만 하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차라리 형원에게 돗가비 힘이 통했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홀려 관계를 한 뒤 기억을 잃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형원에게는 돗가비 힘도 무쓸모인 데다 좋아하는 상대에겐 입이 찢어져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돗가비 습성까지 더해져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치겠네 정말. 형원아. 너한텐 왜 내 힘이 통하지 않는 거니.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발치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고개를 들자 사람 몸에 너구리 얼굴을 한 것이 서 있다. 현우가 어렸을 때부터 가끔 만나서 놀던 너구리요괴였다. 

 

- 오랜만이네, 손가네 돗가비야. 뭔 고민이라도 있나 봐?

- 있긴 한데 너한텐 말하고 싶지 않아. 

- 왜. 니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데.

 

그 말에 현우가 인상을 썼다. 니가 무슨 수로. 그 말에 너구리요괴가 팔을 들어 딱, 손가락 튕겼다. 그러자 너구리 머리가 펑, 하더니 창균의 얼굴로 바뀐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현우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 뭐하냐, 너.

- 얘는 아닌가 보네.

 

그러더니 창균의 얼굴이 기현으로, 기현의 얼굴이 민혁으로 변했다. 그리고 또 다시 바뀐 주헌에서 마침내 형원의 얼굴로 변했을 때, 현우 표정이 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챈 너구리요괴가 씨익 웃었다. 

 

- 이 얼굴이면 좀 할 마음이 생길까?

- 꺼져.

- 형, 나랑 할래요? 난 형이랑 하고 싶은데.

 

옆에 앉은 너구리요괴가 현우의 허벅지를 은근하게 쓸어올렸다. 형원과 똑같은 외모로, 똑같은 목소리로 제 몸을 만지고 있으니 현우 얼굴이 속절없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다른 돗가비들한테 다 들었어. 얘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건강하던 니가 병까지 났다면서. 이 모습으로 둔갑할 테니까 보름달 뜬 날마다 나랑 하자. 응?

- ...싫어.

- 끝까지 하기 그러면 스킨쉽까지만 해. 그 정도만 해도 정기가 순환될 수는 있잖아. 비록 조금이긴 하지만.

 

너구리요괴가 불타는 것처럼 새빨개진 현우의 귀에다 속삭였다. 사실 현우가 병이 난 이유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하지 못해 몸 안의 기운 또한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고 욕구가 강한 돗가비로서 좋아하는걸 못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음양의 조화가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돗가비는 본디 귀(鬼)로 분류되어 음의 기운이 강한 종족이다. 그런데 정기의 교류는 끊기고, 갈수록 음의 기운만 강해져 이승과 맞지 않는 몸이 되었으니 병이 날 수 밖에. 돗가비 마을이나 저승에 산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현우는 이승에 있어야 하니까. 아니면 최소 몇 달만이라도 이승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직업이 아이돌인 현우에겐 언감생심이었다. 너구리요괴는 제 눈앞의 매력적인 돗가비가 인간 손현우로서의 삶은 물론, 채형원이라는 그 인간 역시 포기하기 싫어한다는 걸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현우는 결국 한숨을 쉬며 제안을 수락했다.

 

- ..대신 만지는 것만 해. 그 이상은 안 돼.

- 손가락 넣는 건?

- 꼬리 뜯어버린다.

- 알았어, 알았어. 

 

너구리요괴가 피식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가 진짜 형원이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현우는 결국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이 대목까지 얘기했을 때 잠자코 얘기를 듣던 형원이 펄쩍 뛰며 화를 냈다. 내 모습으로 둔갑한 놈이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하러 보름달 뜰 때마다 나간 거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현우는 금세 우울해졌다. 막상 분노하는 형원을 맞닥뜨리니 속이 쓰리다 못해 곪아버리는 기분이었다. 하긴, 형원이 입장에선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소름 끼치고 싫겠지.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정말 미안하다 형원아."

"당연히 미안해야죠."

"다신 안 그럴게. 그래도 그냥.. 서로 조금 만지고 그런 거 밖에 안 했어. 소꿉장난같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형원의 표정은 점점 험악해져만 갔다. 언성 역시 높아진 건 물론이었다.

 

"소꿉장난? 생전 살면서 그렇게 끈적한 터치는 처음 봤다구요. 형한텐 그게 소꿉장난이라고?"

"진짜 미안해 형원아. 내가 어떻게 할까. 니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형원은 정말 간만에 화가 나 보였다. 지금까지 나한텐 한 번도 이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명백히 제 잘못 때문인걸 알면서도 현우는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슬퍼졌다.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는걸 보니 이제 형원과는 절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형원도 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대외적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겠지만 사적인 사이는 박살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으나 이미 엎어진 물. 제 아무리 돗가비라도 시간을 역행하는 능력 따윈 없다. 현우가 뜨거워진 목울대를 가다듬는 동안 형원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밤산책 절대 하러 가지 마요."

"응. 그럴게."

 

밤산책을 나가 너구리요괴를 만나지 않으면 이승에 머무르기 힘들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현우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을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고, 무엇보다 형원에게 지금보다 더 미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가슴이 너무 찢어질 듯 아파와서 참기가 힘들었다. 돗가비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어서, 현우는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너굴맨인지 뭔지도 절대 만나지 말고. 진짜가 있는데 왜 가짜랑 하냐고요. 앞으론 무조건 나랑만 해요."

"알았어. 앞으론 꼭 너랑... 어?"

 

형원의 말을 곱씹던 현우가 얼빵한 소리를 냈다. 뭘... 하라는 거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바보같이 입만 벌리고 있었다.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형원이 단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안 그래도 형 행동이 수상쩍어서 의심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직접 물어볼 걸 그랬네. 형이 나 때문에 여태 억지로 그 자식 보러 갔다고 생각하니까 속에서 천불이 난다구요."

"저기.. 형원아.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형 좋아하나 봐 내가."

 

현우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껏 속 끓이던 난해한 문제의 답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형원은 정말 속이 후련해 보였다. 반면 기뻐서 브레이크댄스를 춰도 모자랄 판에 현우는 그토록 원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마음 한켠이 찝찝했다. 현우가 이승에 있지 못하면 팀에도 영향이 갈 수 밖에 없으니, 팀을 생각해서 본인이 희생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형원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나 좋아해요?"

 

우회 없이 날아오는 돌직구에 현우가 입을 다물었다. 삼백년이 넘도록 긴 세월을 살아온 이유가 눈앞의 형원을 만나기 위함이었나 싶을 정도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형원을 좋아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을 유지 곳간만큼이나 마음이 풍족해졌고, 저를 보며 웃는 형원의 얼굴 하나면 어떤 근심이나 스트레스도 눈 녹듯 사라졌었다. 그만큼 심장이라도 꺼내어 보여주고 싶을 만큼 형원을 좋아하는 현우였지만 정작 나오는 말은 맥 빠질 정도로 간결할 뿐이었다.

 

"좋아해... 정말로."

 

말재주도 없는 편이라 표현하기는 어려웠지만, 눈빛에 담긴 진심이 전해졌는지 방 안의 공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깊고 맑은 눈을 바라보던 형원이 현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지금까지 홀로 속앓이 하던 걸 위로해주듯 엄지로 손등을 슬슬 쓸어 만지는 손길에 현우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 상황이 꿈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실성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려고 했다. 그건 형원도 별반 다르지 않아 한동안 현우의 손을 잡은 채로 온기를 느끼기로 했다. 현우가 쑥스러워하며 자꾸만 손을 빼려고 할 때마다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지금 이런 모습을 보니 현우가 가끔씩 제게만 보였던 시그널들이 하나둘씩 생각난다. 네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표정과 말투, 몸짓 하나까지.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니었겠지만 그토록 티가 났는데 어떻게 몰랐던 건지. 형도 참 답답했겠다 싶어 형원은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맞잡은 손을 풀지 않은 두 사람은 해가 밝을 때까지 서로에게 못다 한 이야기들을 고백하듯 풀어나갔다.

 

 

 

*

 

 

형원이 현우의 밤산책을 알게 된 뒤 한 달 정도가 지나 간만에 스케줄 없는 날이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근 한 달간은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며 짬 날 때마다 키스만 한 것이 고작이었고, 그러다 겨우 시간이 나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이 곳에서 형원과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연예인, 그것도 같은 그룹 아이돌 멤버끼리 이렇게 야외에서 대놓고 손깍지를 끼고 데이트를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이 곳에서는 가능했다. 밖으로 말이 새어나갈 일이 없으니 최적의 장소인 대신, 형원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매망량들의 타겟이 될 수도 있다는 장애물이 있었으나 그 문제도 현우가 형원의 바지에 넣어준 복주머니로 해결되었다. 

 

"근데 이 복주머니 안에는 뭐가 든 거예요?"

"으응. 옥반지."

"......형 혹시 우리 커플링 준비한,"

"아니, 아니야. 내 본체를 갖고 있으면 다른 애들이 널 못 건드려서 준 거야."

 

당황한 현우가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았음에도, 형원은 어쩐지 조금씩 밀려드는 실망감을 뒤로 한 채 복주머니에서 옥반지를 꺼내 들었다. 옥반지는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손상된 부분 하나 없이 매끈하고 영롱했다.

 

"이게 형 본체라구요?"

"응. 그게 파괴되면 나도 소멸하게 돼. 내 힘으로 보호하고 있어서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 내가 끼고 있어도 돼요?" 

 

그 말에 현우가 몹시 놀란 얼굴을 했다. 과한 요구를 한 건가 싶어 형원이 서둘러 사과하려는데 현우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껴도 돼. 결혼을 하고 나면 상대에게 자신의 본체를 주는 게 돗가비들의 관례거든. 순간 형원이 니가 인간인 거 까먹고 놀랐다, 야."

"왜요. 사람 일 모르는 거지. 형이랑 내가 결혼하지 말란 법 있나."

 

선을 긋는 것 같은 말에 형원이 불퉁하게 대답하자 현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긴 한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옥반지를 낀 손으로 현우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새벽 밤공기를 맡으며 잡고 있는 단단한 손이 기분 좋아 엄지로 슬슬 문지르자 현우가 작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작은 스킨쉽에서조차도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 형원은 현우를 더 만지고 싶어졌다. 

 

손을 끌어당겨 벤치에 현우를 앉힌 형원이 현우의 뺨에 슬며시 입술을 붙였다. 금세 볼을 발갛게 물들인 현우가 형원아, 하면서 조금 밀어내려는 낌새가 보여 이번엔 작고 통통한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게 빨다가 잇새로 가볍게 깨물자 현우가 서투르게 혀를 밀어 넣는다. 형원은 그 말캉한 혀를 얽어내며 현우의 뒷목을 감쌌다. 으음, 응.. 물기 어린 소리와 현우가 내는 작은 신음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형원은 심장이 쿵쿵 뛰고 등줄기가 잘게 떨릴 정도로 좋아 저도 모르게 현우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동안 현우와 키스를 나누던 형원이 입술을 천천히 떼고서 피식 웃었다. 그 너구리랑은 누가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왜 나랑 할 때는 자꾸 피하려고 해요. 그 가벼운 투덜거림에 현우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형원이 너랑 닿으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땀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러게 돼. 널 너무 좋아해서 키스만으로도 벅찬가 봐."

 

좋아하는 상대에겐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돗가비 답게 현우는 있는 그대로의 제 속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 솔직한 대답에 얼굴이 붉어진 건 오히려 형원이었다. 그동안 내내 참아왔었는데, 오늘만큼은 정말 욕심을 내고 싶어졌다. 손현우의 모든 것을.

 

"형."

"응?"

"오늘.. 어때요?"

 

뭐가?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되물으려던 현우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사실 몸 상태를 생각하면 관계는 빠를 수록 좋았지만 형원이 부담을 느낄까 봐 잠자코 있던 중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배려 때문에 형원이 몸이 달아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모르고, 현우는 짙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형원의 시선에 꿀꺽 침을 삼켰다.

 

"난 언제든지 좋아.. 형원이 너라면."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는 현우 모습에 형원은 입안이 말라가는 것 같았다. 근처에 모텔이 있었나. 장소까진 생각해놓지 않아 마음이 더 급해졌다. 핸드폰을 꺼내 근처 모텔을 찾아보려는데 현우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선 데이터 안 터져.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그런 거면 우리 집으로 갈래?"

"숙소?"

"아니, 진짜 우리 집. 돗가비 마을에 한 채 사뒀거든."

"나도 갈 수 있어요?"

"응. 마을 문지기한테 막걸리 몇병 주면 돼."

"뭐해요 빨리 안 가고."

 

벌떡 일어난 형원이 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모습이 꽤, 아니 심하게 급해 보여서 현우의 앞 광대도 방싯 올라갔다. 

 

"일단 편의점 들려서 막걸리부터 사자."

"혹시 모르니까 한 박스 살래."

"그 정도면 넉넉히 일곱번 정도는 출입 허락해줄걸."

"고작 일곱번? 아예 막걸리 공장을 사버릴까."

 

형원의 너스레에 현우가 배를 잡고 웃었다. 왜요. 난 진심인데. 정말 단순히 해본 빈말은 아닌지 나름 진지해 보인다. 

 

"근데 나 말고 데려갔던 사람 있어요?"

"어디. 우리 집에?"

"응."

"없어. 니가 처음이야."

 

 

삼백년 살아오면서 집에 초대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니. 기분이 배로 좋아진 형원은 들뜬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어대기까지 하는 모습에 현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집 산지 한 달 밖에 안됐다는 사실은 굳이 형원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이승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크고 둥근 달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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