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Walk


日久月深
마리네이드 씀

 

 

홍콩의 밤하늘은 꼭 무중력 상태 같다. 현우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번화가는 건물 사이 간격이 좁고 간판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밤이 되면 눈 아픈 네온사인이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야성 같은 홍콩의 번화가는 낮에도 밤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현우는 꽤 오랜만에 이 풍경을 본다. 식료품점에서 사야 할 것들을 다 사자마자 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리를 빠져나왔다. 외출은 썩 달갑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현우는 복잡한 홍콩에서도 한 번 들어가면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복잡하기로 유명한 곳에서 살았다. 무정부 구역에서 규제를 무시하고 지어진 고층 슬럼의 내부는 기형적으로 성장한 탓에 건물 내 골목은 꼬일 대로 꼬여 마치 미로 같았다. 낮에도 해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습해서 쥐와 바퀴벌레가 창궐했다. 바닥에는 쓰레기가 나뒹굴고 천장에서 축 늘어진 전선은 귀신 머리카락 같았다. 경찰도 들어가기를 꺼려 범죄 조직이 판치고 폭력과 살인은 예삿일이었다. 간밤에 누가 죽었다는 소식쯤은 화젯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도박장, 마약굴, 성매매 업소가 즐비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고기를 사용하는 음식점과 무면허 의사들이 운영하는 불법 의료시설, 무허가 공장이 버젓이 영업했다. 온 세상 범죄를 한데 모은 범죄의 온상지. 마굴, 시궁창, 지옥, 수라장…. 온갖 불미스러운 별칭을 가진 이곳을 사람들은 구룡성채라고 불렀다.

 

스물두 살에 성채에 흘러들어와 어느덧 이곳 생활 8년째인 현우는 성채 서쪽 3층에 있는 테이크아웃 샌드위치 전문점 미들오브더나잇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직원이라고는 다 늙은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현우 둘뿐이었는데 사장보다 현우가 더 가게 주인 같았다. 사장보다 현우가 더 자주 가게 셔터를 올리고 재료를 사와서 다듬고 냉장고를 채워두는 것도, 소스 통에 소스를 채워 넣는 것도, 계산대에서 주문을 받고 조리대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도, 가게를 청소하고 퇴근할 때 문 닫는 것도 다 현우가 했다.

 

오늘도 가게 문을 여는 사람은 현우다. 사장은 현우가 장사 준비를 다 하고 난 후에야 멀리서 어기적거리며 나타나는 게 일상이었다. 현우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주방 조리대 위에 장바구니를 올려두고 사온 것들을 꺼내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썰렁했던 냉장고를 채워두고 소스 통에 소스를 채워 넣었다. 바닥에는 언제 흘렸는지 모를 소스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런 건 흘리면 바로 닦아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게으른 사장은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현우는 냉장고에 기대어 둔 밀대 걸레를 들고 와 바닥에 묻은 소스를 닦았다. 말라붙어서 잘 안 지워질 것 같았는데 현우가 힘으로 밀어붙이니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다. 걸레 잡은 김에 아예 바닥을 싹 밀었다. 가게가 좁으니 청소하는 것 하나는 편했다. 물에 적신 행주 한 번 꾹 짜서 조리대를 쓱 훔쳤다. 계산대 위도 한 번 닦는다. 대충 걸레질이 끝나면 손님과 소통하는 창구인 녹슨 접이식 창문을 힘으로 열어젖힌다. 행주를 싱크대에 던져두고 카운터 옆 선반 위에 놓인 작은 카세트 라디오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낡은 카세트 라디오에서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만 지겹도록 흘러나왔다. 매일 틀어두는데도 테이프가 늘어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전보다 음질이 좀 나빠진 것 같기도 한데 테이프가 늘어나서인지 그냥 기분 탓인지는 알 길이 없다. 현우는 영어를 몰랐지만 매일 같은 노래를 들으니 얼추 가사를 외웠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들리는 대로 가사를 웅얼거리며 창문 밖으로 살짝 몸을 내밀었다. 저 멀리서 머리 다 벗겨진 사장이 쩍쩍 하품하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털레털레 걸어오던 사장은 현우를 발견하고 인사하듯 손만 슥 들어 보였다. 걸음이 빨라지진 않았다.

 

잠 잘 못 주무셨어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사장의 얼굴을 보고 현우가 물었다. 사장은 고개를 두어 번 돌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말도 마라 우리 층 배수관도 터졌지 뭐냐 자다가 물폭탄 맞았다. 어우 사장님 댁도요? 웬 봉변이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저번에 고친 후로 좀 오래 가나 했더니 어째 석 달을 못 버틴다. 성채의 배수관은 겉으로 다 드러나와 있었는데 낡아빠져서 툭하면 터지는 골칫거리였다. 얼마 전 현우네 집 근처 배수관도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골목부터 현우의 방까지가 온통 물바다였다. 현우 몸은 이제 몸 괜찮냐? 예 쉬었더니 멀쩡해졌어요. 현우가 요 닷새 동안 가게에 나오지 못한 것도 그 일 때문이었다.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현우여도 쌀쌀한 날씨에, 난방 안 되는 집에서 맞이한 물난리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일단 당장 필요한 것들을 다 사왔어요. 공연히 냉장고 문을 여는 사장에게 현우가 한마디 툭 던졌다. 소스는 대용량으로 사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빵도 그렇고요. 현우가 야무지게 말해줘도 사장은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저 밖에 나가는 거 안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사장님. 그래 그래 알았다니까 내가 늙어서 그런가 너 없으니까 자꾸 깜빡깜빡해. 현우가 살짝 볼멘소리하자 사장은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해지게 웃으며 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현우가 물난리 때문에 걸린 감기로 꼬박 닷새를 앓아누웠다가 출근했을 때 가게 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당장 오늘 장사를 해야 하는데 빵도 채소도 고기도 소스도 전부 다 똑 떨어진 상태였다. 매일 퇴근 전에 냉장고와 소스 통을 확인해서 부족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채워둬야 하는데 현우 없이 혼자 장사하는 동안 사장은 그걸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급한 대로 현우가 성채 밖 식료품점에 다녀온 덕에 장사 못할 뻔한 위기는 모면했다. 성채 안에도 식료품점이 있었지만데 현우가 굳이 내키지 않는 외출을 감행한 건 성채 안의 물가가 바깥보다 더 비쌌기 때문이다. 현우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물가고 나발이고 그냥 성채 안 식료품점에 가리라 다짐했다. 사장은 현우의 속도 모르고 아이구야 곡소리나 내며 파란 간이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원래 오픈 시간보다 한 시간 반 늦긴 했지만 아무튼 가게 문은 무사히 열었다. 미들오브더나잇은 오후 여섯 시에 열고 다음날 새벽 다섯 시에 닫았다. 주점도 아닌 주제에 영업시간이 이 모양인 건 순전히 사장이 야행성이기 때문이다. 밤에 잠이 안 오고 낮에 잠이 온다나.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현우는 누가 야식으로 샌드위치 테이크아웃을 하러 오겠나 이거 장사는 되겠나 의심했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장사가 잘됐다. 해가 들지 않으니 성채 안에서 낮과 밤의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였다. 가게의 주 손님으로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 골목에서 일하는 사람, 밤 시간대에 일을 나가는 사람, 낮에 일하고 퇴근하면서 늦은 저녁을 대충 때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망하지 않고 굴러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손님이 없다.

 

현우는 파리만 날리는 카운터 앞에 서서 눈을 끔뻑이다가 뒷목을 벅벅 긁었다. 어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손님이 없냐. 앉아 있고 싶은데 가게 안에 있는 의자라고는 사장이 엉덩이 붙이고 앉은 파란 플라스틱 의자밖에 없었다. 주방에 있던 사장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동실에 있던 냉동 새우 네 개를 꺼내 찬물에 퐁당 빠트리는 걸 보고 현우가 물었다. 새우 드시게요?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 곧 새우 찾는 놈이 올 거야. 가게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은 현우가 죄다 꿰고 있었다. 단골 중에 새우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사가는 사람은 없었다. 설마 현우가 가게에 못 나왔던 닷새 동안 새 단골이 생겼을 리도 없을 텐데. 현우는 사장이 새우를 담가 둔 그릇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독특한 차림새의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우씨 깜짝이야."

"…"

"어… 어서 오세요."

 

손님인가? 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남자는 얼굴이 조막만 하고 다리가 길어서 꼭 모델 같았다. 말기름을 발라 시원하게 쓸어넘긴 새카만 머릭다락은 뒷머리 길이가 뒷목을 다 덮었다. 넘겨지지 않은 건지 일부러 빼둔 건지 모를 머리카락 한 줄기가 남자의 턱선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얼굴을 이루는 전체적인 윤곽은 둥글둥글했는데 순하게 보이지 않는 건 무늬가 요란한 셔츠와 새빨간 레자 가죽 자켓 탓이 커 보였다. 꾹 다문 입매가 독특했다. 입이 작은 현우와 달리 남자는 입이 컸는데 입술은 현우만큼이나 도톰했다. 햇빛도 안 드는 성채에서 남자는 주황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이 현우를 응시했다. 얼굴 뚫리겠네…. 어쩐지 부담스러운 시선에 현우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이내 낯선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주문하시겠어요? 샌드위치 가게 아르바이트 7년 차의 서비스 정신은 투철했다. 그런데 현우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낯선 남자가 아니라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었다. 역시 오늘도 오셨구만? 늘 먹던 거로 드리면 되지요? 사장은 남자에게 퍽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아는 사이야? 현우는 둘 사이에 껴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 닷새 사이에 새 단골이 생긴 건가. 현우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사장은 물그릇에서 해동한 새우를 꺼냈다. 현우야 스파이시 쉬림프. 아, 예 사장님. 사장의 현우의 이름을 부르자 순간 남자의 눈썹이 움찔했다. 현우는 그런 남자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핫소스는 빼주세요."

"예?"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요."

 

아직도요.

 

남자는 뒷말을 덧붙이고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렸다. 쌍꺼풀이 진하게 진 커다란 눈이 현우를 응시했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전에 주방에서 사장이 현우를 재촉했다. 현우야 뭐하냐. 네에 지금 가요. 현우는 대충 대답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노릇하게 구운 식빵 사이에 오늘 사온 채소를 썰어서 넣고 사이에 새우 네 개를 끼워 넣었다. 원래대로라면 핫소스를 듬뿍 뿌려야 하는데 뿌리지 않으니 딱 봐도 맛이 밋밋할 것 같은 샌드위치를 랩으로 감싼다. 현우가 조리대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현우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아 좀 부담스러운데…. 손님에게 뭘 보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현우는 그냥 모르는 척했다. 랩으로 싼 샌드위치를 절반으로 자르고 유산지 봉투 안에 넣어 남자에게 건넨다. 지폐와 샌드위치를 교환하는데 현우의 손에 남자의 손이 스쳤다. 남자는 다분히 의도적인 손길로 현우의 손등을 쓸었다.

 

"안녕히 가세요."

"…또 봐요."

 

남자는 샌드위치를 받고서 바로 떠나지 않고 현우를 쳐다봤다. 성실한 아르바이트생 현우는 손님에게 뭘 보냐는 말 대신 안녕히 가시라 인사했고 남자는 그제야 발걸음을 옮겼다. 또 보자는 묘한 말을 남기고. 현우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뭐지, 저 사람.

 

 

 

 

 

기묘했던 남자가 가고 한동안 손님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출근하니 재료가 다 떨어져 있길래 근래 장사가 잘되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사장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무료했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에 멍하니 서 있던 현우를 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아까 왔다 간 놈이 그 놈이잖냐."

"아는 사람이세요?"

"요 며칠간 계속 왔던 깡패 놈이야."

"깡패요?"

 

그 놈이 현우 너 가게 안 나왔을 때 처음 우리 가게에 왔으니까 너는 오늘 처음 보는 건가? 그때부터 닷새 내내 오는 걸로 봐서는 어휴, 이거 새 단골 생겼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참….

 

여하튼 방금 왔다 간 빨간 레자. 저 놈이 이번에 새로 온 투견장 관리인이라더구만. 왜, 성채 동쪽에 마약굴 도박장 몰려 있잖냐 거기 도박장 중에 투견장이라 불리는 데가 있는데, 이름이 투견장이지 개는 없어. 사람만 있어. 개들 대신 사람이랑 사람이 싸우는 거야 개처럼. 개처럼 싸운다고 해서 투견장이라고 불리는 건지, 개만도 못한 취급 받는 것들이라서 투견장이라고 불리는 건지 뭐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거기서 하는 짓은 일반 투견장이랑 그냥 똑같다고 하대. 사람 둘을 링 같은 데에다가 맨몸으로 올려두고서 치고받고 싸우게 하고 구경꾼들은 그걸 보면서 누가 이길 지 돈을 건다고 하더구만. 그러다 가끔 죽는 놈도 나오는데 거기서 죽은 놈 시체 처리를 요 밑에 정육점 왕씨 녀석이 하잖냐. 내가 왕씨한테 들은 건데 원래 거기 관리하던 양반이 몇 주 전인가 갑자기 죽어버렸대. 여기서 급사야 뭐 흔한 일이지. 이번에 그 양반 자리에 웬 새파랗게 어린놈이 새로 들어왔다는데 그 어린놈이 아주 악질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이전 관리인보다 더 피도 눈물도 없다더라고. 그 놈이 오고 나서 룰이 바뀌었대. 링 위에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로. 이기면 사는 거고 지면 거기서 그냥 죽는 거야. 애당초 그런 거 구경하고 돈 거는 사람들이 어디 보통 싸이코겠냐. 룰이 바뀐 이후로 더 장사가 잘된다고 하더만 그래서 왕씨가 요새 일이 많아졌다고 난리야. 예전에는 일주일에 두어 번만 손질하면 됐는데 요즘은 쉴 틈이 없다고.

 

동쪽 마약굴이랑 도박장 하는 흑사회 놈들하고는 아예 마주하는 일 없이 사는 게 편해. 엮이면 골치 아파진다. 빨간 레자 또 오면 빨리 샌드위치만 주고 보내. 어휴, 흉흉해 죽겠어. 사장은 질색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현우는 칼을 잘 다뤘다. 칼질 하나로 연변 흑사회 정점에 오른 채 회장에게 칼 잡는 방법부터 직접 배운 실력이었다.

 

15년 전 연길을 거점으로 삼아 사현회라는 폭력 조직을 결성한 채 회장은 딱히 사업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을 회장이라 칭했다. 조직에서 회장님 내지는 보스로 불렸던 그는 조직원 중에서 유독 현우를 총애했다. 열일곱 살에 보육원에서 나와 길거리를 헤매던 현우를 주워와 조직원으로 기른 채 회장은 현우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제 오른팔 자리에 앉혔다. 조직원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말이 오른팔이지 사실상 그냥 정부가 아니냐며. 보스의 귀엔 들리지 않게, 하지만 현우의 귀에는 다 들리게 숙덕거렸고 현우는 자신의 험담을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틀린 말은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보스의 오른팔이라는 직함은 채 회장이 현우를 자기 최측근에 두기 위한 그럴싸한 명목에 불과했다. 현우는 주로 하는 일은 조직 보스의 오른팔로서 채 회장을 보좌하는 게 아니라 보스의 정부로서 밤시중을 들며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현우는 자존심보다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했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 어린 동생들은 손현우라는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셔누라고 불렀고 현우는 흑사회에서 그 이름을 사용했다. 조직 안에서 현우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딱 셋뿐이었다. 채 회장, 현우 본인, 그리고 거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채 회장의 아들 형원.

 

현우에게 빠지기 전, 남색 여색 가리지 않고 문란했던 채 회장은 매음굴 어느 창부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채 회장은 아들이 태어난 지 7년이 넘어서야 아들의 존재를 알았다. 그 무렵 형원은 홀로 형원을 낳아 기르던 엄마를 병으로 잃었다. 가게 포주가 형원을 어선에 팔아넘기려 하는 걸 눈치챈 가게 주방 이모가 몰래 형원을 빼돌린 덕에 형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 친부를 만났다. 형원은 커다랗고 쌍꺼풀이 진한 눈과 두툼한 입술, 그리고 독특한 입매까지 친부를 쏙 빼다 닮아 누가 봐도 채 회장 아들이었다. 망나니 깡패에게도 부성애는 있었는지 채 회장은 차마 자신과 똑같이 생긴 생면부지 아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거뒀다. 조직에서는  형원이 말도 행동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다고 형원을 거북이라고 불렀다.

 

일명 거북이 도련님. 현우는 스무 살 때 그 거북이 도련님을 처음 만났다. 명목상으로는 오른팔 실상은 정부인 현우는 보스의 집에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지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집에 방치된 꼬질꼬질한 형원을 보면 현우는 보육원 동생들이 생각나 짠했다. 겨우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는 게 어릴 적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여 괜히 맘이 쓰였다. 밥 못 먹었어? 배 안 고프니? 밤새 잠도 못 자고 보스에게 시달려 허리가 지끈거려도 아침밥은 꼭 먹어야 했던 현우는 자신의 식사를 차릴 때 밥 한 공기 더 퍼서 형원의 식사까지 챙겨줬다. 매운 걸 못 먹는 형원을 위해 빨간 양념이 묻은 반찬은 물에 씻어 수저 위에다 얹어줬다. 입에 좀 맞니?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네 나이 땐 한 끼에 세 공기 먹어도 돼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현우는 살뜰하게 형원을 챙겼고 처음에는 경계하던 형원도 점차 현우에게 마음을 열었다. 보스 정부랍시고 애새끼 새엄마까지 하는 거냐고 조직원들이 조롱해도 현우는 묵묵하게 형원을 챙겼다. 본디 남이 뭐라고 욕하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조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총알이 스쳐 지나간 왼쪽 팔뚝이 축축하다. 하얀 셔츠에 빨간 얼룩이 스민다. 고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현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자 형원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맺혔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현우는 형원을 안심시키려 애써 괜찮은 척하며 웃었다. 질기게 쫓아오던 놈들을 따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대로 계속 연변에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이렇게 그놈들을 따돌린 게 다 헛수고가 될 테니 떠나야 했다. 어디로? 어디로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현우의 왼팔을 바라보는 형원은 열네 살이었는데 또래보다 성장이 더뎌서 제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였다. 거북아. 현우가 거북이라고 부르자 형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우를 쳐다봤다. 툭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눈물이 와라락 쏟아질 것 같은데 두툼한 입술 꾹 물고 참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가자. 현우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골목길을 나서자 금방 나온 큰 길가에는 택시가 많이 지나다녔다. 현우가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기도 전에 택시 한 대가 알아서 현우 앞에 멈춰 섰다. 역 뒷골목으로 가주세요. 룸미러로 뒷좌석을 보는 운전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팔뚝이 피로 물든 남자와 꼬질꼬질한 어린아이의 조합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웠다. 운전사의 눈빛을 눈치챈 현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허리춤의 가죽 홀스터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운전사의 목, 정확히 동맥이 지나는 부분에 차가운 칼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역 뒷골목이요. 허튼수작 부리시면 피 봅니다.

 

현우가 자란 보육원은 간도역 뒷골목에서 10분 거리였다. 현우의 엄마는 간도역 뒷골목에서 일곱 살 현우에게 빵 하나를 쥐어 주며 말했다. 이거 먹고 있어 엄마 금방 올게. 순진하고 엄마 말을 잘 들었던 현우는 팥빵을 한 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은 현우의 생일이었다. 엄마는 형편도 어려운데 연길에서 유명한 식당에 현우를 데려갔다. 현우가 태어나서 그렇게 배부르게 맘껏 음식을 먹은 날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좀 더 크고 난 현우는 그때 베이징덕을 남김없이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생일 다음 날에 버려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금방 온다던 엄마는 현우가 빵을 다 먹어도 오지 않았다. 더운  여름 밤 버려진 장소에서 꼼짝도 않고 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리다가 죽을 뻔한 현우를 구해준 사람은 근처를 지나가던 보육원 선생님이었다. 금방 온다던 엄마는 일곱 살 현우가 열일곱 살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올 때까지 오지 않았다. 현우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때 배웠다.

 

5년 만에 돌아온 보육원 건물은 현우가 지내던 때보다 더 깔끔했다. 현우가 일을 시작하고 다달이 기부금을 보낸 보람이 있었다. 비록 깨끗하진 않은 돈이었지만. 보육원 근처에서 가까워졌을 때 형원은 현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병원으로 가요 형. 형원의 눈망울에는 불안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현우는 무릎을 굽혀 형원과 눈높이를 맞췄다. 

 

"거북이, 내 이름이 뭐라고?"

"셔누요."

"아니, 조직에서 쓰는 이름 말고."

 

내가 너한테는 알려줬었잖아. 현우가 다정한 손길로 형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현우. 손현우."

"그래, 맞아."

 

저기 초록색 대문 보이지? 초인종 누르고 사람이 나오면 내 이름 대. 손현우가 보내서 왔어요, 하면 거기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내가 저기서 살아 봐서 아는데 나름 살 만해. 밥도 맛있어 아 물론 나는 맛없는 게 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도 먹을 만할 거야. 밥 잘 먹어야 돼 거북아 그래야 키 크고 건강해져. 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나쁜 애들은 없을 걸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 있었을 땐 애들끼리 다 친구처럼 지내고 그랬거든…. 말이 횡설수설 길어진다. 현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형원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형은 같이 안 가요? 나는 어른이니까 못 가지. 저 버리는 거예요? 아니, 버리는 게 아니라…. 저 형이랑 같이 가면 안 돼요? 어 미안 그건 좀 힘들 거 같다. 왜요? 형한테 짐만 될 테니까? 아니 야 너는 무슨 쪼끄만 애가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요? 그게….

 

"너는 평범하게 살아야지."

 

아직 어리잖아. 현우가 생각해낸 최선의 변명이었다. 형원은 현우의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걸 표정으로 나타냈다. 나랑 같이 있으면 위험해져. 그래도 괜찮아요. 아니야 거북아 내가 안 괜찮아. 현우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내가 지금 꼴이 이래서 안아주지는 못하겠고…. 이별을 마주한 상황에서 형원은 울 것 같았는데 현우는 덤덤했다. 웃음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인데 되려 허허 웃었다. 형이랑 같이 갈래요 우리 가족이라면서요 형이. 형원은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현우는 새삼 진짜 이 애가 보스 아들이 맞구나 싶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도 닮은 거 같았다. 형이랑 같이 평범하게 살래요 저 버리지 마요 저는 형밖에 없는데. 현우는 형원이 조르는 것에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약해지면 안 됐다. 마음을 단단하게 먹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올게. 그래서 현우는 15년 전 엄마가 제게 그랬던 것과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희망고문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면서도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아 거북,

 

 

아니 형원아. 알았지?

 

 

 

 

 

 

 

 

 

 

다섯 시에 가게 셔터 내리고 퇴근하면 집에 와 대충 씻고 바로 엎어져 잠들었다가 정오가 넘어서야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다. 방 안의 공기가 눅눅했다. 자는 동안 흘린 식은땀 때문에 온몸이 축축했다. 현우는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 동안 축축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 얼룩과 곰팡이가 은하수처럼 피어나 지저분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쩐지 왼팔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왼쪽 팔뚝에 남은 흉터를 매만졌다. 잊고 살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벌써 8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흐릿해진 부분이 없어 현우를 힘들게 했다. 찝찝한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벽에 박혀 있던 못에 대충 걸어둔 시계를 보니 짧은 바늘이 10에 가 있었다. 일찍이어도 너무 일찍 눈이 떠졌다. 조금 더 자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현우는 다시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다섯 시간도 채 못 잔 이유인 그 꿈 때문에.

 

셔누 형.

 

꿈에서 깨기 직전 커다란 눈망울은 현우를 그렇게 불렀다. 현우가 침대 밖으로 나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꺾고 돌리면 얼마 안 되는 세간살이가 현우의 몸에 부딪혔다. 좁아터진 방에서 생활하는 데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입고 있던 민소매 티 옷자락을 끌어당겨 마르지 않은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흑사회 놈들하고는 아예 마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장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한숨 같은 헛웃음을 흘린다.

 

 

 

 

 

가게 문을 여섯 시에 연다면 그 전에 영업 준비를 해야 하니 최소 다섯 시에는 출근해야 하는데 명색이 가게 주인이라는 사장은 제 시간 맞춰 오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현우가 영업 준비를 다 한 후에야 쩍쩍 하품하며 느지막이 등장했다. 오늘도 다를 건 없었다. 오래된 가게는 접이식 창문 뿐만 아니라 셔터에도 녹이 잔뜩 슬어서 날이 갈수록 들어 올리는 게 힘들어졌다. 오늘따라 특히 더 말썽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셔터와 힘 싸움을 하고 있는 현우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가게 문을 열어요? 셔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현우가 뒤를 돌아보니 주황색 선글라스에 빨간 레자 가죽 자켓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최근 새로 생긴 기묘한 단골손님이자, 새파랗게 어린데 악질로 유명한 투견장의 새로운 관리인이자, 현우를 부담스럽게 쳐다봤던, 초면이지만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듯한 그 남자였다. 아, 예 사장님이 늦으셔서 제가 자주 열어 놔요. 현우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오픈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일찍 오셨네요. 여섯 시에 문 여세요? 네,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려서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네?

 

"제가 기다리는 거 잘하잖아요."

 

아… 그러세요? 현우는 남자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쪽이 기다리는 거 잘하는지 제가 어떻게 아는데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은 속으로 삼킨다. 현우가 창문을 열고 가게 바닥을 밀대 걸레로 훔치며 장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남자는 현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현우가 아무리 무던하다 해도 그렇게 집요한 시선을 모를 수는 없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무시하며 평소보다 느리게 좁은 바닥을 밀대 걸레로 밀었다.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목소리가 현우와 남자 사이의 어색한 정적을 깼다. 영업 준비는 다 끝났는데 사장은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섯 시부터 오픈이긴 한데 그냥 지금 주문받을게요 뭐로 드릴까요? 눈을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지친 현우는 차라리 빨리 샌드위치 쥐여주고 보내는 게 속 편하겠다 싶었다. 저번에 먹던 거로 주세요. 스파이시 쉬림프요? 네, 핫소스 빼고. 예, 스파이시인데 핫소스는 빼고. 현우는 몸을 돌려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냉장고 안에서 냉동 새우를 꺼냈다. 등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다.

 

 

 

 

 

남자는 생각보다 더 집요했고 결국 현우는 샌드위치를 다 만들 때까지 남자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그 시선에 현우는 괜히 긴장한 건지 핫소스를 빼는 걸 까먹고 새우 위에 핫소스를 시원하게 끼얹었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소스가 새우와 야채 사이에 스며든 후였다. 남자는 현우가 핫소스 통을 집는 걸 봤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대신 소스를 뿌린 현우의 손이 굳은 걸 보고 넌지시 말했다. 물에 씻어서 주셔도 돼요. 예? 자주 그렇게 해줬었잖아요.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남자의 말에 현우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어리둥절했다. 남자는 현우와 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말했다. 현우는 어디서 본 거는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를 처음 본다고…

 

"셔누 형."

 

생각했었는데.

 

남자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현우는 흠칫했다. 본능적으로 도마 옆에 내려둔 식칼에 손을 얹었다. 8년 전 조직에서 쓰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느낌이 안 좋았다. 조직이 박살 난 지 8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자신을 쫓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경찰인가? 여긴 경찰도 들어오기를 꺼리는데. 현우는 제 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현우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남자는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눈에 걸치고 있던 주황색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를 잊었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이? 실망 어린 커다란 눈이 현우를 응시한다.

 

"나 기억 안 나요?"

 

누구는 8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남자는 어떻게 네가 내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서운함 가득한 얼굴로 현우를 바라봤다. 순간 현우는 간밤에 꾼 꿈이 떠올랐다. 커다랗고 쌍꺼풀이 진한, 자신을 바라보던 어린 눈망울. 칼 손잡이를 쥔 현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경계하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설마….

 

"…너 설마 거북이니?"

"거북이 아니라 형원이."

 

오랜만이에요, 형.

 

그 별명도 되게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현우가 형원을 알아보자 형원의 입꼬리가 빙그레 호선을 그린다. 눈은 여전히 슬퍼 보였다. 현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형원을 바라봤다. 형원은 그날 현우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직 사람이었다. 조직원이 아니라 보스의 아들이었지만. 연변을 떠나야 했던 현우가 책임질 자신이 없어 자기가 자란 보육원에 버리듯이 맡겼던 그 아이는 이제 현우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사장은 오늘따라 정말 늦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에게 형원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설명하는 건 현우에게 곤란한 일이었으니까.

 

 

8년 만에 상봉한 사이였지만 마냥 얼싸안고 반갑다 하기엔 현우는 형원에게 켕기는 게 있었다. 둘 사이에는 침묵만 흐른다. 카세트 라디오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아니었다면 현우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른다. 샌드위치… 새로 만들어 줄까? 어색한 침묵을 깬 건 현우였다. 형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주셔도 괜찮아요. 어우 아냐 너 매운 거 못 먹잖아 우리 가게 핫소스 많이 매운데…. 대화는 평이하다. 현우가 샌드위치를 다시 만드는 동안 형원은 현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고 현우는 느껴지는 형원의 시선을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금방 새로 만든 샌드위치를 포장해 형원에게 건네며 현우가 말문을 뗐다. 많이 컸네. 스스로 말하면서도 너무 형식적인 것 같다 생각했다. 그럼요 벌써 스물둘이에요. 형원은 능청스레 대꾸한다. 형이 저 두고 가버렸던 게 딱 지금 제 나이 때였죠. 형원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현우의 죄책감에 칼을 꽂으면 현우의 눈빛은 흔들린다. 금방 온다고 했었는데 말이에요 형.

 

"저기, 형원아 그땐…"

"미안하다고 하시게요?"

"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그 말 들으려고 팔 년 동안 형 찾아다닌 거 아니니까.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현우는 입이 열 개라도 형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형원은 고개 숙인 현우의 정수리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형 퇴근 언제 해요?"

"다섯 시에 하는데… 왜?"

"저 형한테 할 얘기가 아주 많거든요."

"…"

"저희 층 배수관이 터졌지 뭐예요."

 

물난리 나서 집에서 잠 못 자요. 형원은 현우가 자신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현우는 늘 형원에게 물렁했고, 지금은 형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장은 열 시가 되어서야 가게에 한 번 나왔다가 손님도 없는데 굳이 나와 있을 필요가 있냐면서 금방 돌아가 버렸다. 사장의 말대로 오늘도 손님이 없었다. 형원까지 합쳐 세 명이 오늘 매출의 전부였다. 현우는 주방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내내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그랬는지 깜빡 졸았다. 입 벌리고 고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현우를 깨운 건 현우가 말한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가게에 온 형원이었다.

 

다 큰 남자 둘이 들어오니 1평 조금 넘는 방 안이 꽉 찼다. 현우 혼자 있을 때도 좁았는데 형원까지 있으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었다. 좁디좁은 방 안, 둘이 눕기엔 턱도 없는 침대, 그 침대의 스프링 다 죽은 매트리스 위에 현우와 형원은 나란히 앉았다. 지겨운 캘리포니아 드리밍마저 없으니 둘 사이엔 적막만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현우의 입 밖으로 나온 건 진부한 말이다. 하지만 현우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그날 이후로 형원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게 된 건지. 현우의 물음의 형원은 고개를 돌려 현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현우가 형원을 마주한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형원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형이 보기엔 어떻게 지낸 것 같아 보여요 저? 현우는 형원의 말에 정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눈으로 형원을 훑었다. 형원은 계속 생글생글 웃었다.

 

"딱 봐도 평범하게는 못 지낸 거 같죠?"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덧붙이는 목소리가 차갑다. 현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형원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육원 생활 나쁘진 않았어요 형 말대로 살 만은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계속 기다렸어요. 형이 금방 온다고 했고, 저는 형을 믿었으니까. 현우의 시선은 점점 더 바닥으로 처박혔다. 형 어머니가 그러셨다면서도 금방 온다고 했는데 결국 오지 않으셨다고. 설마 형도 그럴까 싶었어요 형이 그랬잖아요 기약 없는 기다림, 어차피 오지 않을 거면서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정말 잔인한 짓이라고…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형이 저한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형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현우의 죄책감을 들쑤셨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은 안 오더라고요. 기다리기만 하다간 정말 평생 다시 못 만날 거 같아서 무작정 형 찾으려고 보육원에서 나왔어요. 어쩌겠어요 형이 안 오는데 제가 가야지. 엄마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빠는 칼 맞아서 돌아가시고…. 저한테 가족이라고는 형밖에 없었잖아요. 형 찾아서 헤매고 헤매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형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가 그간 동쪽에서만 있었어서 그런가 이제야 만났네요.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에요."

 

형원이 현우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죽으려 하는 현우의 표정이 형원은 조금 웃겼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형 평범하게 살라고 했는데 제가 그렇게 못 살아서 그래요? 형, 저는 형이 말하는 평범이라는 게 뭔지 몰라요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는데 제가 무슨 수로 평범하게 살아요? 깡패 아들이 깡패 된 거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 저한테는 이게 평범한 거예요. 그러니까 현우 형.

 

"고개 들고 저 좀 봐요, 네?"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봐서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준 것뿐인데 형이 왜 죄인인 것마냥 굴어요. 형원이 옛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우는 차마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형원의 말을 듣기만 했다. 저를 버린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저 그래도 형을 미워한 적은 없어요. 형원이 현우의 등을 쓸었다. 현우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눈을 감았다. 현우는 형원이 자길 잊을 거라 생각했다. 보육원에서 잘 지내다 보면 나 같은 건 금방 잊겠지. 정작 현우 자신도 자길 버린 엄마를 서른이 된 지금까지 완벽하게 못 잊었으면서 형원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네가 그렇게 날 기다릴 줄은 몰랐어."

"형이 기다리라고 했으니까요."

"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를…."

"형을요? 제가요?"

 

제가 어떻게 형을 잊어요. 형원이 그렇게 말하니 현우는 더더욱 죄인이 되는 것 같았다. 현우가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걸 바라보며 형원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형은 여전히 순진하구나. 다행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형원은 현우의 등을 쓸며 다정하게 고백했다.

 

"형은 못 볼수록 잊혀지는 게 아니라…"

"…"

"애틋해지던데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현우가 고개를 들어 형원을 봤다. 형원은 이제야 마주한 현우의 얼굴을 보고 광대가 봉긋 올라가도록 웃어 보였다. 어린 시절과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형원이 현우의 죄책감에 마지막 한 방을 날린다. 보고 싶었어요, 형.

 

저 이제 그만 기다려도 되죠?

 

 

 

 

 

 

 

 

 

 

만약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복귀했었더라면. 8년이 지난 지금도 현우는 그날에 대한 후회를 떨쳐내지 못했다.

 

경찰이 거점을 습격해 조직이 괴멸당한 날 현우는 혼자 다른 곳에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날 현우는 형원이 새우가 먹고 싶다고 졸라서 시내에 있는 수산시장에 갔다. 양손 가득 새우를 사 들고 돌아오는데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건물 복도에 힘없이 축 늘어진 조직원들을 지나 현우가 다급하게 채 회장의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채 회장은 마호가니 책상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익숙한 비린내가 현우의 코끝을 스쳤다. 피 냄새에는 이골이 난 현우였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던 집무실의 카펫은 채 회장이 쓰러져 있는 곳을 시작으로 붉은 얼룩이 스며들어 있었다. 현우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채 회장의 꼴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현우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 줄 때 채 회장은 늘 사람을 찌를 땐 목을 노리라고 말했다. 얼음송곳 쥐듯이 칼을 거꾸로 쥐고 그냥 똑바로 찍어라. 얼음 깨부수듯이 목 부분의 동맥을 깊게 찍으면 된다. 현우 너는 힘이 좋으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다. 채 회장의 시신이 딱 그 꼴이었다. 넋이 나간 현우가 애타게 불러도 싸늘하게 식은 채 회장은 대답이 없었고

 

…형.

 

죽은 채 회장 대신 어린 목소리가 현우를 불렀다. 테이블 아래에서 피를 잔뜩 뒤집어쓴 형원이 기어나왔다. 현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형원에게 뭐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현우는 형원을 안아 들고 집무실 한쪽 벽을 꽉 채운 책장을 더듬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괜찮아, 괜찮아. 현우는 형원을 달래기 위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현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어디쯤이었는데…. 다른 책장보다 유난히 한국어로 된 책이 많은 책장을 밀었을 때 책장이 뒤로 쑥 밀리고 집무실에서 바로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나왔다. 어느 날 채 회장이 신기할 걸 보여주겠다며 현우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때 현우는 겉으로는 신기해하면서 속으로는 보스가 쓸데없이 영화만 많이 보셨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기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용케 따라붙은 놈들이 있어 현우와 형원은 도망치는 데 애를 좀 먹었다. 형원을 지키느라 왼쪽 팔에 스치는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따라붙던 무리를 겨우 따돌린 현우는 좁은 골목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이제 어쩌지. 하루아침에 갈 곳 없어진 건 현우도 형원도 마찬가지였다. 추적이 계속 따라붙을 지도 모르니 연변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현우는 고개를 들고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다가 슬쩍 형원을 곁눈질했다. 얘는 어쩌지. 데리고 도망치긴 했지만 현우는 형원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라면 어디로든 가서 어떻게든 살 수는 있겠지만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가진 것 없고 갈 곳 없는 스물두 살 현우가 형원을 위해 내린 선택은 형원을 자신이 자란 곳에 맡기는 것이었다. 형원의 고집을 꺾기 위해 금방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말 한마디가 무거운 죄책감이 되어 돌아올 줄 그때의 현우는 몰랐다.

 

 

 

 

 

 

 

 

 

 

그날 이후 형원은 거의 현우의 집에서 눌러살았다. 형원은 십이 층에서 산다고 했다. 현우는 십이 층에 있는 배수관 중 터진 배수관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도 제 집에 오는 형원을 밀어내지 않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동거하고 있었다.

 

현우가 자신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다는 걸 형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척하면서 잘 이용했다. 형원은 현우가 조직이 괴멸한 후 다른 조직에 들어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우는 애초에 깡패짓이 적성에 안 맞는 사람이었다. 현우와 형원은 채 회장에게 거두어졌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현우가 그냥 길가를 떠돌던 순진한 개새끼였던 것에 비해 형원은 뱀 같은 채 회장의 피를 물려받은 뱀 새끼였다. 이제 열네 살 어린애가 아니라 스물두 살 성인인데 현우의 눈에 형원은 아직도 그 시절 아기 거북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형원은 그 점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하지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죄책감을 이용해 현우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 뒀으니 집어삼키는 건 시간문제니까. 형원은 거북이가 아니라 뱀이었다.

 

남자 둘이 살기엔 1평 조금 넘는 공간은 비좁기 짝이 없었다. 현우 혼자 누워도 꽉 차는 침대에 형원까지 들어가 누우니 몸과 몸이 바싹 달라붙었다. 방 안의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좁은 방 좁은 침대 위에 성인 남성 둘이 엉겨 붙어 있으니 당연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어릴 때 생각나요 자주 같이 잤잖아요. 형원이 방긋 웃으며 옛날이야기를 꺼내자 현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랬었지 너 자면서도 내 팔 꽉 붙잡고 안 놓고 그랬는데. 오랜만에 추억을 곱씹었다. 현우는 형원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 정말 콩알만 하고 귀여웠는데 언제 이렇게 컸담. 애들은 역시 쑥쑥 큰다더니. 형원은 현우가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얼굴에서부터 형원을 기특하게 보는 게 느껴졌으니까. 형원은 일부러 맑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밤에 아빠가 형 데려가면 그게 그렇게 질투가 났었어요.

 

그러면서 현우의 다리에 제 다리를 얽었다. 질투 났다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톤이 낮았다. 그 말에 현우는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슬쩍 형원의 눈을 피했다. 형원이 그걸 가만둘 리 없었다. 형, 설마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그 나이쯤이면 다 알죠 아빠 방에서 밤에 형이 아빠랑 뭐 하는지. 게다가 저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사창간데 더더욱 잘 알지 않겠어요 방문이라도 제대로 닫았으면 몰라.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아빠는 중요한 부분에서 허술하셨어요.

 

그러니 칼 맞아 돌아가실 만했죠.

 

그 말에 현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형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현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형, 그냥 저희 아빠 명줄이 거기까지였던 거예요. 형 잘못이 아니에요. 아빠는 못 구했어도 저는 구해줬잖아요. 그럼 된 거죠. 위로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형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람 죽은 거에까지 죄책감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형은 만약 그때 형이 조금만 더 일찍 돌아왔으면 그 꼴이 안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원은 먼저 잠든 현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현우의 이마부터 코끝까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현우는 보육원에서 나와 길거리를 헤매던 자신을 거둬준 사람이 형원의 아빠라고 했다. 정말 고마우신 분이지. 현우가 채 회장에 대해 말할 때마다 형원은 아니꼬운 얼굴로 현우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그렇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수가 있나. 형원은 어릴 적부터 현우의 과도한 충성심이 맘에 들지 않았다. 형이 그렇게 충성해봤자 어차피 우리 아빠는 그냥 형 말 잘 듣는 개새끼라고 밖에 생각 안 해요. 형원은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현우를 아끼지는 않는단 걸 알고 있었다.

 

채 회장은 중요한 부분에서 허술했다. 형원을 데려와 집에 두긴 했지만 제대로 된 양육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애들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큰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현우가 아니었더라면 형원은 그 집에서 오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방치하는 와중에도 꼴에 제 핏줄이랍시고 채 회장은 틈틈이 형원을 불러 칼 잡는 법과 찌르는 법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네 몸이랑 네 거는 네가 직접 지켜야 하는 거라고 가르쳤다. 형원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채 회장은 형원이 삐쩍 마르도록 버려두고 가끔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 형원이 눈에 들어오면 형원을 때리기도 했지만 형원은 그가 자신에게 칼 쓰는 법을 알려준 것만큼은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아빠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스승이었다고는 여길게요. 사람의 어디를 어떻게 어느 정도 찌르면 죽는지 그가 가르쳐 줬기에 형원이 그를 죽일 수 있었으니까.

 

채 회장이 가끔 밤마다 형원에게서 현우를 빼앗아 가면 형원은 열린 방문 틈 사이에서 제 아버지를 받아내는 현우를 죽은 눈으로 바라봤다. 네 몸과 네 거는 네가 직접 지켜야 한다. 형원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채 회장은 중요한 부분에서 허술했다. 그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자기 닮은 자기 아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았을 테고, 아들 손에 죽는 일도 없었을 텐데. 형원은 채 회장과는 다르게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으로 일을 벌였다. 현우가 자기를 데리고 떠나지 않고 보육원에 맡겨버린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형원에게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그 시간을 지나 형원은 자랐고 이제 형원은 현우에게 짐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8년 전처럼 현우가 자신을 두고 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현우가 그 시간을 형원에 대한 죄책감으로 짊어지게 되었으니까.

 

잠든 현우를 제 품에 안은 지금 형원은 현우를 잃었던 시간 동안 시달리던 결핍이 사라지고 만족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현우의 도톰한 입술에 조용히 입맞추며 형원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형을 빼앗기지 않겠다. 이제 완전히 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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