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여 있던 아는 절로 가불고, 저 짝 살던 아가 열로 와버려 그렇다.
난리통에 하나 잘 된 것인지, 바뀐 사람 이름은 손현우로 똑같더랬다.
.. 잘 된 것인가, 는 앞으로 두고 봐야하겠지만.
픽셀 안에 두 사람.
한쪽 벽면에 꽉 들어찬 커다란 덩치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앉혀져 있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맞는 말일 법도 한 것이 양 손은 끌려와 의자 등받이 부분을 뒤로 단단히 묶여있었고 그 큰 덩치에 비해 얇은 두 발목도 그러했다.
태평하게 잠도 많지, 지 웬수한테 잡혀와놓고 재워놓으니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 마다 부풀어오르는 가슴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잘도 자는 그의 아직 뺵빽한 머리꼭지를 시선으로 꾹 눌러보았다.
... 이럴 사람은 아닌데.
죽었나, 생각과 동시에 덩치가 눈을 떴다.
그럼 그렇지.
“ 잘 잤어?”
흐릿한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분홍색... 그리고 형원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더듬어 안경을 찾으려고... 했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네. 바로 결박을 풀어버리지 않고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여기가 어딘가... 살펴보는 행위는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예능 찍나?
저 버릇 역시 직업병인거지. 치밀하다. 손에 묶인 걸 끊어내면 위에 설치된 트랩이...
“ 형원아, 이거 뭐야?”
엇.
... 그에게 이름이 불린 게 처음이었기에 채형원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이렇게 다정한-있지도 않은 마이크에 들릴 까봐 낮게 말한 것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겠다고 인정했다-어조로, 조금 다급하게, 눈썹을 축 내리고 말이다.
처음을 성 떼고 시작한 것에 가산점을 부여하고 싶어졌다.
우린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데.
대답 대신 성큼 다가가 그의 얼굴을 세게 틀어쥐었다. 커다란 손 안에 갇힌 두 눈은 당황하여 이리저리 굴러가다가 의지할 수 있는 것에 시선을 고정한다. 어두컴컴하고 더러운 창고-세트라고 생각했다-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별. 커다란 트임에 담긴 은하수를 쳐다본다.
날카로운 맛이 좀 사라진 것 같다, 덩치는 더 커진 것 같고. 특히 팔뚝이. 언제나 신경이 곤두 서 있던 눈매가 상당히 유해졌다. 아예 죽어있던 안광이 돌고 동그란 눈알이 사뭇 천진하게 빛난다...초롱초롱? 거지같은 군부 시스템과 개인의 신념과 노력으로는 털끝 하나 바뀌지 않을, 바뀌지 않는, 바뀌지 않은 부정에 그런 것-소외된 이들을 위한 노력-에 대해 남들보다 훨씬 큰 사명을 가지고 있던 탓인지 더욱이 빨리 짓이겨진 군인은 어디가고. 웬...
껍데기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채형원은 아마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다.
한참 동안이나 말랑한 볼을 움키고 있어서 슬슬 아프기 시작했는지 빈틈없는 눈썹 한쪽을 들어올린 채 구속 안에서 두툼한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고 움직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자니 아까의 ‘느낌’ 은 더욱 더 확실해졌다.
“ 너... 살 쪘구나.”
“ 어우씨,”
손현우는 호칭과 위계서열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형원과 동갑인 민혁과 기현이 이름으로 불러도 개의치 않았고 그래서 형원이 그를 너, 라고 한 것보다 살쪘다는 말에 약간... 서운했다. 신경이 쓰였다. 어젯밤엔 분명...
튀어나온 입술이 왠지 억울해 보이는 것 같아 그의 볼을 툭툭 쳤다.
못 본 새 잘 먹고 잘 잤나보네.
다리 한쪽 나갔대서 기대했더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유니버스 촬영인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니까... 이거 다리가 아니라 머리가 다친 거 아니야? 몇 개월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배는 순해지고 멍청해진 손현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까 꽉 잡힌 탓에 벌건 손자국이 남은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됐고, 얼른 끝내면 보내줄게.”
그거, 어딨어?
... 그게 뭔데.
“ 지금 뭔 얘기를 하는 거야? 촬영 중인 거 아녔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 왜 모른 척을 할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화를 삭히려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런 인간은 아니었다. 확고한 부분이 있어 입을 아예 다물어 버릴지언정 눈에 뻔히 보이는 술수로 상황을 모면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6년은 생각보다 기니까.
“ 그럼 직접 보든가."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발목을 풀어주었다. 발목만. 손목은 여전히 뒤로 묶인 채 천천히 일어났다.
-
건물 한 면이 박살나 있었다.
완전히 초토화된 도시가 둘을 맞았다.
날씨는 무참히도 맑아서 햇살 아래, 시퍼런 하늘 아래 죽어가는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우는 낯익은 도시의 마지막 숨을 맡을 수 있었다. 오물과 하수구, 방치된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비강을 메웠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아니, 누구일까.
채형원은 말을 잃은 손현우를 쳐다봤다.
새삼스레. 대체 처음 본다는 시늉을 왜 하지. 평소같이 쓰레기라고 부르지도 않고.
... 이 사람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닌가.
-
" 기현아, 뱉으면 그게 다 말이야?"
" 찾아줬더니 왜 지랄이지?"
손현우는 제 발로 의자에 앉아 얌전히 발목까지 묶인 채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니는 태도부터 글러먹었어. 내가 잡아왔냐? 내가 저거 바꿔치기 했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납득을 하지.
" 아, 가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모르겠으면 다시 설명해줘?"
기현이 형원을 밀어 현우 옆 의자에 앉힌-내팽개쳤다-뒤 종이 한무더기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여기 있는 저 손현우라는 사람이랑, 저기 또 어디 밖에 있는 평행우주 뭐시기의 손현우랑 바뀌었다고.
" 왜-"
" 왜인지는 물어보지마. 나도 모르니까."
" 그래, 하긴 니가 그거 알았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냐."
진즉 저기 가서 한자리 해 처먹었겠지.
기현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종이 뭉치를 형원의 품에 안겨주더니-던졌다-성큼성큼 걸어나갔다.
" 성질머리하고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손현우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재빠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 기현이 말이 사실이면, 이 사람은 그냥... 민간인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 야, 기현아!"
-
날라가는 글씨로 사표: 사유; 사장. 라고 대충 휘갈긴 종이 한 장을 냅다 후려침 당하고서야 기현을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 이거, 돌려놓는 방법이 있냐?"
그 말을 하며 채형원은 턱짓으로 손현우를 가리켰다. 이거가 난가...?
" 없어."
" 뭐?"
" 몰라."
" 왜?"
" 나도 모르지, 씹탱아... 그냥 기다려."
" 그럼 그때까지 저걸... 어떻게 하는데."
둘은 동시에 손현우를 쳐다봤다.
" ... 뭐... 네 손님이잖아. 잘 대접해드려."
일말의 관심도 없어보이는 말투로 기현이 대꾸했다.
" 하아... 쯧,"
채형원은 몸을 굽혀 쪼그려 앉아 손현우의 발목 결박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왠지 간지러운 기분에 눈만 살짝 내려 분홍색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 뭐하냐? 손목 풀어주고 발목은 알아서 풀라고 하면 되잖아."
... 아.
... 평행우주라고 했나. 무슨 우주든, 그게 얼마나 많던 사람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는구나. 역시나 지겹도록 다투는 저 둘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
손현우가 민간인임이 확실해지자 채형원은 그렇게도 미안하다고 했다.
정확한 나이를 알고 나선 꼬박꼬박 형이라 부르며 존대를 해왔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불안한 구석은 있었는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손현우를 밖에 나가게 했다.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고, 이해도 가지만 그 얼굴로 눈앞에서 문을 닫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주 약간, 정말 조금만 서러워졌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아닌가. 다른 상황에 놓인 같은 사람인건가.
그렇게 웃는구나. 그런 식으로 웃을 줄도 아는구나. 그 사람이 웃는 방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유독 별이 많이 보였던 밤이 있다. 망설이며 해줬던 얘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밤하늘에 콕콕 찍어두고 싶었다. 언젠가 별이 또 많이 빛나는 밤에 다시 들을 수 있게.
북두칠성 빼고 별자리를 하나도 볼 줄 모르는 이 사람이 여기선 밤길에 밝은 사람이고, 평생을 군인으로 산 그 사람은 거기에선 화합의 노래를 부르고 있구나.
" 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 너는... 우리는 같은 팀이야, 거기에선. 우리는 같이 노래를 불러."
나는 그쪽 사람인데, 거기라고 하니까 조금 어색하다.
허허, 웃으며 돌아보니까 같이 웃어주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우린 여기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데, 그 곳에선 ... 연인이었다는 얘기를, 귀와 뒷목이 벌겋게 익는 게 보일 정도로 부끄러워하며 했다.
" ... 거기 형, 아니... 여기 있었던 손현우도... 저랑...“
꺼내놓고 나니 창피한 마음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 ...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러지 않을까.
그럴거야.
별들이 깜박거렸다.
-
어떻게든 손현우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주고 싶다.
이곳은 너무 위험해서. 매순간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그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섭다.
" 형원아, 잠깐 나갈래?"
건물 옥상에 올라가자는 소리였다. 커다란 헬리포트가 있는 옥상. 역시나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지금 해 지길래...
" 좋아요."
구름이 주홍빛으로 배어들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아 사방이 고요했다. 해를 담은 두 눈이 붉다.
" ... 노을 예쁘네."
푸하학,
... 미안해요.
" 아냐, 내가 생각해도 좀 어색했어."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해는 시뻘겋게 타올랐다.
발갛게 물든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야?"
너랑 어떤 관계야?
뒷말은 속으로 삼킨 채로.
" 형은... 군인이에요. 그건 알고 있었죠?"
" 짐작은 했지."
" 저 형이 훈장 받는 것도 봤어요, 하하... 거기다가 폭탄 던졌는데."
벙찐 손현우의 표정을 보고 채형원은 몸을 접어가며까지 웃어댔다.
" 장난, 장난이에요. 폭탄은 아니고 형 가슴에 뭐 달릴 때... 그거 달아준 할아버지께만."
던지려다가 말았지... 당신이 있었으니까.
" 너... 생각보다 많이 화끈하구나."
" 화끈하대, 아. 진짜,"
형원은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큭큭댔다. 그럼요, 화끈하죠.
" 형은 짱이었어요. 손 대위? 하면 다 알정도로."
... 완전 유명했어요.
" ... 너랑 나랑 다른 편 아냐?"
" 그쵸, 그쪽에서나... 우리 쪽에서나."
" 너랑... 너는 나 싫어해?"
손현우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 맞추려고. 고개를 휙, 돌려버리네...
" 안 싫어해요. 안 싫어했어요."
" 그래.. 그렇구나."
잠깐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새 해는 이미 넘어가버리고 일찍 뜬 달만이 빛났다. 짙게 남긴 손톱 자국같은 초승달이었다.
" ... 형, 저는-"
쿠궁,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리더니 옥상 구멍 아래로 전부 무너졌다. 속에 구멍이 뚫린 커다란 원기둥 같이. 커다란 통로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형원의 허벅지에서 무전기가 진동했다. 더 세게 움직이는 건물에 그를 꽉 붙잡았다.
" 야, 너 괜찮아?"
" 괜찮-니까 무전했지!“
" 끊겨서 잘 안 들려!"
" 뭐라고? 야, 됐고 당장 거기로 –내.“
" 뭐?"
" 아, 당장 구멍으로 보내라고! 손현우!"
무전기에서 귀를 떼고 채형원과 손현우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구멍을 한번.
" 답-해 죽겠네, 아오! 시간 없어, 웜홀(wormhole)생-을 때 빨리 가야하-"
무전이 그대로 끊겼다. 몇 번이고 손으로 내리쳐 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건물은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 형원아-"
" 형,"
엄청 보고 싶을 거 같아요.
그 말에 현우가 웃었다.
나도. 손현우는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듯, 가볍게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곧 보자.
-
... 우린 어떻게든 꼭 만나
찾아낼게, 달려갈게...
-
허억,
형원이 눈을 번쩍 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심장에 차오른 무언가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 토해내고 싶다. 너무 벅차서. 이 감정이 너무 벅차다.
손으로 옆을 더듬었다.
손 끝에 닿는 익숙한 온기를 파고든다. 그를 꽉 껴안는다. 딱 아까의 꿈만큼.
" 어, 형원아."
자다 깨 잔뜩 찡그린 바보같은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조차 입 맞추고 싶다. 네가 여기 있다는 확신을 바라. 이 온도가 허상이 아니길 바라...
" 형, 저 형이 죽는 꿈 꿨어요."
-
형은 잘 갔을까.
일주일이 됐는데 이 우주의 손현우를 만나지 못했다.
" 뭐해, 미쳤냐?"
유기현이 채형원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다.
" 신호 안 보여? 정신 안 차-"
손에 쥐고 있던 탄의 안전장치를 이로 빼낸 후 당장 던졌다.
둘, 셋.
펑!
" 아오씨발, 거 드럽게 아프네."
" 나 초등학교 때 축구부였다고. 몇 번을 말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바이크에 시동을 켰다. 멀어져가는 시선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담겼다.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군부 청사 근처 건물에 숨어있었다. 손현우를 만나려고.
청사 뒷문으로 군용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 어딜 가는 거야."
무전을 켜 유기현에게 추적을 부탁했다. 밑에 세워둔 바이크에 올라탔다. 차는 도시를 벗어나 외곽으로 향하는 듯하더니 곧 방향을 틀어 '폐허' 쪽으로 향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바이크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갔다. 품에 넣은 총을 만지작거리면서.
장정 둘이 사람 하나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한 발. 아직 쓰러지지 않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발.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정확히 맞아떨어질까. 한 치 오차도 없이. 최악의 상상 그대로...
채형원은 손현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긴 손가락을 뻗어 먼저는 눈썹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볼을 쓸었다. 그 볼이 가지고 있던 온도를 상기하면서. 눈을 감겨주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가슴에 달린 별은 까맣게 굳은 피로 뒤덮여있었다. 그것 역시 손으로 더듬었다.
이건 이 사람이 바랐던 게 아니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무심하셨지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해를 밀어내자 천공은 기이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떨궈 눈을 감았다. 빗물이 투둑, 떨어지더니 금세 온몸을 적셨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와도 별은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이 밤은 너무나 깊다.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