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까까머리의 옛된 소년이 들어온다. 소년은 주위가 어색한 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멀뚱히 입구에 서 있다.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기 머쓱한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내밀었다가 눈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약속잡고 오신 건가요?"
중년의 여성이 가스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를 쥐며 소년 앞으로 다가온다. 곧이어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 소년의 손에 종이컵 하나를 쥐여준다.
"약속하신 분 성함이?"
자연스레 말을 이어오며 소년이 쥔 종이컵으로 은은한 김이 나는 차를 따라준다. 소년의 손끝에 향이 퍼진다. 소년은 잠시 휴대폰을 꺼내 통화내역을 보여준다.
"이 분이랑 연락하고 왔어요."
소년이 내민 휴대폰을 유심히 보면 중년의 여성은 이내 아차싶은 표정으로 주윌 둘러보더니 속삭이듯 소년을 불렀다.
"아, 손현우군?"
소년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쪽으로... 조금만 기다려줘요."
소년은 벽면 가득 걸려있는 큰 지도를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여성을 따라간다. '부동산1번지' 글자가 지도 맞은편 입구에 크게 써 붙여져 있다.
'1번지라.. 7번가 피자 먹고 싶다...'
소년은 몇 발자국도 안되는 거리만큼 움직였다.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던 응접실을 지나니 골방 같은 작은 방 하나가 나온다. 중년의 여성은 짧은 눈짓으로 골방의 문을 가리켰고, 소년은 묵례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소년의 손이 움직이자 여성은 소년의 옆으로 몸을 돌려 응접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똑똑-'
'.... 누구세요?'
"저기... 연락받은 사람인데요..."
뭐라 대답해야 할 지 모르는 듯 소년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든다. 이게 맞는 대답인 건지 잠시 고민하는 찰나, 안에서 들어오란 대답이 바로 들린다. 소년은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조금은 망설여진다. 소년의 나이는 열여덟. 잠깐의 방황이라면 방황일 수 있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문 앞에 있는 이 순간이 더욱 망설여지는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할 수 있는 때.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용기 내 왔지만 막상 마주하고 보니 미친 짓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래는 언제나 두렵기 때문에 망설여지고 우선 멈추어 고민하게 된다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온 걸까. '이게 내 미래에 대한 답이 될까?' 소년은 짧은 순간에도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묵묵히 할 일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를 다시 한번 되뇌며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여본다. 방 안에서 대답이 들린 후 소년이 문고리를 잡기 위해 망설이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 잠깐의 망설일동안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어서 들어와요"
소년은 방안에 조금 들어찬 노을빛에 안심이라도 한 듯 옅은 미소를 띤다. 소년과 마주 보고 선 이는 소년을 이리로 안내했던 여성과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 소년은 입구에서 받았던 차를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꾸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여기에요"
현우는 아까 인사를 나눈 중개인과 함께 방을 보러 왔다. 그들의 목적지는 한곳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간이 멈추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우는 이 곳 저 곳을 꼼꼼히 살펴본다. 중개인은 입구에 서서 현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때요?"
"뭐... 지내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요."
현우와 함께 온 중개인은 편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현우는 화답이라도 하듯 중개인을 보며 마저 웃었다.
"그럼 언제 올 거예요?"
"음... 아마 삼일 뒤에...? 아직 이것저것 챙겨와야 할 게 있어서요."
"알겠어요, 편할 때 연락하고 와요. 여기 집 비밀번호 적혀있어요. 받아요."
중개인은 현우에게 곱게 접혀있는 작은 노란 쪽지를 내밀었다. 현우는 쪽지를 받아들고 한 번 더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앞으로 현우가 지내게 될 공간이다. 가구도 깨끗하고 혼자 지내기에는 적당한 크기.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거 말고는 크게 손댈 곳도 없어 보인다. 현우는 눈을 크게 뜨고서 한숨을 쉬어본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 2층이라 그런지 햇빛이 고르게 들어오진 않는다. 그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면 있는 창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현관문 밖에서 기다리던 중개인이 놀란 듯 현우를 바라본다. 당황한 기색으로 현우를 크게 부른다.
"이봐요!!"
현우는 중개인이 부르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맞은편 건물의 벽면이 보인다. 옆건물과의 간격이 그리 넓진 않지만 그 좁은 간격사이 조그맣게 초록잎이 보인다. '감나무인가' 속으로 생각하고선 문을 다시 닫았다. 중개인은 차마 방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 서서 현우가 하는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뭐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아... 창 밖이 궁금해서요."
멎쩍게 웃는 현우에게 중개인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 놀랄만한 행동이 아니었음에도 중개인이 이리도 놀란 것에 현우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곧 '내가 무덤덤해서 그런가'하고 말아버린다. 본인이 평소 무덤덤하단 소리를 많이 듣는 탓에 자기는 별거 아니라 생각한 것도 다른 이들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던 적이 많아 이번에도 그러려니하고 넘긴다.
이사는 순조로웠다.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커다란 캐리어 하나와 백팩 두어개를 짊어지고 오니 끝이났다. 현우는 따로 짐정리는 하지 않고 작은 거실에 풀어놓는 것으로 정리를 마쳤다. 이사 첫날엔 역시 자장면이지- 하며 저녁으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해치웠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거실에 뻗어버린 현우.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려는데 아직 집에 인터넷이 들어오지 않아 와이파이연결이 안된다. 작게 탄식하고선 어쩔 수 없다며 데이터로 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부디 데이터가 다 소진되지 않길 바라며 우주 관련 다큐멘터리, 길냥이가 잔뜩 나오는 채널, 요리 채널 등 평소 즐겨보던 채널 몇 개만 탐방한다. 어느 새 밤 11시이다. 커다란 캐리어에서 침낭을 꺼내 잘 준비를 마친다. 내일 필요한 것들을 사러 가야겠다 생각하며 핸드폰 메모장에 필요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 칫솔, 치약, 샴푸, 바디워시, 수건, 밥그릇, 작은 식물 등 이것저것 적으며 이게 다 얼마야... 돈 걱정이 앞선다. 일단 지금 당장 필요한 것만 사자며 이내 핸드폰을 끄고 잠을 청했다.
이사하고 맞이한 첫날밤이었다.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더니 몸이 너무 개운하다. 비록 이부자리가 침낭이라 목과 어깨가 조금 결리는 거 빼고는 컨디션도 좋았다. 현우는 택배로 부쳤던 이불과 몇 개 가전제품들이 오늘중으로 도착한단 문자소리에 일어났다. 알람소리도 못듣고 이렇게까지 잠을 잤지만, 단순 알람소리에 놀라 잠을 깨다니... 조금 어이가 없는 지 작게 소리 내 웃고 화장실로 몸을 일으켰다. 바디워시도 없고 비누도 없어 대충 물로 세수하고 수건도 없어 입고 있던 옷으로 얼굴을 벅벅 닦는다. 핸드폰으로 오늘 날씨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짧으면서도 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니 현관문앞에 택배가 쌓여있다. 낑낑거리며 택배를 한쪽으로 치우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외우지 못한 비밀번호 때문에 지난번 받았던 쪽지를 꺼내 비밀번호를 확인하고서 문을 연다. 짐 정리 마치면 비밀번호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현우다. 열어놓은 창문과 현관문으로 바람이 통한다. 원래 땀이 많은 현우인지라 지금 불어보는 바람이 반갑다. 창밖을 슬쩍보니 맞은편 집 벽에 반사된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분다. 잠깐 쉬면서 바람 좀 쐴 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치고 짐을 마저 옮긴다. 현관문을 열면 왼쪽으로는 화장실 벽이 있고 그 옆으로 작은 주방이 있다. 현관 오른쪽에는 거실이지만 방 보다 평수가 작다. 작은 거실을 지나면 바로 방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은 창문이 있지만 햇볕도 잘 들지 않는다. 현우는 안방보다 거실이 더 좋아 거실에 침대를 두기로 했다. 안방은 가구가 들어있는지라 옷 방이자 창고가 되어버렸다. 매트리스까지 깔고 나니 제법 집다워졌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이다. 짐정리 마친 기념이자 힘을 많이 쓴 날이므로 오늘 저녁메뉴는 치킨이 좋겠다며 메트리스에 누워 치킨을 주문한다. 오늘도 인터넷 설치를 못해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다. 현우는 내일은 까먹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진짜 재밌어 보이는 영상 몇 개만 고르고 골라 보기로 했다.
이사 온 지 이튿날 밤이다.
-
"너 여기 이사 온 지 이제 며칠됐지?"
"글쎄... 한 열흘됐나? 일주일은 지난 거 같아"
현우는 한 손으로는 피자를 한 손으로는 콜라를 집어들며 대답했다.
이사 오고 얼마 안 돼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와 함께 사는 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심심하지도 않고 말동무가 있다는 게 제법 외롭지 않거든. 그리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친구도 얼마없는 현우였다.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영화볼까? 너 영화 보는거 좋아한다며"
"내가? 그랬었나? 그런 얘기를 했었나?"
"웅... 나도 그 영화 재미있을거같아. HER 헐"
"아~ 그거 완전 내 인생영화인데!"
"너는 인생영화가 뭐 그렇게 많냐"
현우는 친구를 보며 기가 찬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거시~ 좋은 영화가 너무 많은걸 어뜩해~"
"이거 나중에 정리하고 영화보자, 벌써 9시다"
"오키오키"
현우는 바닥에 놓고 먹고 있던 피자를 한조각 남기고 피자판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싱크대 위로 옮겨놓고선 정리를 다했단 듯이 손을 씻는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은 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현우야, 기분 좋아 보인다."
친구는 키득거리며 현우를 놀리듯이 주위를 맴돌며 현우 콧노래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불렀다.
"아~ 형원아... 내가 언제 그렇게 불렀어"
현우는 메트리스위에 올려져 있던 노트북을 키고 영화 볼 준비가 한창이다. 형원은 현우 옆에 누워 아까 현우가 불렀던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
"이거 묘하게 중독성있네..."
계속해서 그 부분만 부르더니 영화가 시작되자 곧 조용해지는 형원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주인공의 내레이션에 집중하는 두 사람. 현우는 베개를 가슴에 끼우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고, 형원은 그런 현우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현우는 자세가 불편해질 때마다 몸을 이리저리틀거나 화장실도 왔다갔다하며 산만했지만, 형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턱을 괴고 누워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끝나고 현우는 기지개를 켜며 입맛을 다셨다. 형원은 그새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고 코훌쩍이는 소리가 컸다. 영화가 끝나고 노트북의 화면이 까매졌다.
"으... 눈 부은 것 좀 봐..."
형원은 붉어진 눈가를 메마른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더욱 부어오르는 눈을 보며 손가락으로 눈 끝을 늘어뜨린다.
"걱정 마, 아무도 너 못 봐"
현우는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덮더니 형원을 바라보며 눈을 유심히 쳐다봤다. 형원은 그런 현우의 눈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하긴 집에만 있는데 뭐 어때"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마저 닦는 형원이었다.
반만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살짝 불었다. 현우는 형원을 멀뚱히 보고 있다. 형원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시선을 형원에게서 돌리고 형원 뒤에 있는 창문을 바라본다. 이윽고 현우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마저 연다.
"시원하다..."
현우는 창틀에 기대어 밖을 내다봤다. 밤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가로등 빛이 맞은편 건물과 현우 집 사이 작은 골목으로 짧게 드리워져 있다. 이내 '냐욹'하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현우는 아래를 내다봤다. 형원도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현우와 같이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는 인기척에 현우를 향해 고개를 들더니 빤히 쳐다본다. 그러다 형원을 보곤 꼬리를 세우고 털을 부풀리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고양이들은 왜 나를 싫어할까... 아무짓도 안하는디..."
"네가 무서워서?"
"그른가... 개들도 나만 보면 짓더라고... 난 가만히 있었는디... 억울해"
형원은 창문에 턱을 괴고 바람을 쐬는 현우 어깨에 기댔다. 서늘함이 현우를 감싸온다. 본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인지라 현우는 그런 묘한 서늘함이 오히려 좋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제법 밤이 더워졌다고 생각하는 현우였다. 형원은 아까 영화의 여운이 덜 가신 건지 촉촉한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이 하나도 없네...킁"
"그러게..."
현우는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작은 머리통에 본인의 얼굴도 기댔다. 둘은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내일은 뭐 하고 놀까?"
"내일은... 진짜 공부해야 돼 나. 숙제도 많이 밀렸어"
"무슨 고등학생이 숙제야~ 말도 안 돼"
둘은 작게 실랑이를 벌이다 멈췄다. 둘이서 한숨을 쉬고선 형원은 잘 준비를 하듯 이불과 베개를 정리한다. 형원은 제 얼굴옆에 놓인 베개를 툭툭치며 얼른 자라는 듯이 현우를 끌어당겼다. 현우는 핸드폰을 한 번 보더니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며 유튜브를 켰다. 형원은 옆에서 쭉 지켜봐 온 (그래봤자 고작 일주일이지만) 현우의 생활패턴에 감탄했다. 너무도 똑같은 루틴이라 웃음마저 났다. 제 옆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형원을 보며 현우는 바보같이 따라 웃는다. 왜 웃냐며 베개로 형원을 때려보지만 형원은 웃음을 멈출 수 없다. 작은 방에 숨죽인 웃음이 가득 찬다. 현우는 그만 좀 웃으라며 형원을 타박하곤 베개를 세워 벽에 기댔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어젯밤에 보다 만 캠핑다큐멘터리를 마저 시청하고 있다. 형원은 그런 현우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아침, 현우는 바쁜 듯이 아침밥을 챙겼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지난 밤에 먹다 남긴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운 게 다지만. 딱히 무슨 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현우는 항상 바삐 움직였다. 뭘 딱히 하는 건 없어 보이는데 뭔가 부지런하다. 아침을 먹고 나면 현우는 조깅을 했다. 집 근처를 크게 빙글빙글 돌며 아침을 시작했다. 현우가 운동을 할 때는 이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 골목은 언제나 한산했다. 주택가 근처라 조용한 것도 있겠지만 이 동네는 유독 더욱 조용하다못해 고요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달리다 지난번 창가앞에서 만났던 고양이도 만났다. 고양이는 동네 캣맘이 둔 밥그릇옆에서 열심히 앞발을 그루밍하고 있다. 현우를 보더니 알은채를 하듯 앞발을 내리고 '냐앙'하고 운다. 현우는 다음번에는 고양이를 위해 간식을 들고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고양이를 지나쳤다. 슬슬 숨도 차고 몸에 땀도 많이 나 얼른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즈음, 동네 마트로 가 장을 본다. 소시지와 햄, 달걀, 냉동만두와 냉동 볶음밥을 한가득 안고서 다시 집으로 뛴다. 이번엔 잊지 않고 고양이 줄 고양이캔도 샀다. 돌아가는 길에 고양이를 만나면 바로 줘야겠다 생각하며 아까 고양이를 만났던 곳을 지나쳐 집으로 향했지만, 고양이는 그새 자리를 옮긴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달리는 현우다.
사 온 물건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씻고 나오니 점심시간이다. 현우는 가끔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다고 생각했지만, 이 곳에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은 정말 시간이 멈춘 거같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노래를 틀어도 노래가 나오는 주변만 조금 소란스러울 뿐 모든 공간이 고요했다. 현우는 냉동볶음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며 오늘 꼭 하리라 다짐했던 과제를 꺼내왔다. 영어 지문 독해 교재를 꺼내며 괜히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러본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머리가 아파져 그냥 밥 먹고 쉬고 할까 요령을 피운다. 볶음밥을 꺼내고 숟가락을 찾아 밥상에 앉으려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형원이 묻는다.
"영어~? 어휴... 벌써 머리가 아프다"
"너 영어 잘해?"
"잘하면 내가 여기 있겠어? 나사를 갔지"
형원은 현우와 함께 우주다큐멘터리를 자주 보더니 부쩍 우주얘기를 많이 한다. 지루하게 그런 거 왜 보냐고 묻는 형원의 질문에 이런 걸 보면 잠이 잘 온다며 대답했던 현우다. 잠이 잘 온다는 말에 수긍하며 그럼 같이보자고 했더니 그 뒤부터 매일 밤 함께 우주 다큐멘터리를 같이 보게 됐다. 잠이 잘 온다는 말이 진짜였던 듯, 현우는 매일 다큐멘터리를 보다 잠이 들었고 형원은 매번 끝까지 시청했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다 보는데 현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보던 부분부터 다시 봐도 되거늘, 앞부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매번 처음부터 다시 보는 현우였다.
볶음밥을 먹으며 영어교재를 펼쳐 든 현우를 보니 형원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둘 중의 하나만 하라며 책을 뺏어버렸다. 현우는 제법 진지하게 책에 집중했다. 형원은 현우의 눈썹을 괜히 건드리며 장난쳤지만 현우는 교재에서 눈도 떼지 않고 열심히 독해 중이다. 심심해진 형원이 현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가, 현우 눈썹도 움직여봤다가, 옆에서 입김도 불고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지만 현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형원은 졌다는 듯이 현우의 옆에 턱을 괴고 누웠다.
"영어는 너무 어려워야... 뭔 말인지 이 꼬부랑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어"
"맞아"
"아니, 안녕은 안녕이지 왜 처음 만나면 Hi, Hello고 헤어질 땐 bye 인겨? 괜히 단어만 더 외워야 하잖어"
형원의 짜증섞인 분노에 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형원을 쳐다봤다. 현우의 집중력을 뺏었다는 성취감에 형원은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안그래? 우리말은 안녕, 하나면 인사가 다 되는데 영어는 너무 많어~ hello, hi, goodbye 세개여, 세 개!"
현우는 그런 형원을 보며 작게 웃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말이 되는 소리다. 그러게 왜 영어는 세 개나 있지? 현우는 핸드폰을 꺼내 '안녕'을 검색해봤다. [안녕: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한자마저 편안할 안, 편안할 녕이다.
"오, 안녕이 그런 말이었어?"
옆에서 힐끔이며 현우의 핸드폰을 보고 있던 형원이 의외라는 듯 크게 놀랐다.
"만나서 안녕? 하고 인사하는 건 끝이 물음표니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하냐고 묻는 거고, 헤어질 때 안녕하는건 느낌표니까 몸 건강하고 마음 편해지라고 바람을 전하는 뭐 그런거아닐까?"
형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쳐다보는 현우를 보며 너 밥 먹을 때 보다 더 진지해 보인다며 놀렸다.
"오~ 손현우~ 완전 시인이야 방금~ 감성 무슨 일이야~?"
형원은 현우를 놀리듯이 눈을 크게 뜨고 과한 리액션으로 쳐다봤다. 현우는 에이씨하며 형원의 얼굴을 가렸고 형원은 그런 현우를 보며 눈을 크게 휘며 웃었다.
형원은 현우방에 들어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현우가 교재에 집중하는 사이 옆에서 무언 갈 끄적인다.
"형원아, 뭐해?"
슬슬 집중력이 떨어진 현우가 형원이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물었다.
"어? 이거 안녕 써보려고"
형원은 현우폰에서 안녕을 검색해놓고 한자로 안녕을 쓰고 있었다.
"이거 약간 가훈같고 좋지않아?"
형원이 모나미펜으로 여러 번 덧칠하여 획을 두껍게 그린 한자종이를 건네받은 현우.
"그렇네, 한자로 적으니까 있어 보인다 되게"
"그치? 이거 이렇게 현관문앞에 붙여놓자"
형원은 현우에게서 종이를 다시 건네받아 맨 마지막에 형원과 현우의 이름을 적는다.
"이거 나중에 꼭 붙여, 알았지?"
저 커다란 종이는 대체 어디서 난 걸까 생각하던 현우는 형원이 건네준 '안녕' 종이를 받아들고 요리조리 살펴봤다.
종이의 뒷면은 2001년 6월 달력이었다.
"아... 어렸을 땐 공부를 참 잘했었는데 이제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야..."
"너 내가 모른다고 막 얘기하지 마..."
"진짜야! 나 공부잘했어! 나 변호사 되고 싶었다고!"
형원은 현우의 교재를 요리조리 살피면서 한 장씩 읽어 넘겼음에도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하나도 기억이 안난댜..."
현우는 형원이 보던 교재를 다시 뺏어와 제 앞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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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아침이었다. 현우는 조깅을 마치고 왔고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던 채소를 꺼내 볶음밥을 만들었다. 형원은 아침밥을 먹고 있던 현우에게 조용히 다가와 인사를 했다. 현우는 짧게 인사하고서 밥을 마저 먹는다. 형원은 현우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얌전히 옆에 앉아 기다렸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지만 형원은 매번 새롭고 낯설다. 자신은 기억도 안 나는 일상 속에 갑자기 현우가 나타났다. 현우는 자신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듯이 행동했다. 형원은 현우를 만나고서 현우를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성격이 정반대여서 잘 맞는 걸까, 크게 친한 거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서로 안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 예로, 형원은 매일 늦잠을 자고 해야 할 일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성격이다. 반면, 현우는 딱히 일찍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점심전엔 일어나 꼭 조깅을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귀찮아 하면서도 다 하고 다음 일을 했다. 또 형원은 밤에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은 서늘한 날씨를 좋아한다. 비가 내리기 전의 서늘함은 언제나 형원을 흥분시켰다. 반면 현우는 주로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주로 보는 건 요리영상, 운동영상, 짧은 뉴스, 몇분으로 보는 영화 등이다. 형원은 생각 없이 생각하는걸 좋아하지만 현우는 그냥 생각 없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언제 한 번 비가 올 것 같이 구름이 잔뜩 낀 날에 형원이 현우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날씨를 좋아하냐고 물으니 그냥 해가 떠 있으면 다 좋단다. 더운걸 싫어하지만 날이 더우면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거나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서 해가 떠 있는 날이 좋다고 했다. 예전에 웨이크보드를 배웠었는데 너무 재밌었다고 또 타러 가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정말 재밌는지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웨이크보드 타는 포즈를 취하는데 그런 현우가 귀엽던 형원이다. 너도 타봤냐는 질문에 형원은 딱잘라 대답했다. 움직이는 거 싫어해서 그런 거 안 탄다고. 현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었다. 잠시 지난 날을 생각하던 형원은 지금 제 옆에서 밥 볶던 주걱으로 볶음밥을 먹고 있는 현우를 보니 이렇게나 다른데 이렇게나 끌일 인인가 싶다. 형원이 턱까지 괴고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현우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형원을 보며 밥을 마저 씹는다. 형원은 현우 입가에 묻어있는 밥풀을 떼어 제 입에 가져다 댔다. 현우는 형원의 느릿한 손길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제 손으로 입가를 벅벅 닦아낸다. 턱밑에 붙어있던 밥풀을 떼어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친 현우가 물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형원을 찾았다.
"형원아, 너는 가고 싶은 곳 있어?"
뜬금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혹시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닌 지 의심이 드는 형원. 현우는 식탁을 정리하며 형원에게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물었다. 왜? 라는 대답에 현우는 집에만 있기 따분하다고 너는 가보고 싶은 곳이 없냐고 재차 물었다. 형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고 싶은 곳이라고 해봤자 쉽게 나갈 수 없는 자신임을 현우가 뻔히 잘 알 텐데 저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 지 어떤 의미인 건지 한참을 생각한다. 인상을 쓰고서 쩝쩝거리는 형원을 보던 현우는 그제야 아차싶었는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다. 현우 자신이 조금 따분해서 그런거라고 혼자 가기 미안하니까 같이 가자는 말을 몇 분에 거쳐 설명하고 있다. 형원은 대충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을 해본다. 지난번에 봤던 우주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우주의 바다라고 불리는 블랙홀영상이었는데 실제로 블랙홀에 갈 수 없으니 바다를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글쎄... 바다? 아주 크고 넓은 바다를 보고 싶어"
"오! 바다 좋다"
"근데 가고 싶은 곳은 왜 자꾸 물어봐? 나 멀리 못 가는데..."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진짜 바다가게?"
"엉. 바다 별로야? 아님 다른 곳도 괜찮아."
"아니 뭐...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있을 까?"
"그럼 계곡으로 갈까? 나는 상관없어. 나 물 좋아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무섭기도 해서... 꼭 완전 가고 싶은 건 아니야."
"괜찮아. 내가 너 도와준다니까?"
형원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현우는 그런 형원이 걱정되는 지 형원의 어깨를 감싼다.
"뭐가 무서워, 좋은 곳 놀러 가는 건데 그냥... 나도 있고!"
"...모르겠어"
형원은 끝내 현우와 눈을 맞추지 않고 방으로 쓱- 들어가 버린다. 현우는 그런 형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췄다. 현우는 이렇게 된 거 설거지까지 마무리 해야겠다 생각하고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설거지가 끝나고 현우가 잘 준비를 마칠 동안에도 형원은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괜히 얘기한 건가 현우는 씁쓸해졌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다가 막 잠에 빠질 무렵, 현우는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핸드폰을 키고 주위를 둘러봤다. 현우 옆에 형원이 등을 보인 채 웅크리고 누워있다.
"현우야, 바다 가자. 너랑 갈래."
속삭이듯 웅얼거리는 말투에 현우는 처음에는 잘 못 들었나 싶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 작게 몸을 말고서 '바다가보자'라고 다시 대답하는 형원의 목소리에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현우는 형원의 뒤통수를 쓰다듬다 팔을 뻗어 형원에게 팔베개를 해준다. 형원이 현우의 품에 파고들자 현우는 형원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괜찮아. 우리 재밌게 놀자"
현우의 온기를 느끼며 형원은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현우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어느 바다가 좋은 지 검색하느라 하루 반나절을 꼬박 날린 후에야 첫 끼를 먹을 수 있었다. 현우는 먹으면서도 생각했다. 형원을 생각하며 장소를 골라야 했고 관광지도 정해야했다. 사람이 많이 없고 물도 깊지 않으며 야경이 예쁜 곳으로 알아봤다. 제주도까지 가는 건 현우가 가진 자금으로는 어려워서 가까운 곳이면서 앞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래도 바다보러 가는 건데, 놀러 가는 기분은 나야지싶어 결국 부산으로 결정했다. 머리 조금 썼다고 배가 금방 출출해진 현우는 해동해놓은 냉동 볶음밥 2개를 볶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 노랫소리에 형원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뭐해? 기분 좋아 보인다?"
"깜짝이야!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뭐 맛있는 거 먹는댜~?"
형원은 현우 뒤에 서서 현우가 밥을 볶고 있는걸 유심히 본다.
"오늘은 평소보다 양이 작네?"
"아 웅. 라면도 끓일 거야"
형원은 현우의 식사량에 또 한 번 놀란다. 진짜 먹기 위해 사는 놈인가 싶다. 열심히 라면 수프를 흔들고 있는 현우를 뒤로하고 형원은 거실로 움직였다. 아까까지 현우가 열심히 자료조사를 하던걸 뚫어져라 보더니 현우를 한번 스윽 본다. 알 수 없는 표정의 형원이다.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실망한 것도 아닌 표정. 형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바다, 제가 먼저 가보고 싶다곤 했지만 실제로 마주할 생각을 하니 막막해진다. 형원은 바다를 무서워한다. 사실, 바다의 깊음을 더 무서워한다. 무서움 외에도 많은 감정이 앞선다. 딱히 어떠한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건 그 만큼 복잡하기 때문이겠다. 형원은 현우의 노트북에 떠 있는 바다사진을 보다가 이내 침대 위에 있는 인형에게로 눈길이 닿았다.
"어? 이거 뭐야?"
포켓몬에 나오는 잠만보캐릭터 인형이다.
"그거? 완전 너ㅋㅋㅋ"
"뭐래~ 내가 이렇게 생겼어?"
"아니 완전 너 잠 많이 자잖아. 걔도 잠 엄청 자거든"
"아 나도 그건 알지! 근데 나 이렇게 안넙대대 하다고!"
형원이의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투정에 현우는 아리쏭한 표정이다.
"흠... 둘 다 잠 많이 자는 게 진짜 똑같은데..."
"하! 그럼 너, 저기 저 곰인형말야! 저거 너랑 닮았다그럼 좋겠어?"
형원이 가리킨 곳에는 현우가 이사 온 첫 날부터 함께했던, 곱슬한 갈색털이 빼곡한 곰 인형이 앉아있었다. 빨간색 줄무늬 보타이까지 곱게 하고서 빙긋 웃고 있다.
"웅... 저거 나 닮았다고 선물로 받은 건데..."
"누구한테?"
"우리 엄마... 나 어릴 때부터 곰새끼라고 부르셨는데..."
본의 아니게 현우 어머니를 건드린 형원이다. 머쓱해진 형원은 곰 인형을 가리키던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굽히다가 재빨리 나머지 손가락도 다 펴서 곰 인형을 가리킨다.
"완전 닮으셨다!"
곰인형에게 극존칭을 쓰는 형원. 현우가 소리 내 큭큭웃자 형원은 잠시 현우를 노려보다 저를 닮았다던 잠만보 인형을 빤히 본다.
"아 근데 이 잠만보 인형보다 저 곰돌이 인형이 더 좋아. 더 귀여워. 나 귀여운 거 좋아해"
"아?"
조리를 막 마친 현우가 손에 묻은 기름기를 바지에 슥슥 닦았다. 형원은 곰 인형을 갖고 와 현우의 침대에 걸터앉아 잠만보 인형과 요리조리 비교하면서 뜯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너 냄새나. 그래서 좀 더 편할 거 같아"
현우는 자신의 애착인형을 꼭 껴안고 얼굴을 부비고 있는 형원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 냄새가 좋다며 얼굴을 부비는 형원을 보니 현우는 슬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코끝이 찡해지는 슬픔을 느꼈다.
"바다 꼭 가자. 내가 진짜 재밌게 해 줄게. 미련없이 놀다 오자 우리."
현우는 형원의 품에 안겨있던 곰 인형을 빼내 제 옆에 앉히고, 허공에 떠 있는 형원의 손을 제게로 끌어당겨 안았다. 형원은 차마 현우를 안을 수 없었다. 그대로 툭 떨궈진 두 손은 괜히 침대시트만 움켜 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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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형원아 이거 봐봐. 진짜 미쳤다."
현우와 형원이 부산에 도착하고서 처음 마주한 풍경은 사람이 가득한 기차플랫폼이었다. 쭈욱 서울에서만 지내던 두 사람이었기에 다른 지역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와 사람 진짜 너무 많다. 조심해 나 잃어버리면 안돼"
현우는 2박 3일 동안 제 곁에 있을 곰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엄마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다니기엔 너무도 커버린 현우지만 오늘만큼은 세 살 어린아이처럼 곰 인형을 안고 있다. 다만 어린아이와 다른 점은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것. 현우와 형원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형원은 정말로 현우를 놓칠세라 현우 허리를 더욱 끌어안았다. 묵직이 느껴지는 손길에 현우는 곰 인형을 고쳐안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현우는 시내버스가 아닌 시티투어버스를 택했다. 시티투어버스는 이층으로 된, 부산 유명 관광지를 순회하는 버스였다. 일일정기권을 끊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현우다. 현우는 곧장 이층으로 올라갔다. 탁 트인 뷰가 맘에 드는 지 현우는 연신 밖을 둘러보며 카메라로 사진 찍기 바쁘다. 형원은 대체 다시 보지도 않을 사진을 왜 저리 찍어대는 건지, 아직 뭔가 볼만한 풍경이 아닌데도 저리 열심히 찍어대는 현우가 부끄러워졌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조금은 꿍해진 마음에 현우 옆구리를 쿡쿡 찔러본다. 현우는 그제야 형원을 챙겼다.
"어어, 야 미안하다."
현우는 형원이도 밖을 볼 수 있게 몸을 조금 틀어줬다.
"어때? 보여?'
형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금세 해운대에 도착했다. 해운대까지 오는 풍경은 서울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지만 해운대 근처에 들어서자 야자수와 화려한 건물들, 곳곳에 보이는 이국적인 가게에 형원도 아까의 현우처럼 덩달아 신이 났다. 현우는 눈을 감고서 바닷바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형원이는 작게 현우를 불렀다. 현우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 곰 인형을 세게 껴안고서 눈을 떴다.
"어우 야, 다 왔나보다"
현우는 서둘러 내릴 채비를 했다. 현우의 한 손엔 곰 인형이 한 손엔 여행 가방을 들고서 느릿하게 버스의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은 바다내음을 한껏 들이켰다.
"오와..."
현우와 형원은 해운대의 많은 인파에 다시금 놀랐다.
"아직 완전 여름도 아닌데 사람들 되게 많다 그치?"
현우는 인파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붉은 노을로 거리의 사람들을 지우려 하는 거 같았다. 수없이 반짝이는 빛은 사람들을 하나둘씩 지워갔다. 형원은 내심 바다를 내켜하지 않았던 지난 날의 자신을 꾸짖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바다에 형원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현우처럼 바다냄새를 맡을 순 없었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끈적임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향기는 기억에 존재하는 거라 바다를 보니 지난 날 맡았던 바다내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현우는 조용히 형원을 바라봤다.
"형원아, 여기가 바다야. 근데 나중에 여기보다 더 예쁜 곳 보여줄게."
현우는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해 와다다 형원에게 말을 쏟아냈다. 형원은 현우만 알 수 있게 작게 미소 지었다.
"아 이것도 기념인데 우리 사진 찍자!"
현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에게 다가가 사진 좀 찍어달라며 부탁했다.
"자, 찍을게요! 웃어요!"
현우는 카메라를 향해 브이했다.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바보 같은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자 사진을 찍어주던 남학생이 한 소리 한다.
"아 조금 더 웃어보세요!"
그제야 현우는 치아가 보일 만큼 크게 웃었다. 형원이도 더 크게 웃었다.
남학생은 연달아 사진을 마구 찍더니 괜찮게 나온 건 지 확인해달라며 현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현우는 대충 갤러리를 훑어보곤 잘 나왔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혼자 오셨어요?"
"아뇨, 친구랑 같이 왔어요."
남학생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조금 뒤에 있던 친구들의 부름에 발걸음을 돌렸다.
"좋은 여행하세요!"
남학생이 사라지고 현우는 작게 한숨 쉬었다. 옆에 잠시 내려두었던 가방을 메고 곰 인형을 고쳐안았다.
"우리 이제 숙소로 갈까?"
현우는 형원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노을이 지고있는 바다를 잠시 마주보고섰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형원을 보며 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형원에게 핸드폰부터 들이미는 현우.
"야 형원아, 너도 사진 찍어줄게 거기 있어 봐"
현우는 곰 인형을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어우씨, 안 보이네 이거... 잠깐만"
현우는 이리저리 카메라를 옮기더니 곧 찰칵찰칵찰칵 소리를 냈다. 노을을 등지고 있어 바다 가운데 검은 그림자만 화면에 가득 차 있지만 현우는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가며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런 현우가 우스운지 형원은 사진을 찍을 때 마다 크게 웃었다. 형원이 웃거나 말거나 현우는 계속 진지하다.
"오! 됐어! 오케이. 이쯤하면 됐어!"
현우포토그래퍼의 열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모델놀이는 금방 끝이 났다. 대충 결과물은 안 봐도 뻔할거같아 형원은 사진 보여달란 소리는 딱히 하지 않았다. 현우는 가방과 곰 인형을 다시 안아 들었다.
"배고프다. 우리 빨리 숙소가자. 거기 옆에 맛있는 조개구이집 있대."
형원은 현우와 함께 움직이는 순간에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다는 붉게 불타오르다 이내 식어버렸다. 바다는 푸르게 물들다 이내 검게 변하여 두 사람의 뒤를 덮쳤다.
현우의 리드대로 끌려온 숙소. 형원은 숙소를 한 번 휘 둘러보고는 '오~ 느낌좋은데~'하여 연신 감탄이다. 형원이 맘에 들어 하는 눈치이자 현우는 신이 나서 테라스까지 나가 뷰 좀 보라며 닦달이다. 현우는 형원과 함께 테라스로 나가 숲의 끝에 살짝 걸쳐있는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 언저리에는 오징어잡이 배가 연신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현우야, 내 생각보다 세상은 역시 넓구나"
"그렇겠지?"
형원은 한없이 반짝이고 있는 배에 시선을 뺏겼다. 어느 새 숙소 냉장고까지 다 살펴본 현우는 형원의 눈치를 보고 있다.
"형원아, 우리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그래, 좋아"
"어 그럼 잠깐만, 나 화장실 좀"
현우가 잠시 화장실로 달려가자 형원은 침대에 몸을 뉘어 고단했던 하루를 되돌아봤다. 처음은 아니지만 낯선 바다앞에서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할 수 없다. 무언가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대체 뭐였을 까. 나는 그 바다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이었길래 지금 이리도 헷갈리는 걸까. 형원은 조금 더 상황을 바꿔 생각해보기로 했다. 막연함과 두려움. 노을이 지면서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 었다. 밤이 시작된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가득 차면 나는 살아있다. 해가 뜨는 게 두렵다. 그러면서도 해가 뜨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젠가 사라질 어둠이기에, 언제가 사라질 빛이기에. 형원은 그 두려움이 뭔지 알것같았다. 곧 몸을 작게 말아 웅크렸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서 숨을 쉬어본다. 내뱉은 숨이 시원하지 않다.
"형원아, 뭐해?"
현우는 화장실에서 나와 형원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아 근데 침대가 조금 작은 거 같아"
형원이 웅크려있음에도 침대는 가득 차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거 더블배드네"
형원은 어느 새 몸을 일으켜 침대를 한번 훑어만져본다. 현우는 '그게 왜?'라는 표정이다.
"아니 그래도 이게 뭐야... 방 바꿔 달라고 하자. 침대 좁아"
형원의 미간이 좁아진다. 더블배드가 어지간히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우리 한 침대 썼잖아"
현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형원은 현우의 말에 딱히 반박은 못하고 연신 침대만 쓸어내린다.
"그래, 뭐. 어쩌겠어"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나 진짜 배 겁나 고파"
현우는 재빨리 키를 뽑아 들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아, 맞다!'를 외치며 곰 인형과 작은 검정 봉지를 챙긴다.
"다 들고 가려고?"
"혹시 모르잖아ㅎㅎ"
현우는 또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형원의 왼쪽은 네온 사인으로 가득 밝은 도로와 오른쪽으론 한 없이 짙은 어둠에 잠긴 바다다.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보며 간간히 현우 뒤통수를 좇는 형원. 바다는 네온사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붙잡아 밝아지려 하는 느낌이 든다. 형원은 그 이질적은 느낌에 현우를 서둘러 쫓아간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이다.
현우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지도를 보고 있다. 친척중에 부산에 사는 지인이 있어 맛집을 미리 알아 왔단다. 그래서 그런지 점점 번화가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다. '현지인이 추천해주는 곳이니 얼마나 맛있을까?' 현우는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가게를 찾기 바쁘다. 형원도 옆에서 부지런히 도와주고 있다. 잠시 세갈래 골목길 앞에서 멈춘 현우는 핸드폰을 들고서 '어느 곳이 진짜 길일 까요 알아맞혀 봅시다' 노랠 부른다. 형원은 그런 현우를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지도를 보고서 저런 운에 맡기는 길치라니. 형원은 단번에 이 쪽길이라며 오른쪽 골목을 가리켰다. 현우는 동그래진 눈으로 감탄사를 내뱉었고 형원은 또 그런 현우를 보며 웃기바쁘다. 형원이 가리킨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자 낮은 붉은색벽돌 담벼락이 나왔고, 그 담벼락 끝에 파란 철문이 보였다. 투박한 손글씨로 [대형수산]이라 커다랗게 페인트로 써놓은 게 간판이라니. 두 사람은 가게 외관에서 풍기는 아우라에 여기 진짜 맛집인거같다고 눈빛을 주고 받았다.
가게로 들어서자 바닥에 가득 깔린 조약돌 소리가 바스락 거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챠락-거리는 소리에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진다. 현우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둥근 드럼통위에 원형의 테이블이 얹어져 있는 전형적인 조개구이집 테이블이다. 현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곰 인형과 검정봉다리를 올려놨다. 현우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고 형원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기 바쁘다.
"여기 조개구이 2인상 먼저 주시고요, 해물라면이랑 해물된짱찌개도 하나씩 주세요."
현우는 거침없이 주문을 했고 주문을 받던 종업원은 깜짝 놀랐다.
"어이고, 총각 잘 먹네... 우리 양 많이 주는데 괜찮겠어요?"
"네, 다 먹을 수 있어요."
현우는 의기양양하게 종업원에게 대답했다. 종업원은 그런 현우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너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참 빨리도 물어보네 싶은 형원이다.
"네가 다 주문했는디, 내가 뭘 더 시키냐"
"내가 여기 추천메뉴 다 주문했어"
조개구이상은 금방 차려졌다. 살짝 도치로 구운 듯 초벌구이가 되어있는 조개구이를 보고 형원은 소리를 질렀고 현우도 덩달아 '오오오~'외치며 사진을 찍어댔다.
"너 조개구이 좋아한다고 그랬지?"
"엉, 예전에 많이 먹었지"
현우는 형원의 대답을 들으면서 큰 가리비를 하나 깐 뒤 형원 앞접시에 덜어줬다. 형원의 앞접시에 덜어줌과 동시에 다시 조개를 집어 든 현우. 치즈까지 올라가있는 조개를 앞니로 긁어먹으며 뜨겁다고 연신 입을 벌린다.
"너가 조개도 아니고 왜 자꾸 입을 벌리냐 큭큭"
"어으드거으느끄 허~ 믈 스크즈모~허"
"뭐라고?"
"어휴, 뜨거우니까 말 시키지마라고"
그 날 형원은 현우가 먹는 걸 보느라 본인 몫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부산 바다 일정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도착했던 첫날은 사진 찍고 조개구이 먹는 것으로 끝이 났고. 이튿날은 형원의 몸살로 관광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첫날에 무리를 한 탓인 지 형원은 집중하지 못했다. 현우는 형원에게 억지로 여행시키고 싶지 않다며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형원이 오히려 고집을 부렸다. 대신 현우의 여행일정의 일부만 소화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조금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현우는 연신 형원을 살폈다. 현우와 형원이 도착한 곳은 바다옆에 위치한 절이었다. 현우는 어렸을 때 불교유치원을 다녔을 정도로 집안이 불교 신자여서 바다 옆의 절이 궁금했다. 형원은 향냄새만 심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해서 그 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바다의 짠내때문에 향냄새는 덜 한 곳이었다. 그러나 아직 채 걷히지 않은 해무속에서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난 절을 보자 두 사람 다 그 압도감과 신비로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현우는 형원에게 조심하라고 일렀고 형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법당 근처엔 가지 않고 그 주위 산책로만 걸었다. 형원은 법당안이 궁금해져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현우의 제지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곧 두통을 호소하는 형원으로 인해 두 사람은 그 곳을 벗어났다.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해서야 형원은 조금 괜찮아 보였다. 현우는 가지말았어야했다며 연신 미안해했지만, 형원은 만약 안 갔으면 제 마음이 불편해서 안됐다고 본인이 오히려 미안하다했다. 카페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시간은 또 흘렀다. 영 안 되겠는지 현우는 서둘러 다음 코스로 이동하자 했고 둘은 바다트램도 타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은 숙소에서 보냈다. 현우는 숙소에 방문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맥주를 몇 캔 얻었다. 그대로 방으로 가지고 와 테라스에 앉아 형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현우야, 고맙다."
"..."
형원은 이미 침대에 걸터앉아 테라스 난간 너머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려 현우를 바라보는 형원이다. 현우는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갖고 온 맥주를 침대 위로 후드득- 올려놓았다. 두 사람의 숙소에 다른 사람들이 많이 방문을 한 건지,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곳이었는데 오늘 밤은 시끌시끌하다. 형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현우는 침대 위에 올려놓은 맥주를 한 캔 까 들고 형원의 옆으로 다가갔다. 형원은 테라스 아래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산책길을 걷는 연인을 보더니 현우에게 물었다.
"현우야, 너 연애해본 적 있어?"
"그런걸 왜 물어봐..."
"나는... 했었던가? 너는 멀쩡하게 생겨서 왜 없냐"
"없다고 안 했어"
"현우야, 나는 정말 네가 너무 웃겨 하하하"
형원은 현우를 향해 크게 웃고선 침대로 가버린다. 현우는 테라스에 남아 맥주만 연거푸 넘긴다. 몇 번의 목넘김이 끝나고 현우를 맥주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린다. 형원은 현우의 그런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다. 그러더니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 있던 곰 인형을 끌어안고서 눈을 감는다.
"뭐야, 내 꺼야 그거"
현우는 형원이 안고 있던 곰 인형을 뺏어 들었다. 표정이 뾰루퉁한걸로 봐선 아까 형원이 놀린 게 안 풀린 것 같다. 형원은 곰 인형을 뺏겨놓고서도 그저 하하 웃기 바쁘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아니거든?"
현우는 형원을 침대 끄트머리까지 밀어내고선 침대에 누웠다. 형원은 밀려진 채로 큭큭거리며 웃기 바쁘다.
"나 잔다"
형원은 몸을 일으켜 현우 옆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옆으로 누운 채 현우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현우는 제 옆에서 눈을 감고 누운 형원을 내려보다가 아까 뺏은 곰 인형을 다시 가슴에 안겨준다.
"됐어, 여기 더 큰 곰이 있는데 뭣 하러~"
형원은 눈은 감은 채 한쪽 다리를 현우의 배 위로 올렸다. 현우는 형원의 다리를 5초 정도 쳐다보다가 슥-밀어낸다. 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다리를 올린다. 두어번 그런 실랑이가 있었지만 현우가 져준다. 곤히 잠든 두 사람의 몸위로 짠 바닷바람이 내린다. 살짝 열러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닷바람은 두 사람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다 침대로 내려 앉았다. 형원은 바닷바람이 간지러운지 살짝 눈을 뜬다. 그리곤 조용히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만큼은 또렷하다. '빛은 어두울 수록 잘 보이는구나' 형원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누워 잠든 현우를 본다. 또렷이 들어오는 현우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두 사람은 점심이 지난 시간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퇴실시간이 다른 곳보다 느린 곳이어서 여유롭게 퇴실준비를 한다. 현우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 숙소 옆의 작은 기념품샵에 들러 부모님께 줄 선물을 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선물을 정리하는 현우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다.
"아, 저기 혹시 옆에 자리 비었으면 제가 앉아도 될까요?"
고개를 들어 보니 옛되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표를 보여주며 옆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청한다.
"아니 그게, 제가 내일로 여행 중인 학생인데 표가 입석이어서... 옆에 자리가 빈자리면 제가 앉아도 될까요?"
현우는 주위를 둘러보니 형원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아 죄송해요, 제가 일행이 있어서요."
현우는 옆자리에 곰 인형을 고쳐 앉혔다.
남학생은 현우를 아래위로 흘기고는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
현우는 다시 제 짐을 정리하고선 잠을 청했다.
-
한가로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선풍기 바람에 열을 식히고 있는 현우. 진짜 여름이 온 건지 저녁인데도 더위가 가시질 않아 유난히 쳐져 있는 현우다. 형원은 어느 새 현우 뒤에서 같이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
"모냐, 언제 왔어"
퉁명스러운 현우의 물음에 형원은 그저 현우 등에 얼굴을 기댈 뿐이다.
"으흐흐 시원해"
현우의 눈가에 주름이 지어진다. 형원은 현우의 등에 깊게 얼굴을 기대고 몸을 끌어안는다. 바다에 다녀오고 난 이후 현우는 형원이가 묘하게 말수가 줄고 스킨십이 잦아졌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장난을 잘 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붙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현우가 놀랠까 봐 피해 줄까 봐 언제나 조심스러웠던 형원이다. 현우는 형원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음을 눈치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언젠가 형원이가 스스로 말 해 주겠지- 기다릴 뿐이다.
"아, 벌써 내년이면 월드컵 할 시즌이네"
형원은 현우의 등에 기대 중얼거렸다.
"오, 너 축구 좋아해?"
현우는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형원이 월드컵을 말하자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재밌잖아. 월드컵이면 또 되게 큰 스포츠이기도 하니까"
"맞아, 나 예전 월드컵때 진짜 재미있었어. 온 동네 떠나가라 응원도 하면서."
"오 진짜? 나는 조금 더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
"나는 오히려 몇 년 전 월드컵은 생각 안 나고, 완전 어렸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붉은 티 입고 응원했던 거, 그때는 기억나. 진짜 아주 재밌었어"
"그런 때가 있었어? 내년에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같이 월드컵 열잖아. 그것보다 훨씬 전이야?"
현우는 잠시 말을 아꼈다.
"내년에는 카타르 월드컵인데..."
"아니야, 우리나라랑 일본 월드컵이야. 매일 뉴스에서 월드컵 경기장에 대해서 말이 많았는 걸"
형원은 정말 모르겠냐는 눈빛으로 현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현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맞다, 내가 착각했네'라며 웃었다.
"너는 해외축구도 챙겨볼 정도로 좋아한다는 애가 어떻게 우리나라 월드컵을 헷갈릴 수 있냐?"
형원은 혀를 끌끌차더니 다시금 현우의 등에 기댔다. 현우는 한동안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베어 물었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두 사람은 고요해졌다.
"현우야..."
"뭔데, 뭘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데"
"우리 영화보자"
현우는 싱거운 녀석이라며 투덜거렸고 형원은 미리 현우의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누웠다.
"보고 싶은 거 있어?"
"글쎄, 그냥 슬픈 거?"
"그럼 이거 볼래? 인기급상승이래.."
현우가 건넨 노트북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소개돼있었다. 주욱 읽어가던 형원은 괜찮아 보인다고 이걸로 하자며 다시 현우에게 노트북을 건넸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대사 한 번 엄청나네"
현우는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카피를 한 번 읽었다. 그러곤 형원에게 곧장 장난을 친다. 현우는 그윽한 눈빛으로 형원을 보며 대사를 천천히 읊었고 그 모습을 보던 형원은 닭살돋는다며 호들갑이다. 그렇게 낄낄대던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되고 조용해졌다. 탈탈드르륵탁 돌아가는 선풍기소리가 거슬리지도 않은 지 두 사람은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 주인공들이 또래라서 그런지 두 사람은 더욱 몰입했다. 영화 전개가 슬쩍 느슨해지자 형원은 힐끔 현우를 올려봤다. 엎드린 채 두 두 주먹으로 턱을 괴고 입술은 한껏 내밀고서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현우를 본다.
"현우야, 너 연애 해봤으면 너도 저런 느낌이었어?"
"웅? 뭐라고?"
"너 연애 해봤다며... 그 사랑이란 게 진짜 저래? 저런 감정이야?"
"음... 글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 까? 난 저런 느낌은 아니었어."
"그럼 너 섹스는 해봤어?"
"!"
현우는 크게 놀라 영화재생을 멈추고 형원을 쳐다봤다.
"야! 넌 뭐 그런걸 물어보냐!"
"아니, 사랑하면 다들 한다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우가 너무 크게 놀라 오히려 형원도 당황했다. 별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자신이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어서 물어본 거였다. 현우는 본인도 잘 모르면 검색해서라도 찾아봐 주곤 했으니까,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친한 친구로서 물어봤다가 크게 혼났다. 머쓱해진 형원은 현우가 멈춰놓은 영화를 다시 재생했다. 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빨개진 그의 귓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보여준다. 형원은 처음 보는 현우모습에 큰 눈을 끔벅이며 눈썹, 눈, 코, 입술 하나하나 다시 눈에 담기 시작했다. 반듯하면서도 끝이 양옆으로 솟은 짙은 눈썹, 쌍꺼풀없이 둥근 눈매의 눈, 얼굴에 맞게 길면서도 높게 뻗은 콧대, 무엇보다 제일 신기한 건 조화로운 듯 조화롭지 않은 두툼하면서도 생기있는 입술이었다. 눈썹과 코가 곧아서 인상이 강해보일법도 한데, 동그랗기만 한 눈과 입술이 그 강함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다. 따로 화장을 한 것 같지 않은데 입술은 언제나 붉은 빛을 띄었고, 도톰하다못해 두툼해 보이는 입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형원이는 새삼 현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눈물이 차올랐다. 본인이 왜 울고 있는지도 몰라 형원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한참을 그러고 있자 현우는 형원을 불렀다. 형원은 미동이 없다. 현우는 다시 영화를 멈추고 형원을 불렀다.
"야 형원아, 왜 그래?"
"..."
현우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형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파?"
현우는 형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뜸 섹스를 해봤는지 묻지를 않나, 민망하여 소리 좀 질렀기로서니 얼굴을 저리 숨겨버리고 부름에 대꾸조차 안 한다. 현우는 기가 찰 노릇이다. 간지럽혀도 보고 목 뒤로 손가락을 찔러도 봤지만 형원은 꿈쩍하지 않는다. 현우도 슬슬 짜증이 난다. 형원이가 어찌하고 있던, 그냥 보던 영화나 마저보려고 다시 스페이스 바를 누른다. 현우는 영화에 곧 빠져들었지만 옆에서 미동도 없는 형원이 신경 쓰인다. 사실 현우는 연애경험은 없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세상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것에 있어 '감정'이란 것이 없었다. 아마 제일 처음 '감정'이 쓸모없음을 깨달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그 시절 현우에겐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핑퐁' 같은 상상친구였을거라고 어른들은 짐짓 말하곤 했지만 현우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우는 자신과 언제나 함께했던 강아지, 할머니 그리고 친구들과 누나들은 사실은 사람이 아닌 귀신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에겐 사람이나 귀신이나 똑같았다. 귀신들도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감정이 있었고 표정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단지 그들의 기억력은 매우 나빴고 어느 하나에 꽂히면 그 것에 집착했다. 현우의 첫 친구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기때부터 봐왔던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엄마·아빠 말고 그 친구와 '대화'를 했었다. 현우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됐을 때 즈음 그 친구와 이별하게 됐는데 준비 된 이별이 아니었었다. 뭐 언제나 이별은 갑작스러운 거지만. 현우가 상상친구와 노는 게 아닌 것을 알아차린 현우 친할머니는 용하다는 스님께 부탁해 현우를 절로 보냈다. 여기서 잘 놀고 있으면 엄마·아빠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장난감도 사준다는 말에 가겠노라고 대답한 현우였다. 현우는 자신이 어디를 가도 항상 함께했던 친구가 있었기에 엄마·아빠가 없는 그 곳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절에서 자게 된 날 밤, 현우는 아무리 찾아도 친구가 보이질않자 점점 무서워졌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친구는 모습을 보였다. 왜 이제 왔냐고 무서웠다고 울부짖는 현우 소리에 현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고 문을 열고 들어온 스님도 깜짝 놀랐다. 너무도 온전한 사람의 형태를 한 현우의 '친구'를 보고 스님은 두 눈을 감고 불경을 외웠다. 현우의 친구는 갑작스러운 스님의 등장에 얼른 몸을 숨기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현우는 제 친구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스님이 알 수 없는 말을 크게 외치자 친구는 온 몸을 벌벌 떨더니 귀를 막고 주저앉아 울부짖는데 그 울음소리가 마치 당나귀 울음소리 같았다. 친구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현우에게 스님이 이상한 말을 못하게 막아달라고 울부짖었다. 현우는 친구가 괴로워 하는 걸 보는 게 너무 무서웠지만 있는 힘껏 스님에게 달려가 몸을 부딪혔다. 스님은 현우의 공격에 놀라 잠시 불경을 외는 것을 멈췄고 그 틈을 타 친구는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현우는 속으로 안도했지만 이내 스님의 꾸짖음에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 지 아냐고. 당장 이리 오라는 불호령에 현우는 오줌을 싸버렸다. 현우가 오줌을 싸든 말든 스님은 현우 목덜미 뒤를 잡고 법당으로 갔고 현우는 그 곳에서 뜬눈으로 밤을 샜다. 그리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법당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현우는 밖에서 부르는 친구 목소리에 법당 문을 열어주기 위해 일어났다. 현우가 법당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현우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서늘함이 느껴졌고 본능적으로 '이 문고리를 열면 안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현우가 나오질 않자 밖에서 친구는 더욱 큰 목소리의 화가 난 투로 현우를 불렀고 현우는 애써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귀를 막았다.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현우는 무릎을 모으고 부처님 불상 뒤로 숨었다. 곧이어 어제 현우를 혼내던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뒤는 현우는 기억하지 못한다. 중간중간 기억이 나는 거라곤 그 일이 있고 난 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할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과 할머니와 스님이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스님은 그 친구가 온전한 사람의 형태를 한 걸로 봐선 꽤 오랜 시간 현우의 곁에 있으면서 생기를 흡수한 것 같았다고, 아마 온전한 모습을 갖기위해 현우를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현우의 등과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중얼거리셨다. 그 이후 현우는 말 수도 줄고 감정표현에 둔해졌다. 친구를 떠나보낸 슬픔도 컸지만 마음을 나눈 상대가 갑자기 사라짐으로써 오는 슬픔과 절망, 허무함 그리고 본인이 친구를 외면했다는 것에서 부 터 오는 죄책감까지. 어린 현우를 너무 힘들고 아프게 하는 감정들이었다. 현우가 불상 뒤에 숨어있던 그때 문밖의 친구는 현우를 향해 모질고 악한 말들을 쏟아냈는데, 그 단어와 감정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분노만큼은 강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현우는 그 분노와 원망이 무서워 사람을 사귀는 것을 많이 꺼렸다. 그때 현우 나이 고작 4살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현우는 정말 소수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교실에서도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할머니와 함께 절에 가서 기도도 올리고 기도 효과인지는 몰라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귀신을 보고 느끼는 횟수가 줄었다. 그러나 사춘기가 찾아왔을 무렵 현우는 처음으로 동정을 하게 되는데 그건 귀접에 의한 몽정이었다. 오랜만에 가위에 눌리는 듯하여 크게 개의치 않고 잠드려는 찰나, 현우는 묘한 들뜸에 눈을 떠 제 주위를 살폈다. 평소에 눌리던 가위와는 느낌이 달랐다. 주위를 살펴보니 굉장히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제 배 위에 있었고 그는 현우를 향해 살짝 웃었다. 가위임이 분명한데 가위가 주는 압박감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 남자는 현우가 자신을 보든 말든 웃고 있던 그 입을 그대로 현우의 그 곳으로 가져다 댔고 이내 입을 쩍 벌리더니 현우의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한순간 느껴진 전율에 현우는 놀라 입을 막았다. 그 뒤는 그 귀신이 움직이는 대로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몽정을 하게 되고 현우는 세수를 하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왜 하필 처녀귀신도 아니고 남자귀신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여자가 아닌 남자인 저를 섹스상대로 삼았을까. 현우는 이 긴 이야기를 형원에게 할 수 없었다. 첫 몽정상대가 남자귀신이었고 그 이후로는 남자귀신들만 꼬여서 가위눌리면 귀접으로 섹스를 했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형원은 마음이 심란했다. 갑자기 나타난 현우였다.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기도하고 피해 주는걸 싫어해서 초반에는 그저 조용히 곁에만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어오는 현우였기에 마음을 열었고 신경 쓰지 않으려해도 저에게 관심을 주는 현우가 좋아서 계속 신경 쓰게 됐다. 매일 보는 현우였음에도 이렇게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에게 신경을 뺏기게 된다. 평소에는 멍때리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현우를 만나고선 그저 현우를 보고 있는 게 일상의 전부다. 매일같이 밥 먹는 현우, 공부하는 현우, 자는 현우를 보고 있다. 현우가 산책이나 운동을 나가면 그 짧은 순간이 제일 심심하고 지루하다. 언젠가부터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는데 현우를 만나고선 다시금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오늘만 하더라도 현우와 같이 영화를 보는 이 순간이 언젠가 끝이 날거란 생각이 들자 그게 너무 슬퍼졌다. 잊지 않으려고 하나하나 곱씹어 기억해보는데도 가끔 현우 얼굴을 떠올릴려고하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형원은 그런 순간들이 두렵다. 형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현우와 바다에 다녀온 이후 줄곧 든 생각이 있었다. 형원은 생각만 해왔던 일을 실행에 옮겨보려한다. 용기를 이렇게 내는 게 비겁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형원은 오랜만에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하려한다. 현우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속으로 전해본다.
현우가 한창 형원이의 기분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의 불이 깜박인다. 영화를 볼 겸 부엌 가까이 있는 거실 불 하나만 켜놨었는데 그 불이 깜박인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현우가 일어나면서 매트리스가 움찔거리자 형원은 고개를 들어 현우의 행동을 본다. 현우는 손을 뻗어 전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거실 불을 끄고 다시 매트리스로 돌아왔다.
"뭐야?"
"웅, 거실 쪽 불이 깜빡이더라고..."
"나때문인가..."
현우는 금세 또 시무룩해진 형원을 보고 얼굴을 잡아챘다.
"뭔데, 뭐때문에 그래?"
"아, 이거 놔라..."
현우는 목소리만 위협적이고 표정은 여전히 울상인 형원의 양 볼을 엄지와 검지로 조물거렸다.
"뭐때문인데, 왜 이렇게 울상이야"
"..."
형원은 큰 눈망울로 현우를 마주 봤다. 예의 졸음 가득한 그 눈빛이 아니어서 현우는 짐짓 예상했다. '형원이가 지금 많이 심란한가 보다.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치긴 하는데... 얘는 감정적인 부분이 컸어 더욱 그러나보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현우도 슬슬 이별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원의 볼을 가볍게 쥐고 있던 손을 놓자 형원이가 현우에게 기대온다.
"너 방학 언제까지라고했지?'
"한 일주일 남았나...?"
형원은 현우의 대답을 듣고선 현우의 가슴에 기대 현우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작게 들리는 깊은 울림에 형원은 눈을 감고 더 집중한다. 현우는 형원의 그런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다. 형원은 곧 자신의 두 팔을 현우 허리에 감싸 안고 더욱 가슴에 들러붙었다. 현우의 심장이 빨라졌다. 현우는 심장이 쫄깃한 기분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침착하려 애썻다. 형원은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현우는 그런 형원을 다시 부르지 않고 잘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형원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현우는 그리 깊게 잠들지 못하고 더위에 뒤척이고 있었다. 뒤척이는 몸이 꽤 묵직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곧 느껴지는 압박감에 놀라 눈을 떴다. 눈을 분명히 떴지만 주위는 온통 암흑이다. 익숙하지마는 적응되지 않는 이 기분은 가위눌릴 때 매번 느꼈던 기분이다. 이 곳에 오고 나서는 한 동안 가위눌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 지 현우는 당황스러웠다. 매번 머리맡에 두고 자는 곰 인형을 안으려 손가락을 움직였으나 꿈쩍도 안 한다. 자주 가위에 놀리다 보니 현우 나름의 요령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가위를 풀 수 없었다. 정면을 보고 꼼짝없이 누워있던 찰나, 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손길에 현우는 머리칼이 쭈뼛섰다.
"아!"
'그 사람이다. 매번 날 찾아오는.' 엄밀히 따지자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지만 현우는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지금 저 방에는 형원이가 있는데 이 귀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갑자기 여기로 쳐들어온 건지 현우는 무서우면서도 이런 의문에 더욱 몸부림쳤다. 무엇보다 어서 형원이가 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현우다. 그런데 그 무자비한 손길과 조금 다르다. 예전처럼 발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현우를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현우의 발목부터 쓸어올리는 느낌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길에 현우는 더욱 간절하게 형원이를 찾는다. 마음속으로 형원의 이름을 부르는데 바로 앞에서 대답이 들린다. 현우는 잘못 들은 것 같아 형원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조금의 텀을 두고 다시 앞에서 들린다. 진짜 형원인 건가? 하지만 속으면 안된다. 저번에는 친한 선배 모습을 하고 나타나 귀접을 시도하던 놈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아까는 움직일 수 없었던 몸이 조금 움직인다. 그래봤자 손가락 조금 움찔할 정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도 없이 현우는 목덜미가 서늘해짐을 느낀다. 애무가 시작됐다. 현우는 전에 없던 손길과 입김이 당혹스럽기만하다. 그러면서도 오랜만의 귀접이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렘과 걱정, 두려움이 섞인 흥분.
움직임은 계속됐다. 현우는 오랜만의 귀접에 몸을 어찌할 줄 몰랐다. 과격했던 섹스와 다르게 지금 손길과 움직임은 '다정함' 그 자체였다. 무자비한 삽입과 잠깐의 통증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쾌락이 아닌, 하나하나 만져지는 손길과 움직임마저 리듬이 있다. 이번에 올라탄 놈은 손을 꽤 얼굴에 자주 갖다 댄다. 마치 어린 아이의 말랑한 볼을 쓰다듬듯이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기도 하고 큰 손으로 감싸 쥐기도 한다. 현우는 그토록 많은 가위를 눌렸고 그 중 몇 번의 귀접을 겪었지만 이번처럼 형체가 느껴지고 그려지는 귀접은 처음이었다. 움직임은 꽤 오랫동안 지속했다. 귀접은 안그래도 쾌락이 크기 때문에 현우는 몇 번이고 정신을 놓칠 뻔했다. 현우는 쾌감이 커질 수록 제 위에 있는 이가 진짜 형원이면 어쩌지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형원이가 제 위에 있게 된 건지 아까 이 것때문에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던 건지 잡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그저 정신을 놓고 싶어만 진다.
현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진 늦은 오후였다. 이불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속옷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흥건히 젖은 팬티와 살짝 걸치듯 덮고 있던 이불이 현우의 사정으로 인해 축축하다. 현우는 깊은 한숨을 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귀접은 제일 조심해야 하는 건데 이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고 일어난 꼴이라니... 현우는 자괴감에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곧 있으면 형원이 올 시간인데 싶어 다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움직였다. 어제의 고통이 아직도 남아있는 지 온 몸이 뻐근하다. 나른하다 못해 뻐근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구를 정리한다. 이렇게까지 욕구불만이었나 싶어 현타가 온 현우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밖에 나가서 방향제와 섬유탈취제까지 사 왔다. 형원이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아직 한 끼도 안 먹은 것이 생각났다. 현우는 라면 3개를 넣고 끓이며 어젯밤의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그 동안 형원이덕인지 뭔지는 몰라도 가위도 눌리지 않았는데 어제는 뭐였을까. 진짜 형원이었을까?
그날 밤 형원은 오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이름도 불러보지만 형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그저 형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거라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어렴풋이 귀가 트이는 찰나 익숙한 불편함이 느껴졌고 이내 가위에 눌리는 현우. 이번에는 가위에 눌리자마자 삽입이 느껴졌다. 뭐가 그리 급한 건지 현우의 사정이 끝나면 또 삽입이 이어졌다. 현우는 끊이지 않는 쾌락에 지칠 뿐이었다. 의아한 건 강압적인 관계 속에서도 애무만은 다정했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가위가 풀렸다. 현우는 어렴풋이 눈을 떠 주위를 둘러봤다. 현우는 많이 지쳐버렸다. 창밖이 푸르게 빛날 때 즈음 현우는 안방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이 시간에 집에서 인기척을 낼 사람은 형원뿐이라 생각해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많이 흐트러지진 않은 지 이상해 보이진 않을 지 걱정이다.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있어 형원이 제 옆에 누워 자려고 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것 같아 현우는 정리를 좀 하고 싶지만 지금 이 시각에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안 일어나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일어난다고 한들, 일어나서 뭐라고 둘러댈지도 고민이다. 뭣보다 아직도 가위에 가위에 눌린 것 처럼 몸이 무거워 일어날 수가 없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 중이라 인상만 쓰고 있는 현우 귓가에 팡팡-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형원은 현우 옆에 누우려는 지 베개를 정리하는 듯한 소리가 났고 이내 현우의 몸을 감싸 안아왔다. 평소에도 자주 형원이가 현우를 옆에서 끌어안고 잤기에 현우는 형원임을 확신했다. '이불이 젖어있을 텐데...'불안감에 살짝 몸을 뒤쳑였지만 형원은 그런 현우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까의 열을 식혀지는 듯한 냉기에 현우는 긴장이 풀려버렸고 스르륵 깊은 잠에 빠졌다. 현우가 눈을 떴을 땐 또 늦은 오후였다. 지난번 부터 잠만 들면 귀접이 이뤄져 자도 자도 피곤한 날들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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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야, 너 개학일 언제야?"
"일주일... 정도 남은거같네..."
현우는 휴대폰으로 캘린더를 열어 개학일을 확인했다. 개학을 하면 현우는 다시 짐을 챙겨 본가로 내려가야한다. 현우에게 개학은 방학 동안의 잠깐의 일탈이었던 이 곳의 생활을 곧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현우는 한 손에는 냉체족발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느라 바쁘다. 둘만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형원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현우의 뒤로 가 현우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한숨을 작게 쉬었다. 현우는 형원의 입김에 목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현우는 예전만큼 잘 챙겨 먹고 있지만 조금은 야윈 모습이다. 얼마 전부터의 귀접에 기운이 많이 뺏긴 건지 볼에 살이 쏙 빠진 느낌이다.
"무슨 일 있어 현우야?"
형원은 현우의 얼굴을 살피다 광대부분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현우는 손길에 맞춰 고개를 움직이다가 도리질한다
"아니.. 그냥 잠을 잘 못 잤어"
형원은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차며 현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현우는 입술을 뾰루퉁내밀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형원은 그런 현우가 귀여워 피식 웃고 만다. 현우는 형원의 웃음에 저도 웃어 보인다.
"밥 다 먹었어?"
형원은 현우가 더 수저를 들지 않고 미적거리자 걱정스러운 맘으로 물었다. 현우는 '아직...'이라고 답을 하면서 마저 먹으려는데 먹는 모습이 영 시원찮다. 하품을 쩌억하면서도 입에 족발을 욱여넣는 현우를 보며 형원은 조금 걱정이 됐다. 형원은 사실 현우가 왜 피곤한지 다 알고 있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가 곤란하겠지 아무래도. 현우가 피곤해하는 이유는 형원, 자신 때문이었음을. 형원은 지난 날 현우에게 섹스를 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었다. 현우는 화를 내며 대답을 피했지만 사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현우가 처음 이 집에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던 형원이다. 이 곳은 자신의 터이기 때문에 쉽사리 다른 이가 접근하지 못하는데, 누군가 항상 알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웬만해선 화를 잘 내지 않는 형원이지만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은 매우 불쾌하기에 초반에는 현우가 달고 오는 낯선 이의 기운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현우에게 묻어있는 기운이 꼬리를 남기는 것인지 그 기운을 묻힌 이는 계속해서 현우의 주변을 얼쩡거렸고 형원은 일부러 제 기운을 현우에게 많이 묻혔었다. 이 곳에서의 생활이 길어지자 현우에게서 느껴지는 다른 기운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처음부터 강하게 느꼈던 기운은 아직도 묘하게 남아있었다. 그 기운을 묻힌 이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투명한 검붉은 색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때는 형원이 기운이 조금 약해졌을 때였다. 아마 바다여행때였을 것이다. 형원은 그 존재가 현우에게 붙어있는 섹귀였음을 알아챘고 그 섹귀는 계속해서 현우를 탐했다. 마치 형원에게 현우의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듯이 형원에게만은 검은 아우라를 뿜어냈다. 형원은 섹귀의 기운이 느껴질 때마다 현우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 둘의 싸움은 제삼자가 보기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었다. 마치 애착인형을 뺏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고집부리고만 있었으니까. 형원은 현우가 자신의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누구도 얼씬 거리지 못할 만큼 강하게. 본인의 기운을 남기고 싶었다.
바다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형원은 끝없이 넓은 바다를 보며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객관식 문제 같은 감정은 모든 게 정답인 것 같아서 형원을 헷갈리게 했다. 하나씩 답을 찾기 위해 하나씩 지워가며 답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사랑이었다. 형원은 '사랑'이란 답을 찍었지만 답이 맞는 지 풀이를 해야 했고 풀이 과정을 거치려했지만 공식도 모르는 상태라 풀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린 방법은 바로 '답안지'를 보는 것. 형원은 현우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감정은 곧 지워졌다. 형원은 곤히 잠든 현우에게 올라타 가슴께를 짓눌렀다. 가위가 시작됐다. 현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몸을 맡겼다. 그 섹귀로 인해 현우의 몸이 어느정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형원은 화가 났다. 현우의 바지 앞섬이 두둑해진다. 형원은 현우에게서 묻어나던 섹귀의 기운이 짙어짐과 동시에 섹귀가 창밖으로 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섹귀도 현우의 섹텐에 반응한 것이니라. 형원은 그 섹귀 보란 듯이 현우를 탐하기 시작했다. 형원도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었다. 현우와의 귀접은 형원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계속해서 현우를 탐할수록 심장이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은 정말 정신없이 박아대기만 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형원은 움직임을 멈췄고 그제야 제 아래에 늘어져 있는 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사정을 한 것인지 속옷과 이부자리는 땀과 정액으로 축축했다. 형원은 현우의 이마를 한 번 쓸어넘겨 제 체온으로 열을 식혀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현우에 대한 형원의 집착은 더욱 커졌다. 매일 밤 현우를 찾았고 현우는 제 위에 있는 존재가 형원인 줄도 모르고 그저 몸을 맡긴 채 쾌락에 울었다. 형원은 그 사실이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그 누구보다 제 기운이 강하게 묻어있는 현우인데,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어우... 밥을 먹고 있는데도 졸리네..."
현우는 작은 눈을 꿈벅이면서 바닥에 바로 누워버렸다.
"입돌아가 침대 가서 자"
"네가 그런 소리 할 건 아니지 않냐"
뵤루퉁한 입술로 현우는 고개만 들고서 형원을 올려다봤다. 형원은 푸흐흡 웃어 보이곤 현우를 일으키기 위해 발끝으로 현우 어깨를 톡톡 쳐댔다. 현우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매트리스로 가 누웠다. 대자로 엎어버린 현우에게 형원은 옆에 살짝 걸터앉아 물었다.
"현우야,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움... 딱히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뭐 그냥 남들 도와주면서 미움 안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형원은 그게 무슨 꿈이냐고 비웃었지만 현우는 꿈이 뭐 거창해야 하냐며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형원은 평소엔 잘 하지 않던 본인 얘기를 꺼냈다.
"현우야, 나는 어른이 되는 게 싫었다? 무서웠어"
현우는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형원의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봤다. 형원은 현우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저 혼자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혼자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야. 딱 그 열여덟살, 열아홉살... 그 나이가. 나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나보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바다로 떠미는 게 너무 무서웠어"
현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이 하는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자신도 떠밀리기 전에 스스로 헤엄쳐보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형원이가 하는 비유가 꽤 적절하다 생각하면서 현우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도 그 망망대해를 마주 보고 서 있는 기분이야. 그전에는 쳐다보는 것조차 못했다면 지금은 그래도 노려볼 수는 있을 것 같아."
형원은 소리 없이 눈으로 웃었고 현우는 그런 형원을 따라 웃었다. 형원은 고개를 돌려 현우를 쳐다봤다. 현우와 형원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형원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지난 날 현우와 함께 보았던 바다에서, 수 없이 반짝이던 오징어 잡이 배를 보면서, 그 바다를 내려감싸고 있던 검은 밤하늘에도 별은 반짝이고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하나의 답을 찾았다. 현우에 대한 의문이 '사랑'이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은 '포기'였음을. 포기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현우는 형원의 눈동자가 깊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음에 안도했다. 감동과 슬픔, 안도감은 차례로 현우를 훑어내렸다. 현우는 간만에 귀접도 가위도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단 잠이 들기 전 현우는 짧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지난 날 형원과 함께갔던 바다에 다시 놀러 간 두 사람. 그때는 함께했던 곰돌이는 없고 형원과 현우 두사람 뿐이다. 둘은 함께 물장난을 치며 즐겁게 지냈다. 현우는 형원과 진짜 친구였다면 이렇게 놀았을 텐데-생각에 울컥해졌다. 드넓은 바다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형원과 현우는 실컷 바다에서 뛰어놀고 모래사장에 누워 다시금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현우는 그 꿈의 꿈을 또렷이 기억하지 못한다. 어렴풋이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추던 태양이 지고 현우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졌다. 현우가 잠들었음을 확인한 형원은 제 옆에 누워 연신 헛웃음치는 현우가 바라본다. 행복한 꿈이라도 꾸는 걸까?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숨소리만 색색인다. 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제 교복을 꺼내 본다. 교복위에 올려져 있는 '채형원' 명찰을 집어 들었다. 빛이 조금 바랜 앨범을 꺼내 제 사진위에 그 명찰을 올려본다. 멀뚱히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사진 속 형원에게 '채형원' 명찰을 달아주는 현실 속의 형원. 이 방안에만 존재하는 형원에게 지금의 형원은 하나둘씩 흔적을 지우려한다. 제 기억 속의 옷장도 책상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티가 나지 않게끔 조금씩. 형원은 책상을 정리하다 예전에 쓰던 연습장을 발견했다. 형원도 한 때는 대입준비를 하던 학생이었으니까. 마지막 장에 남아있는 날짜를 보니 2001년 7월이다. 형원은 지난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눈을 뜨면 항상 하루는 이 곳에서 시작됐고 끝도 이 곳이다. 기억을 할 정도로 그렇게 쓸모있는 나날이 아니었나보지- 짧게 생각을 마치고 형원은 연습장을 마저 정리한다. 하나씩 사라지는 흔적에도 형원은 덤덤하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지만 오히려 하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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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마지막이네 내일은..."
현우는 휴대폰을 보다가 매트리스위로 휙 던져버렸다. 형원은 거실의 큰 창에 턱을 괴고 밖만 바라보고 있다. 내일이 지나면 현우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이제 이 곳에서의 생활도 슬슬 정리를 해야 한다. 이미 옷가지와 당장 필요한 물건들 아니고서는 본가로 부쳤다. 원래 썰렁했지만 더 썰렁해진 거실에 두 사람의 분위기도 맨송맨송하다. 현우는 이대로 시간을 보내긴 아깝다며 형원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오늘 밤 불태워보자며 캔맥주와 안주를 여러 개 사 왔지만 절반도 채 마시지 못했다. 현우는 조금 취한 듯 양 볼과 귀가 붉다. 몹시 신나 보이면서도 차분한 텐션이 낯설기만 한 형원이다.
"너 원래 술 마시면 이래?"
"웅? 아니~?"
현우는 자꾸 실실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고 흥이 오를 때마다 선곡을 바꿔가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채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노래를 계속해서 바꾸니 형원이 한 소리 했다. 현우는 마지못해 유툽 플레이리스트를 조금 차분하면서도 밤드라이브와 어울리는 팝송으로 바꾼다. 잔잔한 비트에 몸을 맡긴 현우는 어깨와 손을 꿈틀대며 리듬을 탔고 형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에 맞춘다. 현우는 새 캔을 따며 형원에게 물었다.
"형원아, 너는 나중에 뭐할 거야?"
"나...? 글쎄..."
현우는 방금 딴 캔맥주를 한 번에 절반이나 마시고는 남아있던 새우깡안주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있잖아,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네가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거 같다고 했었던 거 말이야"
"그거?"
"웅 그거... 그 말 뭔지 알 것 같아. 나도 조금 그렇거든..."
"그래? 너도 그래?"
"웅... 그냥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은데 그 파도에 눕기까지가 너무 무섭다고나 할까?"
"맞어. 가라앉지는 않을 까 그리고 그 파도가 나를 덮치진않을 지 걱정도 되고 말이야..."
"새끼거북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다로 향한대."
"거북이?"
"바닷가에서 태어난 수많은 거북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바다로 가더라니까? 그리고 그냥 바다에 몸을 던져"
"막 파도에 휩쓸리고 다시 밀려나고 그러는데도 바다로 막 엉금엉금 돌진하더라"
현우는 갓 태어난 새끼거북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양팔을 옆으로 허우적거리며 최대한 거북이 스럽게 움직였다.
"그냥 하면 되는건가봐. 겁먹을 필요도 없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말을 잠자코 듣던 형원이다.
"나도 그래서 그냥 해보려고. 어떻게든 되겠지"
현우는 오그라드는 말을 했다며 먹다 남은 캔맥주를 찌그려트렸고 이대로 잠들기는 아쉽다며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형원은 여전히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7월의 열대야는 습하다. 끈적이는 밤공기에 현우는 덥다며 웃 통을 벗었고 형원은 그런 현우를 보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뵤로롱-켜지는 에어컨 소리에 현우는 '오우씨!' 작게 탄성을 질렀고 형원은 현우가 먹다 남긴 과자를 몇 개 주워먹었다. 현우는 바닥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우렁차게 코를 골기 시작했고 형원은 그런 현우 곁으로 다가가 몸을 웅크렸다.
"현우야..."
"나는 정말로 무서워..."
형원은 뜨문뜨문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태껏 내가 혼자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였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건 줄 알았어. 그래서 무서웠어..."
"그리고 매일 밤 혼자서 잠드는 것도 외롭고 슬펐는지만 그래도 이렇게 너를 만나서 괜찮아졌어. 다행이고 너무 좋았어."
"내 마지막이 너여서 정말 고맙고 다행이야 현우야. 이제는 나 혼자서 가야 할 길이잖아. 혼자서 해야만 하는 거고. 조금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노를 저어야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니까. 내가 달라져야 하잖아 그치?"
"나는 어쩌면 망망대해에 그저 내 몸을 맡긴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 노를 저으면 되는 건데 그걸 몰랐었구나 싶은 그런 거"
형원은 작게 웃었다. 형원의 고백은 현우의 코 고는 소리에 묻혀버렸지만 어쩐지 표정만은 좋아 보이는 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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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던 짐마저 정리하고 안방 문을 열어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현우.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숙취도 있고 거기에 가위까지 눌러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서둘러 짐을 정리하는 현우. 오늘 밤이 지나면 개학일이다. 잊지 않고 부동산에도 들러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현우의 얼굴에 중개인은 반값에 맞이해주었다. 그러다 곧 현우의 얼굴을 보고 왜 이렇게 얼굴이 안좋냐고 무슨 일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현우는 그저 어제 술 먹고 자서 그런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되려 그 변명에 더 혼쭐이 났다. 미성년자가 어디서 술을 샀으며 술을 마실 생각을 하냐고 혼자 산다고 그러면 못쓴다고 혼만 났다. 한동안 산책코스로 달리던 길을 다시 걸어봤다. 지난번에 만났던 고양이도 우연히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샀다. 한 입 베어 물기도 전에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때문에 후다닥 먹어 치우다 보니 아쉬움에 입맛만 다신다. 마지막 짐들마저 택배로 부치고 나니 집은 예전처럼 썰렁해졌다. 현우는 썰렁해진 집 분위기가 어색하다. 유튜브를 틀어 지난번 보던 다큐멘터리를 마저 시청한다. 바다거북이들은 육지에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간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바다거북인 바다로 돌아가기 전에 바닷새의 먹이가 되거나 혹은 바다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고 일부만 살아남아 성체가 된다. 현우는 희미하게나마 형원을 떠올렸다. 그래도 우리는 한 때 살아남았음을, 지금도 그러고 있음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이 집에 묵던 날 썼던 침낭을 꺼내 베개로 썼다. 이제는 날이 완전 더워서 몸에 뭘 걸치는 것도 갑갑해진 현우다.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자장가삼아 잠을 청한다. 현우는 어젯밤에 형원의 고백을 떠올렸다. 안 듣고 있는 척 코까지 골며 연기했지만 아마 다 티가 났을 거라고 짐짓 예상하는 현우다. 현우는 형원을 떠올리며 '안녕'을 빌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의 마지막 밤, 현우는 가위에 눌렸다. 가위에 눌렸음에도 후각은 살아있어 바다의 비린내를 맡았다. 뜨여지지 않는 눈을 뜨고서 주위를 살펴보니 아까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바닷가다. 저 멀리 인영이 보인다. 현우는 인영을 집중해서 바라본다. 아지랑이에 일렁이듯 인영을 쉼 없이 일렁이다 이내 형체를 갖춘다. 형원이다. 형원은 막 바다로 걸어가는 새끼바다거북을 손바닥으로 소중히 안아 들고서 바다로 보내주고 있다.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현우를 보고 있다. 현우는 형원과 시선이 닿았음을 느끼자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며 이 집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그리고 시작된 귀접. 현우는 지금 이 귀접이 형원임을 알아챘다. 현우는 손길과 애무가 지난번 귀접과 비슷함을 느꼈다. '진짜 형원이었구나...' 현우는 조금 더 손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형원 또한 굳이 정신을 차리지 않는 현우덕에 크게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현우는 땀을 뻘뻘 흘렸다. 현우가 움찔거릴 때 마다 끈적이는 피부에 눌어붙은 장판이 쩍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절정을 맞이했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이번만큼 자신도 즐긴 귀접은 없었기에 적잖이 놀랐다. 귀접은 본인의 기운이 빼앗기는 거라 해서 매번 풀려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번만큼은 어찌되도 좋았다. 현우가 눈을 떴을 때 밖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5시 11분. 현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기지개를 켜자 오른손에 무언가 잡힌다. 잡아들고서 눈앞에 갖다 대니 거북이모양의 열쇠고리다. 현우는 이 선물을 누가 주고 간 것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만두와 볶음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나름 거하게 한 상을 차린 후 숟가락과 밥그릇을 두 개씩 놓았다. 현우가 한 술을 막 뜨려는 찰나,
"아!"
현우는 식탁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연습장을 하나 부욱-찢었다. 그리고는 연필로 투박하게 형원이의 이름을 쓴다.
[채형원]
그리고는 제 맞은편에 놓고서 합장을 하고 제 몫의 밥을 먹기 시작한다. 현우는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지난번 형원과의 대화를. 영어숙제를 하고 있을 때 형원이 볼멘소리를 냈던 그 날.
'다른 나라는 첫인사랑 끝인사가 다른데, 왜 우리나라는 같은 걸까?'
'안녕이란 뜻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이래. 첫인사는 물음표니까 마음이 편안했냐고 묻는 거고, 끝인사는 마침표니까 바람을 건네는 거 아닐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식사를 마친 현우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작은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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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괜찮죠?"
중개인의 물음에 세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와 형원이 나간 후, 그 집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방을 둘러보던 손님은 거실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딱히 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창이 큰 게 마음에 든 듯했다. 안방을 둘러보던 손님은 옷장과 수납장을 찬찬히 열어보다가 사진 하나를 발견한다.
"어... 이거..."
"어머, 그 전 세입자가 놓고갔나보네. 얼굴 보니까 딱 알겠어."
중개인은 사진은 건네받아 수첩에 끼웠다.
"어떻게, 여기로 계약하시겠어요?"
"네, 햇빛도 이만하면 잘 드는 것 같고... 마음에 들어요."
"그럼 사무실 가서 계약서 써요."
중개인과 손님이 사라진 빈 집에는 햇살만이 가득 들어차있다.
'딸랑'
"어, 현우군! 어서 와요."
현우는 며칠 만에 다시 이 부동산을 찾았다. 다시는 올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했었다. 두고 간 물건없이 잘 챙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현우였기에 중개인의 호출이 더욱 의아한 현우다.
"이거 두고 갔더라고. 이거 학생맞지?"
중개인이 건넨 사진에는 곰돌이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현우가 있았다. 지난번에 기념용으로 몇 장 뽑았었는데 따로 꺼낸 적도 없는 저 사진이 어찌 그 집에 남아있는 지 의문이다. 현우는 사진을 건네받아 가방에서 참고서를 꺼내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학생, 생긴 건 남자답게 생겨선 귀여운 거 좋아하나 봐요?"
"네?"
"아니, 곰 인형 안고 있는 것도 그렇고 가방에 거북이 달린 것도 그렇고~ 다 귀엽네. 아 아직 어려서 그런가?"
현우의 가방에는 거북이 열쇠고리가 달랑이고 있다.
"아 뭐... 귀여운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대답하는 현우에게 중개인은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 많았다며 위로했다.
"그런 일을 해도, 어리긴 한가 봐요."
"..."
현우는 말없이 서 있다.
"아, 요즘 어때요? 공부는 잘하고? 진로는 정했어요?"
어른들의 뻔한 질문에 현우는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 척 했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부동산 중개인도 괜찮아요. 한 번 공부해봐요. 젊은 사람이 자격증 하나 따두면 좋지 뭐"
"그럴까요? ㅎㅎ"
중개인은 현우를 입구까지 배웅하는 짧은 시간동안 중개인의 수익과 좋은 점을 나열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현우는 부동산 벽에 걸린 나룻배 사진을 보고선 중개인에게 되물었다.
"저도 슬슬 노를 저어야겠지요?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그렇겠죠, 아무래도?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까."
"저도 살짝 어른이 되기 무서워지네요"
"현우군 또래 친구들도 다 그렇지 뭐"
"맞아요. 제 친한 친구도 그랬어요."
"응원할게요, 학생!"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fin-